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14)

“단지 성물을 몸에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아까 그 정도의 성력을 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주님, 그건 오롯이 공주님의 힘입니다. 잠재되어 있던 힘이 성물과의 접촉으로 강화된 거죠. 힘이 발현될 만한 계기도 뚜렷했고요.”

“계기요?”

“어린아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매우 용감하고 이타적인 행위였죠. 주님께서는 그런 고결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신답니다.”

첼루나는 떨떠름했다. 용감하고 이타적이라니, 살면서 그런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첼루나 공주님, 당신은 제국의 탄생 후로 처음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신 최초의 성녀로 기록되겠군요.”

노인의 중후한 음성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이제 그는 거의 사랑에 빠진 듯한 눈빛이었다.

정치적 탐욕, 종교적 열의. 대사제의 뜨거운 눈빛은 그 모든 걸 아울렀다.

“고작 한 번의 발현으로 저 아이가 진정 성녀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까?”

그때, 내내 조용하던 황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투는 칼날 같았고, 눈빛은 얼음 같았다.

첼루나는 거의 황제만큼이나 차갑게 저를 노려보는 계모와 용감하게 눈을 맞췄다.

황후의 눈빛에 사적인 증오는 없었다. 섬뜩한 분노가 가득할 뿐.

‘나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어.’

첼루나는 깨달았다. 첼루나는 황후의 저 눈빛이 익숙했다. 다만, 지난 생에나 이번 생에나 저 눈빛의 대상은 늘 그녀가 아닌 블레논이었다.

아무도 군주의 재목으로 인정하지 않는 막내 공주는 황후의 관심 밖이었다. 황비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경멸하긴 했지만 그건 그저 습관에 그쳤다.

황후가 늘 경계하고 적대하며 기어코 죽이려 했던 이는 블레논 황자뿐이었다. 황자야말로 자기 딸의 유일한 적수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공주가 끼어들었다. 본인 포함,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힘을 가진 공주가.

‘이렇게 되면…….’

충격과 혼란으로 한동안 느리게 움직이던 첼루나의 머리가 슬슬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입증이요? 주님의 일에 증거를 구하는 건 믿음 없는 자들만 하는 거지요. 그리고 굳이 증거가 필요하시다면, 정녕 아까 그 일로도 부족하십니까?”

이제 대사제는 황후를 응시하며 정중히 비꼬았다. 황후의 눈빛이 스산하게 반짝였다. 대사제와 황후의 사이가 나쁘다는 건 궁에서 허드렛일하는 하인조차 다 아는 얘기였다.

“부족할 리가요. 다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특히 신중하게 대하고자 물은 거랍니다. 그런데 대사제님, 지금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나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실까요, 황후 전하?”

황후가 매끄럽게 화제를 전환하자 대사제는 짐짓 온화하게 되물었다.

황제와 황자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바빴고 첼루나는 생각에 잠겨 조용했다.

그리고 텔레스 황녀는 계속해서 동생을 골똘히 응시했다.

“따로 조사할 게 있지 않습니까? 성력이 닿자마자 붕괴하는 괴물이라니, 그냥 마수가 아니라 저주가 연루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저주를 다루는 것도 결국 교회의 일일 터, 하루빨리 자초지종을 밝혀 주길 희망합니다.”

“물론입니다, 황후 전하, 그리고 황제 폐하. 누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신의 힘을 욕되게 했는지 반드시 밝히겠습니다.”

대사제의 안색이 처음으로 나빠졌다. 황후는 잔혹한 승리감으로 눈을 빛냈고 황제는 의도적으로 무표정했다.

첼루나는 그들 모두를 지켜보며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적어도 이번 일에 대사제는 결백해.’

전생에 라토르 공작과 결탁한 사제들은 반(反)대사제파였다. 현 대사제를 몰아내고 본인이 최고 지위에 오르고자 했던 누군가 공작의 회유에 넘어간 것이다.

‘여러모로 징그러운 놈이긴 하지만 저주에 손댈 사람은 아니지.’

대사제에 대한 첼루나의 평가였다. 신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성직자치곤 너무 교활한 작자였으나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자였다.

‘그래서 전생에도 결국 그렇게 된 거잖아.’

전생에 마수 습격의 원흉이 라토르 공작과 타락한 성직자들임이 뒤늦게 밝혀졌을 때, 대사제는 진심으로 통탄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굳건하던 황자를 향한 지지를 철회했다.

‘되게 타격이 컸었는데.’

첼루나는 회상을 이어 갔다.

대사제의 지지 철회, 라토르 공작과 블레논 황자의 불화, 적의 내부 분열을 매섭게 파고든 텔레스 황녀의 맹공. 황자 측에게는 불행한 때였다.

결국 그 불행은 패배로 끝나 첼루나도 지하 감옥에 갇혀야 했다.

‘……이번에는 더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아.’

대사제의 지지 철회를. 그리고 황자의 몰락을. 그러면 황녀는 피를 덜 흘리고 승리를 거머쥘 테고 데아론도 훨씬 안전하겠지.

그리고 어쩌면, 나는.

나는, 데아론과.

“대사제님, 제가 감히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첼루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아까 황제에게 대들었을 때와는 다르게 까칠함을 감추며 유순하고 우아한 가면을 장착했다.

“말씀하십시오, 공주님.”

대사제의 눈빛이 다시 사르르 녹았다. 그는 흡사 귀여운 손녀딸, 또는 위대한 구원자를 보는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첼루나는 공손히 말을 이었다.

“아직 제가 미흡하여 부끄럽긴 하지만, 이번 일을 조사하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조사를 돕게 해 주세요. 만약,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끝에 첼루나는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태도는 가냘프고 겸허했지만 아무도 속지 않았다.

공주가 덧붙인 조건부는 명백한 시험이요, 도발이었다.

여기서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건 교회의 일을 방해하는 게 된다.

그냥 공주였다면 아비가 딸을 훈계하는 게 별다른 문제가 아닐지 모르나 첼루나는 이제 성녀였다. 행동으로 증거를 보이고 방금 대사제 본인에게 인정받은 성녀.

모두에게 갑작스러운 전개였고 첼루나는 여전히 혼란이 남았지만,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뭐라도 해 보자. 그게 회귀 이후 그녀의 신조였으므로.

‘대사제를 내 편으로 만들 거야.’

황권과 교권은 예로부터 서로 은근하게 견제하며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슬쩍 끼어들어 황제에게 대항해 교회를 편드는 척한다면.

‘이번 생에 당신은 내 도구야.’

대사제를 향해 첼루나는 생각했다. 나의 도구, 즉 황녀 전하의 편이 되리라. 전생처럼 막판까지 블레논을 지지하지 않고.

“무엇을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황제는 첼루나를 보며 물었다. 첼루나는 얌전히 반문했다.

“애초에 마수들이 저주로 빚어졌다는 것도 저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대사제님께서 방향을 잡아 주신다면, 어떤 식으로든 분별을 돕겠습니다. 성력과 저주의 분별을요.”

“어떤 사제의 성력이 타락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는 거냐?”

“시험해 보지 않았으니 아직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잖습니까? 제가 대사제님과 함께 다른 사제들을 돌아보게 허락해 주세요. 그럼 뭔가 사특한 기운을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어쩌면, 제 존재 자체가 진실을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다들 저를 성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타락한 사제가 저를 마주하면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자백할지도 모르죠. 어차피 들킬 거로 생각해서 겁먹을 수도 있고요.”

첼루나는 여전히 얌전하게, 우아하게, 동시에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다른 의미로 첼루나를 쳐다봤다.

공주가, 황족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던 막내 공주가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나? 저토록 정연하게, 도렷한 눈빛으로.

첼루나의 말투, 눈빛, 모든 게 달라졌다. 그녀 스스로 내린 선택이었다.

지금 그녀는 회귀 전처럼 마냥 까칠하며 쌀쌀맞지 않았고, 그렇다고 지난 4년간 그래 왔듯 유순한 백치미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잠시 굳었던 머리를 다시 빠르게 돌린 결과, 첼루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더는 사랑스럽고 순진한 백치 공주로 이미지를 굳혀선 안 된다. 그럴 필요도 없어졌고.

왜냐하면, 이제는 내게 권력이 생겼거든.

“허락해 주십시오, 폐하, 대사제님. 어떻게 이런 시국에 그저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겠습니까. 제게도 부디 제 몫을 다할 기회를 주세요.”

첼루나는 저를 향한 대사제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성녀라는 이름에는 정녕 상당한 정치적 힘이 있음을.

성녀는 전설의, 아니, 신화의 존재였다.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움직일 만한 상징적인 영웅이었다.

특히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면 성녀의 존재에 더더욱 매혹될 거다.

대사제가 공주를 탐내는 이유는 뻔했다. 성녀의 이름을 손에 넣으면 그가 좌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므로.

첼루나는 기꺼이 이용당해 줄 생각이었다. 만약 자기도 그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오, 공주님. 그건 제가 허락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도와주시겠다면 그저 감사히 받을 따름입니다.”

대사제가 푸근하게 웃었다. 황제의 눈빛이 일순 험악해졌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졌다.

“나도 허락한다, 공주.”

황제는 마지못해 말했다. 첼루나는 예바르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싸늘했다.

‘그래, 폐하 당신은 이 전개가 참 싫겠지.’

가장 미워하는 자식이 갑자기 조명을 받는다니, 얼마나 짜증 날까.

평생 아들에게만 빛을 몰아 주려 했는데, 여태까지 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볼품없는 막내가 대뜸 무대 한복판에 뛰어들었으니.

게다가 현재 교회는 블레논 편이었다. 마수 습격의 배후를 조사하겠다는 건 타락한 성직자를 잡아내겠다는 뜻이었고, 이는 곧 교회의 허물을 들추겠다는 뜻이었다.

조사 끝에 어떤 성직자가 저주를 부렸는지 밝혀지고, 교회는 욕을 먹고, 교회가 지지하는 황자의 체면도 깎인다. 그게 아마 지금 황제의 가장 큰 불안일 것이다.

‘평소에 나한테도 잘하지 그랬어?’

첼루나는 속으로 싸늘하게 비웃었다.

왜 내가 당신을 공격하고 싶게 만들었어.

당신과 당신의 그 잘난 아들을, 가루처럼 곱게 부숴 진창에 처박고 싶어.

“다만, 황실의 일원까지 조사에 참여하는 만큼 확실한 성과가 있어야 할 거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막내딸을 보며 경고했고 첼루나는 나긋하게 대답했다. 황제가 뚝뚝하게 지시했다.

“이제 다들 환궁한다. 대사제, 앞으로 구체적인 진행에 대해서는 그대에게 사람을 보내 다시 얘기하겠소.”

“황송하지만 폐하, 사제님들과 잠깐 얘기를 나누고 돌아가도 될까요?”

첼루나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다시 놀란 눈으로 첼루나를 보았다.

첼루나도 본인의 무모함이 놀라웠지만 지금은 소심하게 굴 때가 아니었다.

“너 혼자?”

“허락하신다면.”

황제의 눈빛은 서늘했다. 첼루나는 고개를 겸손히 숙인 채 숨을 참으며 기다렸다. 황제가 마침내 말했다.

“허락하지.”

황후의 미간이 일순 노골적으로 꿈틀댔고 블레논의 표정에도 미묘한 빛이 스쳤다. 텔레스는 여전히 동생을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첼루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쥐고 예를 갖췄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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