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스는 되도록 동생과 손잡고 싶었다. 살리고 싶었다. 그 애도, 자기 자신도.
황녀는 필요하다 생각되면 서슴없이 사형을 결정할 만큼 냉정했지만, 필요도 없는데 굳이 피를 보려 할 만큼 잔인하거나 난폭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 애가 정말로 제 편에 서고자 한다면 먼저 찾아올 겁니다. 행동력 하나는 확실한 아이니까요. 제가 먼저 찾아가면 너무 굽히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거나 떠보려는 걸로 의심받을 테니 먼저 접근하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기다려 보죠.”
“교회는 어떡할까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죠. 이참에 라토르 공작의 그 잘난 낯짝이 구겨지는 꼴을 보고 싶네요.”
크레온 공작 부인이 조심스레 묻자 텔레스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누가 그랬든 저주는 성직자의 소행이니 교회와 긴밀한 블레논과 라토르 쪽은 제법 곤란해질 거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번에 마수 때문에 다친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풀어서 민심을 좀 모아 보도록 하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애써 주셔야겠어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다들 더 하실 말이라도 있나요? 없으면 물러가 주시길 부탁드려요. 좀 피곤해서.”
황녀를 미래의 주군으로 선택한 그들은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안 혼자 망설이는 얼굴로 텔레스 곁을 맴돌았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모리안, 너도.”
그래서 그도 결국 작별을 고했다.
손님들을 내보낸 뒤 텔레스는 시녀를 불렀다. 시녀가 가져다준 물을 마시며 텔레스는 뜨끈뜨끈한 머리를 식히려 애썼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성녀라니.’
뜬금없이 성녀라니. 역사서에 분명히 기록된 존재였지만 이제는 전설 속의 상징쯤으로만 취급받는 인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무작정 부정하기엔 당장 눈앞의 물리적인 증거가 너무 뚜렷했다.
성력이 폭발했을 때, 텔레스도 분명 느꼈다. 그건 감히 인간의 언어로 함축할 수 없는 힘이었다.
지금 당장 묘사해 보라고 해도 도무지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리라.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하며 시간을 낭비하느니 앞으로의 대응 방침을 고민하는 게 훨씬 나았다.
정말로 그 아이는 내 아군이 될 것인가. 첼루나 포렌타인, 엄연한 내 동생이지만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득한 그 애가.
이 황궁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가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아득했다. 늘 사람, 사람, 사람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텔레스는 퍽 외로웠다.
“……힘들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많은 이들에게 긴긴 하루였다.
온종일 책만 읽으며 버틸 수는 없었다. 데아론이 독서를 즐기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시내라도 다녀와 볼까 했으나 오늘은 유독 외출하기 귀찮았다.
괜히 뭘 하든 나른하고 무기력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는 법이다. 오늘이 소년에게 그런 날이었다.
결국 데아론은 정원으로 나갔다. 오늘은 저택 밖에 나가기 싫고 그렇다고 방 안에만 계속 있으면 답답하니 정원은 적당한 타협점이었다.
데아론은 자신이 이럴 때 애용하는 튼튼한 나무를 하나 골라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위로 올라갔다.
정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용인과 마주치기 마련이고, 눈칫밥을 먹고 자란 사생아 소년은 그 누구의 차가운 시선도 받고 싶지 않았다.
나뭇잎 사이에 숨는 건 안성맞춤이었다. 여름철의 녹음 속에서 그는 상쾌한 은신을 즐겼다.
종종 벌레가 나타나 휴식을 방해하기도 했지만, 과거 야생에서 뛰놀던 씩씩한 시골 소년 데아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것들을 치웠다.
굳이 벌레를 죽이지는 않았다. 데아론은 꾸물대는 애벌레를 살짝 잡고 옆 나뭇가지 잎사귀에 올려놓은 뒤 벌레가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평화로웠다. 늘 이랬으면 좋겠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흘러갔으면. 더 좋아지는 건 감히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더 나빠지지만 말고, 가만히.
“어, 너 언제 돌아왔어? 왜 벌써 온 거야?”
“야, 들어 봐, 진짜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데아론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아래를 염탐했다.
사용인 몇 명이 데아론이 숨은 나무 아래 모여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렇게 흥분했어? 후작 각하랑 마님이랑 도련님은?”
“방금 돌아왔어, 행사가 좀 일찍 끝났거든, 그런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행사가 왜 일찍 끝났는지 알아?!”
이어, 텔로아 후작을 모시고 마탑 신축 기념행사까지 다녀온 시종은 소란스러운 음성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수. 성녀. 첼루나 공주. 전부 알아듣기 힘들고 이해하기는 더더욱 힘든 이야기였다.
다른 사용인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시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묘사했다.
“그럼 막내 공주님이 정말 전설 속 성녀라는 거야, 뭐야?”
“그래, 바로 그거야, 진짜라니까!”
“세상에, 어떻게 그런…….”
“야, 너 바른대로 말해. 이거 사실 다 농담이지? 지금 우리랑 장난치는 거지, 그렇지?”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해?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봐! 마부랑 호위도 다 봤어.”
“그런데 그럼, 그 뜻은, 황자 전하의 동복동생이…….”
불길한 숙덕임이 우수수 번졌다. 사용인들은 저들끼리 초조한 시선을 교환했다.
주인과 명운을 같이하는 아랫사람들이 현재 후작 일가가 끼어든 정치판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뻔히 알았다. 후작이 지지하는 텔레스 황녀와 황녀의 정적 블레논 황자, 그리고 그들의 못난이 동생 첼루나 공주에 관하여.
그런데 그 못난이가 갑자기 성녀가 되었다고? 마수들을 무찌른 영웅이 되었다고? 경악할 노릇이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의 주인은 황후의 소생인 텔레스 황녀를 지지하는데. 첼루나 공주는 황비의 딸이잖아. 우리 편이 위험해지는 거야?
“다른 애들도 현장에 있었다고 했지?”
“응, 그렇다니까.”
“그럼 더 물어봐야겠어. 이게 도통 믿을 수 있는 얘기여야지…….”
“성녀라니! 그것도 막내 공주님이!”
“야, 왜 다들 내 말은 안 믿어?”
사용인들이 그토록 불안하게 숙덕대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데아론은 나뭇잎 사이에 얼어붙어 방금 자신이 주워들은 말을 곱씹었다.
‘공주님? 첼루나 공주님이 성녀?’
데아론도 성녀가 뭔지 알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
뭇 귀족은 데아론이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가 무식하다며 깔볼지 모르지만, 사실 성녀의 전설은 평민들에게 유독 사랑받는 이야기였다.
신의 힘을 받아 인간들 사이를 두루 다니며 병든 자를 치료하고 궁한 자를 도왔다는 성녀님.
그런 친서민적 설화는 귀족, 특히 귀족 남성이 지배하는 전통적인 종교의 궤도에서 살짝 벗어나 평범한 민중의 신앙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했다. 교회의 어른들이 축제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정겹고 오랜 민담이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진짜라고?’
진짜가 아니라고 부정하기엔 저기 있는 증인들의 진술이 너무도 생생했다.
게다가 평소에도 교회의 사제들은 성물과 성력으로 여러 기적을 행하며 돌아다니곤 했다.
실제로 이 세상에 그런 힘이 있는데 성녀는 없을 거라고 무조건 잡아뗄 수는 없었다.
‘첼루나 공주님이 진짜로 성녀라면…….’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나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바보.’
데아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하는 순간 선명하게 깨달았다.
자기 안에 아직 자그마한 희망이 있었음을. 과분한 미래를 꿈꾸는 마음이 있었음을.
어쩌면, 두 달 전 데뷔 무도회에서 당신과 나눴던 시간이 너무 따스해서,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당신과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상상했었나 보다.
그러나 그분은 황녀였고 이제는 성녀이기까지 했다. 가망이 없었다.
종교적인 후광이 더해지며 한층 아득하게 높은 존재가 되었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골이 깊어졌다.
비록 어리고 소외된 소년이지만 데아론은 필연적으로 주워듣는 게 많았다.
블레논 황자와 텔레스 황녀, 텔로아 후작과 다른 많은 귀족이 얽힌 황실의 살벌한 싸움에 대해서는 그도 웬만큼 파악하고 있었다.
두 달 전 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냈을 때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기는 출신 때문에라도 공주와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공주가 블레논 황자의 동복이고 자기는 텔로아 후작의 아들이라는 점은 차라리 부차적 문제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부차적 문제조차 이제는 심해졌다. 블레논 황자의 동복동생이 성녀라니, 이는 텔레스 황녀에게 불리한 전세였다.
이제 아버지와 형님은 황녀 전하의 편에서 첼루나 공주님마저 적대하려나? 내 집안은 그분의 원수가 되는 거야? 데아론은 점점 심란해졌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심란하다는 점이 가장 심란했다. 제게 아직 헛된 희망이 남아 있었다는 뜻이므로.
완벽하게, 정말 완벽하게 체념했다면 심란해할 여지조차 없을 텐데.
‘어차피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어.’
무도회의 꿈같은 밤으로 마법은 이미 끝났다. 은연중에 무언가를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제는 그 바보 같음을 끝낼 때였다.
데아론은 사용인들이 다 흩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울한 마음으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멈칫한 그는 잠시 으리으리한 저택을 음침하게 쏘아보았다.
‘진짜 싫다.’
오늘따라 여러모로 내키지 않았다. 저택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싫었다.
이 집안과 연관된 모든 것이 자신을 진창으로 끌어내려 높은 곳에 계신 공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트리는 기분이었다.
객관적으로, 데아론은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오히려 후작이 아들로 인정해 줬기에 그는 멀리서나마 공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사생아고 반쪽이어도 어쨌든 그는 엄연한 귀족이었다. 전부 그 끔찍한 아버지의 핏줄 덕분에.
만약 그가 끝까지 평민으로 남았다면 공주와 스치는 것조차 기대하지 못했으리라.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기적이겠지.
그걸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아버지께 순진한 감사를 느끼기엔 지금 소년의 심정이 너무 엉망이었다.
데아론은 뚱한 얼굴로 마지못해 걸음을 디뎠다. 그는 쪽문을 통해 저택에 진입했다.
“데아론.”
그가 계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조용히 방으로 사라지려고 했던 데아론은 반갑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퍼뜩 굳었다.
“……형님. 다녀오셨습니까?”
데아론은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중얼 인사했다. 형과 별로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도 절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거니와, 안 그래도 성녀 얘기로 심란하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반쪽짜리 가족의 차가운 말투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