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4)

데아론은 저택에 오기 전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열다섯 살 때까지 평민이었던 소년치곤 대단한 재주였다. 그의 모친이 그를 가르쳤다.

후작은 여러모로 차남에게 박한 아비였지만 데아론이 저택에서 자유롭게 독서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빈약한 부성애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독서는 굳이 남들 앞에서 하지 않아도 되니, 책을 들고 어디 안 보이는 곳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으라는 무언의 권고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데아론은 저택의 서고를 기쁘게 애용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 밖을 하염없이 싸돌아다닐 때가 아니면 그는 아늑한 침실에 숨어 독서에 몰두했다.

오늘도 그는 책을 골라 침실에 자리 잡았다. 사람이 걸터앉을 만큼 널찍한 창턱에 안착한 소년은 활자에 몰입함으로써 공주를 잊고자 했다.

“윽?!”

문득,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데아론은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 아래로 후끈한 금속이 닿았다.

‘뭐지?’

데아론은 이 금속이 뭔지 잘 알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1년 넘게 목에 걸고 다닌 물건이니 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알아서 달궈지는 금목걸이는 살면서 듣도 보도 못했다. 세상에 그런 쇠붙이가 어디 있어?

“무슨…….”

깊어지는 당황 속에 그는 빠르게 중얼대며 목에서 목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책을 내려놓은 뒤 목걸이를 유심히 살폈다.

목걸이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러나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마법 목걸이라도 되나.’

데아론은 나름대로 논리적인 추측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과거 직종을 떠올리고 그 가설을 폐기했다.

어머니는 원래 사제였다. 한때나마 교회에 속했던 그분이 마법사의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럼 혹시 성물……?’

마법이 아니면 성력인데, 데아론은 곧이어 그 가설도 폐기했다.

‘설마.’

성물은 굉장히 귀하다. 사실 그건 마법 용품도 마찬가지라서 데아론은 한낱 평민 모친의 유품이 마법이든 성력이든 어떤 초월적인 힘과 관련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목걸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갑자기 무섭게 왜 이래? 혼자 뜬금없이 달아오르질 않나, 이제 보니 조금 웅웅대는 것 같기도 했다.

“엇.”

정체 모를 울림이 돌연 멈췄다. 금 사슬도 확 식었다. 평소 온도대로 돌아온 목걸이를 데아론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목걸이는 참 유용한 물건이야.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어.>

돌이켜 보면, 이 목걸이에 대해 그의 엄마는 여러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가끔 워낙 영문 모를 소리를 하시던 분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시큰둥하게 흘려들었던 말들.

<너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네 운명에는 사랑이 있단다, 데아론. 너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을 거야.>

<나중에 혹시 헤어지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렴. 네가 네 마음에 솔직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다시 만날 테니. 너를 나만큼이나 귀하게 여겨 줄 사람이 말이야.>

<너는 참 소중한 아이야, 데아론.>

독특한 분이셨다. 나쁘게 보면 이상하고.

하지만 데아론에게 그분은 하나뿐인 엄마였기에, 또한 그분께 받은 사랑이 워낙 컸기에 그녀의 각종 해괴한 궤변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종종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것 외에도 소위 흔한 광인처럼 돌아다녔다면 문제가 됐을 텐데, 그녀는 평소에는 몹시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이웃들과도 잘 어울렸고 아들의 친구들에게도 친절했다. 기실 그녀의 특이한 면을 아는 사람은 아들 데아론뿐이었다.

<너를 참 많이 사랑해, 데아론.>

그 말 한마디가 다른 모든 헛소리를 지워 냈다. 그리고 가끔, 그분은 말씀하셨다.

<이 힘은 원래 내 게 아니야.>

잠시 맡아 주고 있는 것뿐이야. 정말 필요한 때에 힘이 원주인에게 돌아가도록. 너무 빨리 넘기면 그 끝은 비극이거든. 이리저리 이용당하다 죽기만 할 거야.

데아론은 전부 흘려들은 언어였다. 무슨 뜻이냐고 되물어 봤자 엄마가 답해 주지 않았고, 15년 평생 그런 말을 듣고 살다 보면 어느새 적응하는 법이다.

나중에,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들에게 몇 안 되는 소박한 물건만 남긴 채 떠난 뒤에야 아들은 후회했다.

아, 조금만 더 물어볼걸. 조금만 더 궁금해할걸.

더는 아무것도 답해 줄 수 없는 사람에 대해 궁금한 점만 산더미처럼 남았다는 건 참 슬픈 일이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나.’

데아론은 고민했다. 그저 평범하던 목걸이가 돌연 뜨겁게 진동한 괴이쩍은 사건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형님? 나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게 평생 소원인 것처럼 구는 후작 부인?

데아론은 결국 여느 때처럼 단념했고, 수수께끼 같은 목걸이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영영 함구하기로 했다.

소년이 그런 것들을 결심할 때쯤, 후작 저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의 어느 곳에선 어떤 반지가 그의 목걸이처럼 뜨겁게 울렸다.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는 적었다.

전투 마법사들이 워낙 신속하게 나서 준 덕분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첼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공주의 몸으로 헌신하신 성녀께서 성력으로 저주받은 괴물들을 물리치셨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첼루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황제가 이럴 때만 자신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사실에 속으로 화낼 여력도 없었다.

“다만, 이것 때문에 그런 효과가 나타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첼루나는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을 내놓았다. 자기가 정말로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든가,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성녀라니. 성녀라니?

전생에 이런 건 없었다. 전생뿐만 아니라 지난 수 세기를 통틀어도 성녀는 전설 속 존재에 불과했다.

성물을 마수와 닿게 하여 성력을 발동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반사적으로 여자아이를 끌어안았을 때는, 그런 계산적인 생각 따위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성녀라니. 현장에 있던 귀족, 마법사, 신분이 미천한 사용인까지 전부 입을 모아 시끄럽게 떠들었다.

성녀. 성녀. 성녀가 나타났다. 황실의 막내 공주가 알고 보니 성녀였어.

나중에는 분명 다르게 수군대는 사람들도 나올 것이다.

사기라고, 조작이라고, 황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가짜 성녀를 내세운 건 아니냐고 음모론을 세우는 이들도 있겠지.

그러나 오늘 당장 눈앞에서 정결한 빛이 괴물들을 찢어발기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그 진위를 의심할 수 없었다.

“성물인가?”

첼루나가 내민 금반지를 보고 황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첼루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네게 감히 성물을 지녀도 좋다고 허락했지?”

“제, 제가 공주님께 반지를 드렸습니다! 공주님께서 요즘 악몽을 꾸신다 하여—”

황제의 차가운 호통에 이어 옆에 움츠리고 있던 사제가 왈칵 말을 뱉었다.

지금 황제와 그의 일가는 황성 대교회에 모여 있었고, 교회의 수장인 대사제와 다른 사제 두엇이 동반한 상태였다.

“그리고 누가, 그대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소?”

황제의 흉포한 시선이 이제는 젊은 사제를 향했다.

사제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사제가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황제라도 성직자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황제의 지금 태도는 자칫하면 교권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이에 분노를 느낀 건 대사제만이 아니었다. 그전까지는 멍하니 있기만 하던 첼루나도 갑자기 울컥했다.

황제가 싫었다. 정말, 정말 싫었다.

원래도 계속 싫기는 했지만, 새삼스레 문득 활활 타는 증오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이 상황이 가장 혼란스럽고 황당한 건 아마도 첼루나 본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당신이 뭐라고, 당신이 대체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내가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추궁해?

그리고 당신이 뭔데 저 사제님한테 화를 내? 저 착하고 용감한 분을.

당신이 친딸인 나를 외면하고 핍박할 동안, 저 사제님은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내게 친절했어.

“폐하,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누가 저 사제님께 그 권한을 주셨느냐고요? 사제의 권한이 누구에게서 나오겠어요? 당연히 신께서 내리신 권한 아닙니까.”

첼루나는 황제를 똑바로 보며 딱딱거렸다. 그건 어쩌면 광기 어린 충동이었다. 지난 생의 몫까지 합쳐 쌓이고 쌓였던 원망이, 분노가, 설움이, 드디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대교회의 방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사제, 대사제, 황자, 황녀, 황후, 황제 모두 겁대가리와 버르장머리를 두루 상실한 듯한 공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평생 숨죽여 살던 공주였다. 살면서 권력이라곤 없던 공주였다.

전생에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살다가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말을 맞이했다.

이번 생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4년 전부터 뒤늦게 철든 건지 성격이 확 바뀌어 평판이 좋아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첼루나는 여전히 나라에서 가장 힘없는 황족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막내를 싫어했다. 공주도 여태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무서워했다.

지금은 무서움보다 미움이 더 컸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이성의 끈이 끊긴다던가.

성녀니 뭐니, 자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는데 뻔뻔스러운 아비 때문에 더는 순한 척도 불가능했다.

“사제님의 말씀에는 틀린 게 없습니다. 제가 요즘 악몽이 잦아서 사제님께 기도 받고 성물을 빌려 갔어요. 그게 그렇게 큰 잘못입니까?”

막내딸은 처음으로 아빠에게 대들었다. 그리고 아빠는, 막내딸을 살면서 처음 보는 사람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요, 공주님. 시련을 이기기 위해 사제의 기도를 구했다니,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이때, 도움의 손길은 뜻밖의 출처에서 왔다. 공주를 놀란 눈으로 직시하던 대사제가 문득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보탰다.

첼루나는 저 자애로운 미소를 믿지 않았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 그녀가 파악한 대사제는 가히 천 년쯤 묵은 교활한 능구렁이였다. 무엇보다, 그는 전생에 블레논을 지지했다.

그러나 지금 첼루나를 향한 대사제의 눈은 더없이 친절했다. 아니, 단순히 친절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노인의 예리한 눈빛에는 경외가, 또한 탐욕이 있었다.

그제야 첼루나는 제가 얻은 성녀라는 이름이 정치적으로 어떤 거대한 함의를 지녔는지,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함의가 자신의 계획에, 또한 앞으로 데아론과 자신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부를 수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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