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14)

나머지 황족들이 하나씩 퇴장했다. 곧 방 안에는 대사제와 사제들, 그리고 갑자기 성녀가 된 공주만이 남았다. 공주는 곧장 대사제를 마주했다.

“워낙 중요한 일인 만큼 그냥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대사제님을 모함하려는 교회 내 무리가 저주에 손을 댄 것 같아요.”

“어떤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나요?”

대사제가 곧장 되물었다. 젊은 사제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첼루나는 진지하게 부연했다.

“그야, 대사제님은 결백하시니까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결백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순순히 조사를 결심하셨겠어요?”

깔끔한 논리였다. 첼루나는 말을 이었다.

“대사제님은 결백하시지만 누군가 저주를 사용했고, 저주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사제밖에 없죠. 타락한 사제요. 그리고 조사 결과가 누구를 가리키든 대사제님과 교회는 비난받을 테니 그걸 노린 누군가 대사제님을 끌어내리기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교회도 덩달아 비난받을 텐데 그걸 노린 타락한 사제가 있다고요?”

“자기가 교회의 죄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하며 겸손하게 참회하는 이미지로 나설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죠. 대사제님은 타락하고 보수적인 사제고 자신은 결백하고 혁신적인 사제라는 식으로 대립 구도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대사제의 눈에 점차 이채가 돌았다. 다른 사제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늘 공주는 거듭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의 눈앞에 폭탄을 터트렸다.

과거에는 단지 성격이 나빴고 최근에는 그저 얌전하기만 하던 공주가 지금은 말하는 족족 청산유수였다. 그것도 이 나라의 최고 성직자를 상대로.

“대사제님, 교회의 조사를 성심껏 돕겠습니다. 누가 저주로 마수를 만들어 냈는지 저도 꼭 밝히고 싶어요. 그 대가로 저 역시 대사제님과 나머지 사제님들의 도움을 구합니다.”

“말씀하세요, 공주님.”

“대사제님은 저보고 성녀라고 하셨죠. 저도 그 말을 믿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아까 어떻게 그런 힘을 냈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당사자인 저조차도 확신이 없는걸요.”

“공주님,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작 흉내나 조작으로 베낄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공주님은 성녀가 맞습니다.”

대사제는 돌연 단호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는 노회한 정치인이 아닌 오직 성직자로서 얘기했다.

한평생 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성력을 다루었던 그다. 공주가 보인 힘이 성녀의 것이라는 믿음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대사제님의 말이 옳습니다, 공주님.”

옆에서 젊은 사제가 나직이 거들었다. 나머지 사제도 열렬히 끄덕였다.

그들 역시 신학도, 또한 신앙인으로서 성녀의 힘을 알아봤다. 성력을 타고난 그들에겐 거의 본능 같은 일이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과연 사제님들처럼 믿음이 굳셀까요? 아까 황제 폐하와 황후 전하의 태도를 보셨잖아요. 분명 저를 의심하고 비방하는 무리가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건 신권에 대한 도전이지요.”

대사제의 눈빛이 선득해졌다.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 황제와 맞먹을 수 있는 노인은 오만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허리를 꼿꼿이 폈다.

첼루나는 부드럽게 간청했다.

“제 말뜻은 이거예요. 저는 성녀로서, 정말로 제가 성녀라면, 교회에 모든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저를 지켜 주셔야 해요.”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성녀를 모시는 것 역시 교회의 의무니까요.”

대사제의 눈빛에서 꼿꼿한 냉기가 가셨다. 그는 이제 다시 성직자에서 능구렁이 같은 정치가로 돌아왔다.

공주는 교회에 협조하고, 교회는 공주를 보호한다. 그건 원론적인 의무를 떠나 서로의 이득을 위한 정치적 거래였다.

공주는 이를 이해했고 대사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사제는 공주에 대한 재평가를 거듭했다.

‘성질 더러운 천덕꾸러기에, 이제는 천사처럼 예쁘고 순한 공주라며?’

어림없는 소리. 저 천사 같은 얼굴 뒤에 숨어 있는 건 새끼 늑대, 또는 새끼 뱀일 거다.

성체라고 보기엔 아직 설익었으나 지금도 이미 위험하고 영악한 존재였다.

저런 공주가 성녀라니 참 우습지 않은가. 하긴 나 같은 인간도 성력을 받고 태어나 최고 사제 자리에 앉아 있는데, 뭐.

교활한 늙은이는 씁쓸한 자조를 삼켰다.

“감사합니다.”

첼루나는 아름답게 웃었다. 딱 저 미소만 천사 같았다. 불타는 금색 눈은 세속의 그 어떤 집념보다 지독했다.

“반드시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대사제님.”

왜냐하면 이번 생에 당신은 더 빨리 블레논을 버릴 거거든. 그리고 전생처럼 모호한 중립으로 남지 않고 나와 함께 텔레스 언니를 섬길 거야.

그리고 첼루나 본인은, 원래 계획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텔레스를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

더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비밀스러운 첩자 노릇을 자처하지 않아도 된다. 성녀가 된 첼루나에겐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이는 데아론을 둘러싼 그녀의 괴로운 다짐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새로운 가능성에 그녀의 심장이 희열로 부풀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자 마음이 깊숙이 전율했다.

아아, 데아론.

불과 하루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텔로아 후작과 모리안 텔로아는 곧장 귀가하지 않았다.

황궁 밖에서 서성이던 그들은 황녀와 황후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남을 청했고, 곧 조용히 입궁했다.

후작과 후작의 아들이 접견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다른 귀빈들이 있었다.

후작은 크레온 공작 내외를 보자마자 깍듯이 예부터 갖췄다. 모리안은 그들을 사실상 무시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황녀를 향했다.

“전하.”

모리안이 속삭였다. 골똘히 침묵하던 텔레스는 모리안을 보자 고개만 가볍게 까딱였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모리안은 황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정말로 공주가 성녀입니까?”

인사를 마친 후작이 곧장 본론으로 진입했다. 그는 황후를 보며 물었고, 황후는 차가운 낯으로 끄덕였다.

“그렇다는군.”

후작의 안색도 싸하게 식었다. 모리안은 황녀의 손을 놓고 허리를 폈다. 좌중을 둘러보며 모리안은 진지하게 말했다.

“대응해야 합니다.”

“어떻게? 첼루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텔레스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모리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성녀라고 소문이 난 이상 물리적으로 손대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추문을 퍼트려 공주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건 가능합니다.”

그 비열한 제안에 이곳의 누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다들 더러운 뒷공작이 익숙한 정치판 난투의 베테랑이었다.

올해 스물한 살밖에 안 되는 풋풋한 황녀와 그녀보다 한 살 위인 모리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황녀의 경우, 태어난 순간부터 삶은 지저분한 전쟁터였다.

“내 생각은 조금 달라. 나는 우리가 그 애를 아군으로 포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텔레스는 선명하게 말했고 모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텔로아 부자가 반대의 말을 꺼내기도 전, 황후가 딸을 보며 곧장 반박했다.

“그거야말로 가장 위험해. 현실성도 가장 적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안전합니다. 교회가 그 애를 성녀로 판정한 이상 그 애를 죽이든 매도하든 모든 의심의 화살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성녀를 우리 편으로 돌리자? 그게 가능할 것 같니?”

황후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텔레스는 모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모녀의 대화에 숨죽여 집중했다.

“황녀, 공주는 황자와 동복이야.”

“그래서요? 언제 그자가 첼루나를 동복 취급했습니까? 동복은커녕 아예 피붙이 취급이나 했는지 의문인걸요.”

“최근에 둘은 친해졌어. 공주가 언젠가부터 황자에게 쭉 살갑게 굴어 왔다는 걸 알잖니.”

“황자한테만 그런 건 아니죠. 첼루나는 언제부턴가 궁의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친절하게 굴기 시작했어요. 제 생각엔 그게 그 애 나름의 생존 전략 같아요. 자기도 비빌 언덕을 찾는 거죠.”

텔레스의 분석은 소름 끼치게 예리하여, 만약 첼루나가 이곳에 있었다면 언니의 추론을 듣고 경악했을 것이다.

텔레스는 회귀에 대해 당연히 몰랐고 그런 소설 같은 일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탄탄한 가설을 구성했다.

언제부턴가 첼루나는 유해졌다. 그녀가 아랫사람들에게 패악을 부렸다거나 황자에게 불려 가 뺨을 맞았다는 등 과거의 험악한 추문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대부분은 태평하게 ‘우리 공주님이 드디어 철드셨군요!’ 하고 넘어갔지만 텔레스는 처음부터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얼마 전에 첼루나가 저를 찾아왔다고 한 거 기억하세요? 제 편에 서고 싶다고 대놓고 간청했죠.”

“그래, 그리고 나는 그 일을 블레논 황자가 시킨 거로 생각해. 너도 그 가능성에 동의했잖니.”

“네, 가능성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했어요.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이 있어요. 첼루나가 진심으로 자기 오빠를 증오하고, 황자를 섬기느니 저를 따르고 싶어 할 가능성이요.”

황녀는 황후와 단호하게 논박했다. 텔레스는 얼마 전 머리 장식을 핑계로 자신을 찾아왔던 이복동생을 떠올렸다. 그 투명한 절박함을.

“만약 정말로 그 애가 황자보다 제 편이 되길 원한다면 이건 절호의 기회예요. 성녀가 제게 충성을 맹세하는 거예요. 그럼 성녀의 힘을 믿는 신앙 깊은 귀족들과 평민들, 그리고 좋든 싫든 성녀를 부정할 수 없는 성직자들도 제 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도 공주는 여전히—”

“황자와 동복이니까 기본적으로 제 적이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피가 섞였다고 무조건 아군이 되나요? 저랑 블레논이 살아 있는 반례 같은데요.”

텔레스의 음성은 다소 싸늘해졌고, 황후는 일순 잠잠해졌다.

텔레스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외조부와 외조모, 그리고 텔로아 후작 부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선포했다.

“성녀를 죽이거나 추문으로 모함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포섭부터 시도하는 전략으로 가겠습니다. 포섭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 다른 방법으로 넘어가죠. 어쩌면 이런 고민 자체가 무용할지도 몰라요. 그 애가 싸움에 끼어들기를 거부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그래, 몹시 낮아 보였다. 몇 달 전에 이미 황녀를 찾아와 당신의 신하가 되게 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탄원하던 아이다.

만약 싸움이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단지 중립을 지키는 것만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뻔히 아는, 그런 영리한 아이다.

예전에는 그저 더러운 성질머리로 생떼나 부릴 줄 알고 최근에는 나긋하고 멍청한 역할에 몰두했지만 오늘 교회에서 얘기하는 걸 들으니, 그 애는 늑대 또는 뱀이었다.

적으로 두면 필시 위험할 거다. 그러니 그 애가 정녕 제 오빠를 편들고자 한다면 그때 가서 어떻게든 제거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에, 언니의 신하가 되고 싶다던 그때 그 아이의 말이 진심이었다면. 그리고 지금도 진심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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