“잘 있었니?”
모리안은 형식적으로 인사했다. 그의 음성에는 온기라곤 없었다.
모리안이 딱히 동생을 경멸하듯 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원래 그는 매사에 그런 인간이었다. 냉철하다 못해 냉정하고, 냉정하다 못해 냉엄한.
“네, 형님.”
데아론은 대본을 읊듯 대답했다. 형의 음성에 온기라곤 없었다면, 동생의 음성에는 생기라곤 없었다. 그저 구색만 갖춘 문답이었다.
“잠깐 따라와.”
이어, 모리안은 놀라운 말을 했다. 적어도 데아론이 생각하기에는 놀라운 일이었다. 겉치레는 이미 끝냈거늘 달리 무슨 용건이 있다고?
지난 2년간 이 집에서 자존감을 낮추는 법만 배운 데아론은 자동으로 움츠렸다. 이번에는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지레 겁먹는 태도였다.
모리안은 동생의 경직을 알아채고 괴이한 눈빛을 지었다. 그는 애써 눈빛을 다시 갈무리하며 동생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연무장에 가자.”
이제 데아론은 거의 공포에 질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연무장은 왜요?”
저택의 신식 연무장에 데아론은 여태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다. 그곳은 오직 후작님과 첫째 도련님을 위한 장소였다. 감히 사생아 차남이 멋대로 드나들 만한 곳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서먹한 상대가 안 하던 짓을 권하니 경계심이 짙어졌다. 데아론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가서 말해 주마. 일단 따라와.”
“……네, 형님.”
데아론은 음침하게 대답했다. 그는 방에 숨는 걸 포기했고 형을 따라 계단에서 내려왔다.
모리안은 먼저 뒤돌아 앞장섰다. 데아론은 살짝 뒤서며 걸었다.
“저기, 형님.”
“왜.”
데아론은 용기 내어 형을 먼저 불렀다. 모리안은 돌아보지 않으며 대꾸했다.
“마탑에 다녀오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데아론은 불쑥 물었다. 모리안은 우뚝 멈췄다. 데아론은 숨을 참았다.
모리안이 동생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데아론은 또 움츠렸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고, 사뭇 절박하게 형을 바라보았다.
“행사가 벌써 끝났나 해서요.”
데아론이 덧붙였다. 자신이 이미 성녀 얘기를 들었다고 곧이곧대로 실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사용인들이 함부로 떠들었다는 이유로 고초를 당할 수도 있으니.
역시 기본적으로 너무 착한 소년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소녀였다면,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용인들이 고초를 당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그게 전생에서도 데아론과 첼루나의 큰 차이였고 그녀가 그에게 사로잡힌 이유이기도 했다.
“아랫사람이 벌써 말을 흘렸구나.”
데아론의 배려는 어차피 소용없었다. 형이 뚝뚝하게 내뱉자 동생은 뜨끔했다. 모리안은 작게 한숨짓더니 덤덤하게 덧붙였다.
“가서 설명해 줄게. 복도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야.”
모리안은 다시 걸음을 옮겼고 데아론은 서둘러 뒤따랐다. 공주님의 이야기가 워낙 간절하게 궁금해서 형에 대한 거부감도 잊혔다.
형제는 연무장에 다다랐다. 모리안이 문을 열었다. 난생처음 들어와 보는 귀족들의 연무장이 데아론을 때아닌 호기심으로 채웠다.
‘우와.’
소년은 순간 공주의 소식을 향한 갈급함도 잊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넓고 세련된 공간과, 벽에 위엄차게 전시된 여러 반짝이는 무기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지혜로운 공주님과 영화로운 왕자님, 용맹한 전사와 신비한 요정의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흔하디흔한 동화에 심심찮게 나타났다.
그중 어린 데아론을 가장 매료했던 이야기는 아무래도 총명과 용기로 악당과 맞선 숱한 기사들의 설화였다.
올해 성년이 된 소년은 이미 오래전에 동화를 읽을 나이를 지났고, 나뭇가지를 목검 삼아 동네 꼬마들과 칼싸움하며 놀던 시절도 이제는 옛날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의 추억 같은 동경은 여전히 소년의 깊은 무의식에 향수처럼 아른댔다. 그 향수는 연무장에 들어서는 순간 되살아났다.
데아론의 심장이 은근하게 뛰었다. 공포, 분노,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오직 설렘으로. 아마도 이 집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문득 목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데아론은 퍼뜩 놀라 흠칫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공중에서 검을 낚아챘다.
“검 잡아.”
동생에게 다짜고짜 검을 내던진 모리안은 마찬가지로 다짜고짜 일렀다.
데아론은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형을 쳐다보기만 했다.
“검을 갖고 이리 와.”
모리안이 재촉했다. 그도 목검을 들고 있었다. 연무용으로 쓰이는 뭉툭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모리안이 손에 쥐자 웬만한 장검만큼이나 위협적으로 보였다.
“더 가까이.”
명령이 이어졌다. 데아론은 굳은 낯으로 형에게 다가갔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넘겨받은 목검을 무기보다는 방패처럼 앞에 추켜세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솔직하게 따지고 싶었으나, 지난 1년간 집에서 숨죽이는 훈련만 받은 소년은 이런 순간에조차 함부로 성내지 못했다.
데아론이 머뭇대는 사이, 모리안이 쇄도했다.
그는 한쪽 팔만 사용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벌한 동작이라 데아론은 본능적으로 목검을 들어 형의 공격을 막았다.
“윽.”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데아론은 이를 악물고 악력을 높였다. 검을 십자로 교차한 채 동생을 내려다보던 형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이제 됐어.”
모리안은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하게 말했다. 그가 검을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데아론은 검 손잡이를 여전히 꼭 감싼 채 형을 쏘아보았다.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이 또한 처음이었다. 형을 향해 대단히 건방진 말투가 터져 나왔다. 어깨가 뻐근했고 손목은 얼얼했다. 소년은 자연스레 울컥했다.
모리안은 스물한 살이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미 수재로 소문난 이름난 검사였다. 황족이 그를 불러 가르침을 청할 정도였으니.
그런 그가 아무리 팔 하나와 목검만 써서 공격을 시도했다 한들, 그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풋내기 소년은 근육이 으깨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데아론은 살면서 한 번도 검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 검술은 귀족의 소양이었다. 평민으로 태어나 길러진 그는 여태 검을 잡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
“시험이었어.”
모리안은 순순히 실토했다. 데아론은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지금 자기는 심장이 벌렁벌렁한데 저쪽은 태평하게 헛소리나 지껄이다니.
“시험이요?”
데아론은 되물었다. 그 단어 자체가 기분 나빴다. 모리안은 정녕 시험관 같은 눈빛으로 동생을 골똘히 뜯어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데아론. 혹시 기사가 될 생각은 없어?”
이번에도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제발, 제가 알아듣게 말을 해 주십시오.”
데아론이 딱딱거렸다. 오늘따라 불손함이 극에 달했다. 그만큼 그는 이 맥락 없는 상황에 지쳐 있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참기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모리안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가 목검을 아예 내려놓았다. 데아론은 아직 무기를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모리안은 피식 웃을 뻔했다.
“경계를 쉽게 풀지 않는 태도는 나쁘지 않아. 그런데 이제는 검 내려놔도 돼.”
모리안은 끝내 웃지는 않고 담담하게 권했다. 그제야 데아론은 겨우 손힘을 풀었다. 그런 동생을 똑바로 보며 형은 다시금 말했다.
“데아론, 네가 기사가 되면 좋겠어.”
아까와 내용은 같았으나 형식은 달랐다. 아까는 그나마 의문문이었고 지금은 아예 강요였다. 적어도 데아론의 귀에는 강요처럼 들렸다.
“저보고 검을 배우라는 말씀입니까? 이제 와서요?”
데아론은 불퉁하게 따졌다. 팔이 아직도 욱신대는 탓에 불손함은 이어졌다. 모리안은 개의치 않고 답했다.
“열여섯 살도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니야. 재능만 있다면.”
“저는 재능 같은 게—”
“있지. 자랑하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 정도 실력의 검사가 가한 공격을 한 번에 막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야. 심지어 태어나서 한 번도 검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데 너는 그걸 해냈어.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는 거다.”
슬프게도, 특정 소질을 타고나야만 잘할 수 있는 일들이 여럿 있었다. 검술도 그중 하나였다.
노력과 학습도 당연히 중요했으나 그저 열심히 외운다고 해서 몸이 날렵해지지는 않으니까.
“재능이 없다면 모를까, 있다는 걸 알아냈는데 일부러 썩힐 수는 없지. 너도 이 집에서 역할이 필요할 테고.”
모리안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데아론은 형의 말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할이라니? 이제 와서? 사생아인 나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늘 공기 취급했으면서.
“……갑자기 이런 태도를 보이시는 게, 오늘 마탑에서 일어난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데아론은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꽤 영리한 편이었다.
여태 뽐낼 기회가 없어서, 그리고 딱히 뽐내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라서 조용히 지냈을 뿐.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돌아온 형님이 내게 생뚱맞게 기사의 길을 권하신다.
두 가지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왜요? 첼루나 공주님이 성녀라고 밝혀진 거랑, 제가 기사가 되어 검을 배우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데아론은 정말로 궁금해서 질문했다. 공주님은 성녀, 나는 기사. 얼핏 들으면 그 두 가지는 서로 전혀 무관한 얘기 같았다.
“데아론. 현재 황실의 권력 구조에 대해 얼마나 알지?”
동생을 빤히 보던 모리안은 대뜸 물었다. 데아론은 또다시 평소답지 않게 짜증을 느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배운 게 없는데.”
그가 뼈를 담아 대꾸했다. 사실 이것저것 주워들은 건 많았지만 그걸 굳이 형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 기회에 배워. 현재 폐하께서는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정하지 않으셨다. 블레논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싶어 하시지만 황후 전하 소생이신 텔레스 전하를 후계로 지지하는 세력과 줄다리기를 하느라 때를 계속 미루고 계시지. 여기까진 이해했지?”
“네.”
데아론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갑자기 이런 노골적인 강론이라니, 당혹스러웠다.
모리안은 무감정한 눈과 단단한 말투로 뭉툭한 설명을 이어 갔다.
“여태 첼루나 공주님은 그 누구에게도 변수도 뭣도 아니었다. 그분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러나 그분은 엄연히 황자 전하의 동복이고 조만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인정받으실 분이다. 이것도 이해했어?”
이해했다. 데아론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공포를 느꼈다. 공포 외에도, 분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