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사랑하는 데아론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너를 지키리라. 이번에도 꼭 너의 주군이 승리하도록 할게.
‘보고 싶어.’
첼루나는 슬프게 생각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두 달 전의 데뷔 무도회였다. 그 후, 첼루나는 데아론에게 약속한 대로 그에게 연락 한 번 없었다.
‘……곧 멀리서나마 볼 수 있겠지.’
첼루나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전생 기준, 데아론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뒤에 황녀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이었다.
전생에 황녀는 마수 습격 때 다친 기사들을 대체한다는 명목으로 데아론을 비롯한 여러 신입 기사로 임명했다.
사실, 데아론이 첼루나에게 나중에 말해 주기를, 그건 그저 적절한 핑계에 불과했다.
원래부터 황녀는 제 시동생이 될 데아론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생에도 엄청난 변수가 없는 이상, 아마도 다음 달쯤에 데아론은 입궁할 것이다.
그러면 멀리서나마, 그저 스쳐 지나듯,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겠지.
이번 생에는 그에게 저를 사랑해 달라고 애원할 수 없는 처지가 심히 아팠다.
“공주님, 다 되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실연의 고통을 조용히 갈무리하며 첼루나는 당장 주어진 일에 집중했다. 옷도 다 갈아입었고 화장도 마쳤으니 이제는 전장에 나아갈 때였다.
첼루나는 시녀들과 함께 방을 떠났다.
마탑은 수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 자리했다. 한쪽에 울창한 숲이 자라고 맞은편에는 강이 흐르는, 정녕 동화에 속한 듯한 위치였다.
그런 그림 같은 풍경이 보기에는 아름다워도 일상적으로 오가기에는 꽤 불편하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잦은 방문자들을 위해 길을 닦아 놓기는 했지만, 편리한 도시를 벗어나 마차를 타고 교외까지 이동하는 건 그리 편리한 여정이 아니었다.
어디 외딴곳에 틀어박혀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기 좋아하는 흔한 마법사의 적성에는 완벽하게 들어맞는 장소였다.
지난 생에도, 회귀 후에도 황궁 밖을 나가 본 적이 손에 꼽는 첼루나에게는 그저 마탑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우욱, 멀미…….’
과거에 첼루나는 승마는 익숙했어도 마차를 타고 장시간 이동한 적은 없었다. 천덕꾸러기 공주는 행사에 초대받지도, 별궁에 놀러 가지도 않았으므로.
두 삶을 통틀어 난생처음 마차를 타고 30분 이상 이동한 첼루나는 살짝 해쓱한 안색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슷한 표정의 어린 귀족들이 더러 보였다.
‘많이도 왔네.’
첼루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생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수 습격에 관한 얘기만 풍문으로 접했을 뿐, 행사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었다.
예컨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마저 행사에 초대받았다는 점.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사교 모임이 아니니 마탑을 후원하는 귀족들이 자기 어린 자식들을 동반해도 관습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생에 다친 이들 중에 저렇게 어린 사람도 있었을까. 어쩌면, 저 아이 중 하나가 죽었을까.
전투 마법사들이 신속하게 대응한 덕에 사상자 수는 비교적 적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딱 한 명이 죽어도 그 또한 죽음이다. 하나만 죽고 백이 살았으니 괜찮다고 할 수는 없었다. 생명은 그런 건조한 수학으로 계산될 수 없었다.
‘라토르 공작, 이 개새끼.’
첼루나는 치맛자락을 잠시 움켜쥐었다. 자신이 전생에 오라비와 아비만큼이나 미워했던 외조부의 얼굴이 뇌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공주님, 모시겠습니다.”
공주와 동행한 호위병이 조심스레 고했다.
그는 어째서 방금 마차에서 내리신 공주님이 이동할 생각은 없이 짧게 멈춰 계신 건지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첼루나는 금세 안면의 경직을 지우고 빙그레 웃었다. 젊고 순진한 호위병은 공주님의 해사한 미소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래, 이제 가자.”
첼루나는 정녕 배우답게 웃으며 행사장 안으로 걸음을 디뎠다. 호위병과 시녀가 뒤따랐다.
황족들의 자리는 행사장이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단상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막내 공주는 맨 끄트머리에 착석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단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쪽에서 나타날 거야.’
전생에 이 자리에 없었던 첼루나는 마수들의 기습이 정확히 어떤 양상을 갖출지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현장에서의 기억은 없지만 상상력과 논리를 활용하는 건 가능했다.
‘블레논이 다치면 안 되니까.’
전생에 라토르 공작은 손자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일을 벌였다. 첼루나는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듣고 조부에게 섬뜩하게 화내던 블레논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미리 콱 죽어 버…… 리면 안 되겠구나. 그럼 블레논만 위험해지는 건 아니니까.’
이런, 젠장. 첼루나는 진정 아쉬워했다.
블레논이 마수의 공격에 휩쓸려 전생보다 6년 더 일찍 죽으면 여러모로 상황이 편할 텐데, 일을 꾸민 라토르 공작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았을 리 없다.
첼루나는 이에 차라리 감사하기로 했다. 오늘 블레논이 죽을 정도로 마수들이 가까이 온다는 건, 같이 단상에 앉아 있는 텔레스 황녀와 본인까지 위험해진다는 뜻이니까.
‘그나마 데안은 여기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첼루나는 깊이 안도했다.
전생에도 그랬듯이 데아론은 이곳에 없었다. 만약 그가 한 달만 더 일찍 기사가 됐다면, 여기서 황녀의 기사로서 호위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호위…….’
기사. 호위. 연상되는 단어가 문득 불편한 기억을 건드려, 첼루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문득 블레논 쪽을 돌아보았다.
황자는 황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훤칠하고 준수한 갈색 머리 기사가 황자의 바로 뒤에 있었다.
‘……앰벌리 라크문.’
오늘 저자가 호위하는구나. 입천장이 바싹 말랐다. 그녀는 자신을 애써 달랬다.
‘저 사람은 오늘 안 다쳐. 다쳤으면 내가 기억했을 거야.’
앰벌리 정도로 황자와 가까운 인물이라면 첼루나도 그의 부상 여부쯤은 쉽게 주워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그가 마수 때문에 다쳤다는 기억은 없었다.
첼루나는 안도했다. 그러다 자신이 안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언짢아졌다.
고작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저 남자 때문에, 자신이 지금 이토록 불안해한다는 게.
첼루나는 금세 그 언짢음도 가라앉혔다. 자기가 저 남자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절대 모두에게 상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은혜는 아는 사람이니까.
‘저자는 전생에 나한테 예의를 갖췄으니까.’
과거에 앰벌리 라크문은 그나마 나한테 친절했으니까. 적어도 잔인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녀가 어린 하녀와 상냥한 정원사와 다정한 사제를 기억하듯 앰벌리도 기억해서, 자꾸 신경 쓰이는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절대, 저자가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에 속이 울렁거리는 게 아니다. 절대.
첼루나는 황자 쪽에서 시선을 뜯어냈다. 그녀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서 바로 다음 순간 앰벌리가 살짝 고개를 틀어 자기 쪽을 흘깃했을 때, 그 사실을 몰랐다.
첼루나는 행사의 시작을 기다렸다.
텔레스는 제 옆쪽에 앉은 황후의 긴장을 느꼈다.
자신의 외가가 마탑 신축에 투자한 돈과 인력을 생각했을 때 그럴 만도 하다고 텔레스는 생각했다.
‘행사가 잘 끝나야 어머니 체면이 서지.’
그리고 덩달아 내 체면도. 텔레스는 속으로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이윽고 모든 게 돌연 따분하게 느껴져 눈을 감고 싶었다.
지긋지긋했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던 경쟁, 경계, 두려움.
이미 제 아비에게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자기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싸움은 예정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태어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와, 그리고 지금 단상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저 아이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시작합니다.”
뒤에서 수행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텔레스는 표정을 다잡으며 등허리를 조금 더 꼿꼿이 세웠다. 이어, 정면을 보며 우아하게 웃어 주었다. 정녕 배우답게.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짧게 울렸고, 참석한 귀족들과 마법사들은 저들끼리의 수다를 멈추고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텔레스도 나머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황제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시간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서서 말씀하시는데 감히 앉아 있을 자는 없었다.
황제에 이어 마탑주가 일어나 고상한 인사말을 건넸고, 이후 사람들은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다른 마법사가 나와 새로 건축된 마탑의 여러 획기적인 성능을 뿌듯한 태도로 설명했다.
그다음 황후의 부친인 크레온 공작이 일어나 축사를 더했다. 텔레스는 마법으로 증폭된 외조부의 목소리가 행사장에 중후하게 퍼지는 것을 잠잠히 경청했다.
크레온 공작이 연설을 마치고 다시 착석했다. 곳곳에서 정정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그때, 그때였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건.
“꺄아악!”
“으아악, 무슨—?!”
“피해, 피해!”
그리고 다른 누구도 모르는 사이, 첼루나 공주가 숨을 삼키며 옷자락을 꾹 움켜쥔 건.
몇몇을 제외한 다른 모두에게 충격적이게도, 행사장에 마수들이 난입했다.
황제와 마법사들과 공작의 웅변이 지겹도록 이어지는 내내, 첼루나는 손에 식은땀을 쥐고 기다렸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행사에 참석한 첼루나가 마수들이 나타나는 정확한 위치와 시각을 알 길이 없었다. 남들에게 주워들은 얘기만으로는 부족했다.
편집증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거듭 주변을 살피고 싶었지만, 당연히 수상해 보일 테니 계속해서 차분히 정면만 바라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조만간 코앞에 끔찍한 괴수들이 들이닥칠 거라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언제 어디서 그리할지는 모른다. 긴장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신경 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드디어 그녀의 인내가 한계에 닿기 직전, 다행히도, 또는 몹시 불행히도 과거의 참극이 기어이 되풀이되었다.
“꺄아악!”
“으아악, 무슨—?!”
“피해, 피해!”
첼루나는 숨을 삼키며 옷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막상 기다리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자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전생에 감옥에도 갇히고, 목전에서 연인이 죽는 것도 보고, 끝내 시간까지 거슬러 돌아온 그녀는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강렬하고 노골적인 시각적 폭력은 그녀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