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114)

‘이번 생에는 진실을 최대한 일찍 폭로해야 해.’

성직자가 쓰는 성력과 마법사가 쓰는 마력은 근본적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힘이다.

남을 축복하거나 치유하는 데 쓰이지 않고 타락하여 악행에 쓰이는 성력을 저주라고 부른다.

마탑을 습격한 마수들은 불법 실험이 아닌 저주로 만들어진 것들이니, 타락하지 않은 성력과 제때 접촉했더라면 곧장 힘을 잃고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 호위로 있던 자들은 성기사가 아닌 전투 마법사였다. 마법사들은 마력을 써서 무찔렀으므로 마수들은 성력에 닿지 않았다.

‘만약에 누군가 현장에서 성력을 사용한다면……. 그래서 마수들이 무너지고, 마수의 근원이 마력이 아닌 저주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면…….’

그런다면, 마수를 만든 원흉이 마법사가 아닌 타락한 성직자라는 사실이 즉석에서 밝혀질 것이다.

전생에는 이 사실을 알아낸 양심적인 사제들이 스스로 황제께 고할 때까지 황녀와 황후, 마탑의 마법사들은 억울하게 욕먹어야 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평판을 지키고 라토르 공작가와 결탁한 부패한 사제들을 일찌감치 솎아 내야 했다. 첼루나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현장에서 성력을 발동하지?’

행사장에 사제나 성기사를 데려갈 수 있다면 가장 좋을 텐데, 마탑 관련 행사의 초대장이 교회에 전달됐을 리는 만무했다.

실제로 전생에 그곳에는 단 한 명의 사제도, 성기사도 없었다.

‘……성물을 가져가야 해.’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면 물건을 이용해야 했다. 성스러운 힘을 지닌 교회의 보물.

저주로 빚어진 타락한 존재와 접촉하는 순간, 곧장 그 존재를 무력화시키고 어마어마한 시각적 효과를 낼 거룩한 보배.

성물은 여러 개였고, 축성 당시 상황과 축성 이후 보존된 기간에 따라 힘의 정도도 천차만별이었다.

거의 태초부터 전해진 몇몇 성물은 공주는커녕 황제조차 감히 손대지 못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부적처럼 사용되는 소박한 성물은,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사제님.”

“오셨습니까, 첼루나 공주님.”

첼루나가 공손히 인사하자 인자한 성직자가 공주를 맞이했다.

그는 황족들이 다니는 수도 대교회 소속이었고 전생에 동료 사제들의 비리를 밝혔던 양심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회귀 직후, 이번 생에는 다른 결말을 맞이하고자 주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기 시작하면서 첼루나는 이 사제에게도 접근했다.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죄책감으로, 뒤늦은 후회로. 전생에 데아론 외에도 첼루나에게 끝까지 상냥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야 돌이켜 보니 그랬다.

성질 나쁜 공주님과 마주칠 때 꼬박꼬박 묵례하던 어느 하녀. 첼루나가 숨어 우는 걸 발견했을 때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던 어느 정원사.

첼루나가 가끔 의무적으로 황실 예배에 참석할 때, 그녀에게 성찬식을 건네며 이따금 친절하게 웃어 주던 눈앞의 이 후덕한 사제.

그녀가 암흑 속에 갇혔을 때도, 외롭고 괴로울 때도, 학대에 지쳐 삐뚤어져 날카로운 방어 기제를 세웠을 때도, 그녀에게 다가오길 원했던 자들이 있었다. 그녀가 허락만 해 준다면.

데아론도 그중 하나였고, 운 좋게 첼루나의 뾰족뾰족한 방어막을 통과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나머지는 번번이 튕겨 나가 끝내 닿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됐더라. 하녀는 공주궁 사람이었고 정원사는 황자궁 사람이었으니 아마 황녀가 승리했을 때 휘말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친절하고 올바른 사제는 블레논 측의 보복으로 죽었다.

그는 마법사가 아닌 사제였으니 황녀 측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걸 뻔히 알고도 양심에 따라 동료 성직자를 고발했고, 살해당했다.

전생에 그녀의 캄캄한 겨울을 화창한 봄으로 바꿔 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없이 허무하게 죽었다.

첼루나는 이제야 후회했다.

“사제님,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씀하세요.”

“제가 요즘 악몽이 잦아서요. 성물을 하나만 빌려 갔으면 합니다.”

“저런.”

공주가 악몽에 시달린다는 소식에 사제는 진정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악몽을 쫓아내는 부적 용도로 성물을 빌리고 싶다는 말에는 별수 없이 불편함을 느꼈다.

성물을 부적처럼 쓰는 건 사실 신앙보다는 미신과 자기 세뇌에 가까웠다.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니, 성물을 몸에 지녔다는 이유로 안심하고 나면 악몽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친절한 사제는 굳이 어린 공주에게 그런 사실을 구구절절 잔소리처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또한 어쨌든 상대는 황족이었다.

사제는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제국에서 황제에게까지 존대를 듣는 유일한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속세의 신분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명색이 황녀가 부탁하는데 그럴싸한 이유 없이 성물의 대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막내 공주는 내심 늘 사제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가여우신 분.’

예나 지금이나 사제의 첼루나를 향한 마음은 따스한 연민이었다.

전생에 그의 부드러운 호의는 첼루나가 제게 두른 까칠함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처량하게 튕겨 나갔다.

이번 생에 공주는 그에게 스스로 다가왔고, 외로운 소녀의 친구가 되어 주는 건 이 사제의 큰 기쁨이었다.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공주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겁니다.”

사제가 온화하게 권했다. 그는 첼루나에게 소박한 보석함을 내밀었다.

첼루나는 벨벳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영롱한 무색 보석이 박힌 금반지였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첼루나가 정중히 말했다. 그녀는 금색과 무색의 조합을 보고 또 다른 장신구를 떠올렸다. 데아론의 목걸이.

“혹시 반지를 꿸 만한 줄이 있나요? 목에 걸고 자면 편리할 것 같아서요.”

“잠시만요.”

사제는 보드라운 가죽끈을 구해 반지를 꿰고 단정한 매듭을 묶었다. 첼루나는 목걸이처럼 변한 반지를 목에 건 뒤 옷깃 아래 숨겼다.

“사제님, 저를 위해 기도도 해 주시겠어요? 제가 악몽을 그만 꿀 수 있게요.”

첼루나는 예바르게 부탁했다. 신자의 경건한 기도에는 힘이 있다.

첼루나는 본인의 기도에는 별 믿음을 두지 않았지만, 눈앞의 신실하고 상냥한 인간의 신앙에는 충분히 도박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이죠, 공주님.”

사제는 반갑게 말했다. 그는 공주의 장갑 낀 손에 손끝을 살짝 얹었다. 그가 물었다.

“혹시 구체적으로 반복되는 악몽이 있나요? 내용을 알면 제가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억지로 말씀해 주실 필요는 없고요.”

첼루나는 잠시 조용했다. 그러다가 나직하게, 사제가 아닌 맞닿은 손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자꾸 저를 위해 죽는 꿈을 꿔요.”

데아론. 어린 하녀. 친절한 정원사. 다정한 성직자. 그리고 데아론, 또 데아론.

실제로 첼루나는 아직도 종종 지난 생의 마지막 날을 꿈속에서 되풀이했다. 비참한 악몽이었다. 단지 꿈만은 아니기에, 한때 분명한 현실이었기에 더욱 지독한 악몽.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고통은 어제처럼 생생했다.

새카만 밤중에, 또는 흐릿한 새벽에 그 고통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면 첼루나는 이를 악물고 그 모든 걸 차라리 달게 받아들였다.

고통이 있기에 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첼루나는 절대 잊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인간의 의지는 나약하고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여 시간이 지나 흐려지면 무뎌질 법도 했지만, 선명한 악몽과 뒤따른 극통이 망각을 방지했다.

평생 되새기며 살아가자. 첼루나는 어쩌면 꾸준히 거듭되는 악몽이 회귀의 조건은 아닐까 생각도 해 봤다.

가장 후회하는 일을 되돌리고자 과거로 돌아왔으니 두 번째 삶의 의미와 목표를 매 순간 상기하며 살라고, 그런 이유로 악몽이 되풀이되나 보다.

“저런.”

사제는 재차 탄식했다. 그의 눈과 마음이 안타까움에 번졌다.

사제는 공주의 악몽이 죽은 친모를 향한 죄책감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내심 넘겨짚었다.

‘주변에서 다들 이분 잘못이라고 계속 눈치를 주니 그럴 만도 하지.’

사제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곧 화를 가라앉히며 소녀를 축복하는 데 집중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공주님의 앞날에 그런 비극은 없을 겁니다. 제가 공주님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오십시오.”

사제가 힘주어 말했다. 공주는 픽 웃었다. 부드럽게, 평온하게, 그 어떤 가식도 없이.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는 공주를 위해 기도했다. 공주도 눈을 감고 사제의 기도를 들었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때 첼루나는 옷깃 아래 반지가 뜨뜻하게 울리는 걸 느꼈다.

전생에 첼루나는 다른 황족은 다 초대받은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 홀로 제외되었다.

마탑에서 일부러 초대장을 빠트린 건지, 아니면 중간에 황제가 그녀의 참석을 막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생에 그녀는 확실히 초대받았다. 그녀는 행사가 아닌 전투에 참석하는 심정으로 외출을 준비했다.

‘실제로 전투에 가깝긴 하지.’

오늘, 전생과 똑같이 행사장에 마수들이 나타난다면 그곳은 당연히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첼루나는 차라리 이번 생이 전생과 달라져 마수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다.

지난 4년간 삶은 같으면서도 다르게 흘러갔으니, 이번 행사가 전생과 똑같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똑같으면 안 되지, 내가 성물까지 챙겨 가는데.’

첼루나는 사납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수들의 습격 자체가 반복되지 않을 확률은 낮아 보였다. 하지만 그 결과만큼은 바꿀 수 있으리라.

지난 4년간 그녀가 회귀에 대해 내린 결론은, 자신의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사건은 바뀌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컨대, 황녀 시녀장의 아들 리암이 전생에서처럼 유모를 두고 강변에서 혼자 노는 일은 그대로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개입하여 꼬마의 익사를 막을 수는 있었다.

또한, 첼루나의 뜻과 상관없이 데뷔 무도회는 예전처럼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데아론은 테라스에 혼자 숨었다. 첼루나가 그에게 다가온 뒤에야 현재는 과거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즉, 라토르 공작과 결탁한 사제들이 마수들을 행사장에 풀어놓는 것 자체는 과거와 똑같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어떻게 상황이 비틀릴지, 그건 온전히 첼루나가 정할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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