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첼루나가 아닌 데아론이 회귀해서 지금 여기 있었다면 그나마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그는 전생에 서부로 마수 토벌도 나가 봤으니까.
그러나 징그럽고 거대한 괴물들이 떼로 달려드는 장면에 면역력이 없는 첼루나는 도망치지도 다가가지도 못하고 꽝꽝 얼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기 역할을 떠올렸다.
‘데아론……!’
이번에도 그녀의 의지를 다잡아 준 존재는 그 아이였다. 첼루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저것들이 사람을 해치고 건물을 부수게 둔다면 그 비난은 당분간 고스란히 황녀와 황후 측에 돌아갈 것이다.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끝내 진실은 밝혀지겠지만 그사이 텔레스는 큰 피해를 볼 것이며, 동료들의 죄를 폭로한 양심적인 사제들은 훗날 보복당하리라.
그런 일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었다. 전생에는 몰랐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현재는 무지를 구실 삼을 수도 없었다.
첼루나는 자신이 타인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음을 기억했다.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걸이의 신비한 힘이 그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줬음을 기억했다.
제게 과분한 기적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첼루나는 뛰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마수들을 향해.
“공주님!”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이런, 젠장. 첼루나는 속으로 욕했다. 그녀는 자신의 충실한 호위병을 과소평가했다.
기사는 허겁지겁 첼루나를 낚아챘고, 그녀는 그대로 붙들렸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충직한 호위가 긴박하게 소리쳤다. 첼루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주인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던 공주궁 사람들이 그새 너무 잘 커서 문제였다.
“공주님, 어서, 윽?!”
‘정말 미안해!’
첼루나는 속으로만 사죄했다. 겉으로 그녀는 호위병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아무리 잘 훈련받은 기사라도 그 정도 공격을 당했으면 짧게나마 자세가 흐트러지는 법이다
호위는 순간 공주를 놓쳤고, 공주는 그 틈에 단상에서 다람쥐처럼 뛰어내렸다.
“꺄아악, 피해, 피해!”
“전원, 마법 준비!”
정신없이 대피하는 사람들의 비명 사이로 좀 더 명확한 목소리가 외쳤다. 전투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그새 촘촘한 대열을 갖추고 괴물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 돼……!’
첼루나는 헐떡였다. 이대로 마법사들이 마수들을 해치우면, 전부 죽여 버리면, 증거가 남지 않는다.
사체에 성력을 부어 봤자 소용없었다. 죽은 몸뚱이는 그냥 몸뚱이였고, 애초에 그것을 조종한 저주의 흔적은 전부 날아갈 테니.
“마법 발사!”
냉철한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어, 땅이 흔들렸다. 첼루나는 균형을 잃었다.
“윽!”
운동 신경이 썩 훌륭하지 않은 공주는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
불꽃, 물보라, 번쩍이는 빛까지, 첼루나가 여태 책에서 읽고 상상만 해 본 온갖 종류의 마법이 마수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제는 인간의 비명에 마수의 괴성도 섞였다.
“키에에에에엑!”
쇳덩이에 손톱을 세워 긁는 듯한 소리, 아니, 그 소리의 수백 배는 더 끔찍했다. 첼루나는 하얗게 질려 참상을 올려다보았다.
‘데안이 전생에 저런 것들과 싸웠다고?’
뜬금없이, 또는 별로 뜬금없지 않게 데아론이 떠올랐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이번에야 처음으로 첼루나는 마수의 실물을 확인했다.
병든 황소, 뒤틀린 곰, 또는 그 모든 것. 동물의 사체를 그러모아 반죽하여 엮어 놓은 것처럼 생긴 형체였다. 게다가 크기는 웬만한 코뿔소에 견줄 만했다.
‘빌어먹을, 이번 생에는 내가 걔를 보내나 봐라.’
전혀 황족답지 않은 비속어가 머릿속에서 연달아 터졌다.
이번 생에는 어떻게든 데아론이 서부로 떠나는 걸 막으리라. 전생에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제대로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바보, 바보 데아론. 왜 좀 더 징징대지 않았을까. 왜 좀 더 힘든 티를 내지 않았을까.
서부에서 목숨 걸고 마수 떼와 거듭 맞섰던 그 순간이 고됐다고, 두려웠다고, 쓸쓸했다고, 왜 내게 좀 더 자세히 털어놓지 않았을까.
과거에 자신이 연인의 충분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 것 같아 뒤늦게 목이 메었다.
항상 나를 위해 희생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픈 부위를 감추려 했던 미련한 내 연인.
후회, 미안함, 그리움이 겹쳐 첼루나는 일순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자기가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했다.
“꺄아악, 조심해!”
바보 첼루나. 바보 데아론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마수들이 깽판을 치는 마당에 대체 과거 연인을 회상하며 멍하니 있으면 어쩌자는 건지.
다행히도 그녀에게 달려드는 마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다행이 아니었다. 끔찍한 불행이요, 터지기 직전의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마법사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어느 마수 하나가 첼루나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어느 꼬마 여자애를 덮치기 전이었으니까.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표적이었다. 이기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은 깊이 안도했다.
아, 다행이다. 내가 아니야. 나는 다치지 않을 거야. 나는 멀쩡해.
그 본능을 무시하며 첼루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운동 신경이 좀 부족하긴 해도, 뛰는 속도가 느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첼루나는 여자애를 품에 쓸어 담으며 저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이때, 빛이 폭발했다.
* * *
데아론, 네 어머니는 원래 사제였지?
응, 맞아.
그런데 왜 교회를 나오신 거래?
글쎄,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여쭤본 적이 없어서.
훗날 돌이켜 보니, 아마 여쭤보는 게 나을 뻔했다.
* * *
빛이, 정말 밝고 따뜻하고 무시무시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빛이 첼루나의 몸에서 폭발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몸이 아니었다. 빛의 근원은 명백했다.
평범한 가죽끈에 매달린 아기자기한 금반지는 차마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하지 못할, 또한 인간의 눈으로는 제대로 다 보지도 못할 압도적인 광채를 내뿜었다.
다만 그 빛이 첼루나의 눈, 코, 손가락, 머리카락마저 일순 새하얗게 물들였다는 점에서 마치 그녀의 몸 자체가 광명처럼 보였다.
인간들이 고함쳤다. 그러나 방금까지 내지르던, 마수를 향한 공포로 가득한 절규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허공에 울리는 인간들의 비명은 전혀 새로운 두려움을 담았다.
“이게, 이게 무슨……?”
“오오, 세상에……!”
행사장 전역에 새롭게 퍼진 두려움은 경외에 가까웠다.
시각을 압도하는 강렬하고 정순한 광명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바닥에 엎어졌다.
마수들이 내뿜는 비명은 한층 처절했다. 빛이 닿는 부위마다 종이가 찢어지듯 살이 허물어졌고, 살가죽 타는 냄새가 일순 매캐하게 번졌다가 곧 휩쓸리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특징을 단숨에 알아본 누군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이, 이건 저, 저, 저주입니다!”
순식간에 뭉그러진 마수들의 사체를 누군가 다급히 손가락질했다. 저주라는 단어는 들불처럼 공기에 번졌다.
“저주라고?”
“세상에, 그런 끔찍한……!”
“그럼 서, 설마 교회에서……?”
“쉬이, 말조심해.”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 갑작스러운 사태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마수들 때문에 다친 자들의 친구 및 가족과, 여기에서 아마 가장 혹독하게 훈련받은 인력인 황실의 호위대였다.
정작 황족 본인들은 석상처럼 굳어 제대로 숨 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단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쳐다봄의 대상이 된 한 사람은, 자신이 아슬아슬하게 구한 어린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본인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천사님…….”
아이는 경이를 담아 속삭였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에는 자신을 구해 준 초월적인 은인을 향한 해맑은 동경이 가득했다.
첼루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만약 이게 남의 얘기였다면 때와 장소를 잊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천사라고? 용어부터 틀렸다.
“성녀가 공주였다니…….”
“지, 진짜야? 공주님이 정말로?”
“성녀님이 우리를 구하셨다!”
성녀. 성녀라. 전설의 존재. 이제는 신화로만 남은 과거의 영웅. 드디어 현세에 다시 강림하셨도다. 곳곳에서 탄성과 탄식이 터졌다.
첼루나는 파도처럼 쏟아지는 헛소리에 대고 귀를 콱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사고가 아직도 오작동 중이라, 손을 들어 귀를 막는 동작조차 불가능했다.
‘이런, 미친.’
전생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게 뭐야.’
성녀라고? 그런 건 성서의 오래된 얘기에서나 들어 봤다.
‘미친, 미친, 미친…….’
역사책에서나 나온 존재였다. 자기는 절대 성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뭐야?
‘미친?!’
성녀. 저주. 성력으로 저주를 물리친 성녀. 성력. 성물?
첼루나는 서둘러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이 목에 걸고 있던 반지를 꺼냈다. 금속은 뜨거웠다. 방금 불에라도 담근 것처럼.
첼루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사방의 무리는 긴긴 세월 끝에 드디어 재림한 성녀의 존재를 높이며 부르짖었다.
나머지 황족들은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행사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어도 사망자는 없이 끝났다.
데아론은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 그리고 후작 부인은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자리를 비운 때였다. 사생아 차남은 당연히 초대받지 못했다.
‘다행이지, 뭐.’
데아론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몇 달 전 무도회만으로도 충분히 고역이었거늘, 또다시 귀족들의 행사에 끌려다니며 은근한 멸시의 눈빛을 견디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차라리 소외당하는 게 편했다. 서럽기는 했지만.
‘……공주님도 거기 계시겠지.’
첼루나 공주님. 오늘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것에 대한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데아론의 심장이 지끈 아팠다.
만약 그가 당당하게 귀족들의 행사장을 오갈 수 있는 위치였다면 이따금 멀리서나마 공주님을 뵐 수 있었으리라.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비천한 소년은 봄밤의 추억 한 조각만 붙들고 근근이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그리움을 달리 달랠 길이 없었다.
‘보고 싶어.’
그는 솔직하게 슬퍼하다가, 두려워 생각을 그쳤다.
닿을 수도, 가질 수도 없다면 마음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도려내는 게 상책이다. 소년은 괜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책이나 읽자.’
그는 서글픈 첫사랑의 고통을 떨쳐 내기 위해 눈앞의 책에 집중하기로 했다. 후작의 서재에서 빌려 온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