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14)

“바보야, 뭐 또 그런 걸 헷갈리고 그래.”

블레논은 까칠하게 투덜댔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눈에서 의심은 사라졌다.

상대방의 언행을 좀 더 예리하게 분석하려 들기에는 동생에 대한 선입견이 너무 강했다.

첼루나가 블레논보다는 텔레스 앞에서 더 긴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블레논은 이미 동생에 대한 모든 판단을 확정한 뒤였다.

블레논에게 4년 전까지의 첼루나는 엄마를 죽이고 태어난 쓸모없는 계집이었고, 요즘은 그새 철이 들어 많이 나아진 손아랫사람이었다.

자기 친모를 죽였다는 원망에 엮여 처음부터 그녀를 색안경을 통해 바라봤던 블레논과 달리, 텔레스는 좀 더 객관적이었다.

선입견이 없는 냉정한 관찰은 오히려 더 무서웠다.

블레논은 첼루나에게 몹시 감정적으로 굴었지만 이는 첼루나가 그의 마음을 건드려 제 입맛에 맞게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텔레스는 더 까다로웠다. 첼루나는 언니를 잘 몰랐고 텔레스도 동생을 잘 몰랐다.

동생은 언니를 함부로 조종하려 들 수 없었고 언니도 자신이 모르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동생을 더 꼼꼼히 관찰했다.

“그러게요. 저도 되게 민망했어요.”

첼루나는 온순한 태도로 맞장구쳤다. 블레논은 몇 마디 더 의미 없이 툴툴거렸다. 그러다 또 눈빛을 싹 바꾸며 그녀를 직시했다.

“그런데, 고작 머리 장식 때문에 거의 한 시간을 있었어? 네가 장신구를 헷갈렸다는 것쯤은 황녀도 바로 알았을 텐데.”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애초에 바보였다면 전생에 권좌 직전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황자의 정보력은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자기 동복동생이 이복동생의 처소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네, 그건 사실이에요. 장신구를 보여 드리니까 바로 알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착각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린 뒤 나가려고 하자 저한테 다과를 다 들고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뭐라고?”

“네, 좀 이상하죠? 그런데 저야 뭐 거부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결국엔 차를 다 마시고 나왔어요. 그래서 오래 걸린 거예요.”

첼루나는 조심스레, 자신이 4년간 쌓아 온 순진하고 소심한 모습을 토대로 오라비에게 교묘한 거짓을 고했다.

핵심적인 내용은 거짓이었으나 사실에 가까운 핑계는 충분했다.

예컨대, 자신이 감히 황녀를 거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블레논도 첼루나에게 왜 그걸 거절하지 않았냐고 짜증 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인성은 망했어도 두뇌는 명석한 그는 곧장 효율적인 질문으로 넘어갔다.

“둘이 차 마시면서 무슨 얘길 했는데? 황녀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그냥, 이것저것 얘기했어요. 별로 중요한 건 없었어요. 책에 대해 좀 얘기하고, 오페라 얘기도 하고. 사실 두서없는 편이었어요.”

첼루나는 말갛게 일러바쳤다. 여기서도 거짓은 없었다. 블레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뭉툭하게 내뱉었다.

“그때 네가 시녀장이랑 엮인 것 때문에 쓸데없는 관심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네. 귀찮게.”

시녀장이라 하면, 텔레스의 수족이자 리암이라는 소년의 엄마를 칭했다.

약 두 달 전, 첼루나는 짧게 실종되었던 꼬마 리암을 찾아 유모에게 무사히 돌려준 적 있었다.

텔레스의 시녀장은 황비 소생인 첼루나 공주를 자동으로 싫어했다.

하지만 공주가 우연히 제 아들을 찾아 준 후, 마지못해 태도가 조금 유해진 건 사실이었다.

당시 블레논은 꽤 언짢아했었다. 황녀 시녀장은 블레논에게도 적대적이었으며 황자 역시 그 사람을 좋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시내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가 황녀 시녀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어린애를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었다는 첼루나의 온순한 변명을 곧이곧대로 수긍했었다.

“하여튼,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어.”

블레논의 저음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첼루나는 얌전히 침묵했다. 블레논이 퍼뜩 고개를 들더니 동생을 보며 물었다.

“혹시 황녀가 널 다시 초대한다고 했니?”

“네, 전하. 앞으로 가끔 부르신다고 했어요. 저보고 친하게 지내자는데요.”

첼루나는 마치 그 발상이 꺼림칙해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떨떨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도 블레논의 경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걔가 그랬어?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네, 전하.”

“하, 참나……!”

이번에 블레논은 총명을 잊고 첼루나에게 화풀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을 찰나,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아니다. 첼루나,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라.”

짧은 고민에 이어 블레논이 살짝 들뜬 듯 말했다. 여기까지도 첼루나의 예상 범위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기회라뇨?”

“황녀 걔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너를 가까이서 주시하겠다는 거잖아. 우리가 그걸 역이용하면 돼.”

역시 영리한 황자였다. 자기 적수로 인정한 대상 한정으로는 그도 예리하게 관찰하고 파악할 줄 알았다. 황녀의 행동에 대한 그의 해석은 진실에 가까웠다.

다만, 황녀가 친목을 핑계로 막냇동생을 주시하고자 하는 이유가 문제의 그 동생이 먼저 접근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황자의 상상 밖이었다.

만약 황자가 첼루나를 조금이나마 의심했다면, 이복동생을 경계하듯 동복동생을 주목했다면, 자신이 첼루나를 첩자로 쓰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았을 텐데.

“앞으로 황녀가 널 초대하면 황송한 척 고분고분 행동해, 알겠지? 그리고 나한테 보고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나한테 꼬박꼬박 알려 달라는 뜻이야.”

첼루나는 블레논이 자신을 자연스레 ‘우리’라는 표현으로 묶는 게 가소로웠다.

그만큼 오빠의 환심을 완벽하게 샀다는 뜻이니, 첼루나는 지난 4년간 자신의 명연기를 속으로 칭찬했다.

“네, 전하.”

첼루나는 유순하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졸지에 오빠 편에서 언니를 염탐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물론 그건 그냥 블레논의 생각이었고 첼루나의 진짜 목표는 정반대였지만.

블레논은 흡족해하며 도로 착석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첼루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첼루나, 어제 무도회장에 언제부터 없었던 거야? 계속 안 보이던데.”

첼루나는 뜨끔했다. 그녀는 여태 블레논을 잘만 속여 온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하며 맑게 대꾸했다.

“춤추는 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구석에 숨어 있었어요. 중간에는 아예 테라스에 있었고요. 사람들이 저를 계속 쳐다보는 게 싫었어요.”

블레논은 안타까워 혀를 찼다. 고작 그 정도 주목받았다고 부담스러워 피하다니.

“그렇다고 몇 시간을 통째로 사라지면 어떡해? 앞으로는 적당히 붙어 있어. 부담스럽다고 피하는 건 별로 황족다운 행동이 아니야.”

“네, 전하.”

때로는 길거리 시정잡배보다도 천박하게 구는 황자가 남에게 황족다움을 가르친다는 게 우스워서 첼루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블레논은 실제로 그 누구보다 황족다웠다. 이기적이고 교활하며 능구렁이 같다는 점에서 그랬다.

적어도 블레논은, 그리고 텔레스는 단지 사람들의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무도회장에서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첼루나가 제공한 변명은 첼루나라서 먹히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수고했어, 첼루나. 사교계 데뷔 축하해.”

블레논이 인자하게 말했다. 그의 오만한 애정은 진짜였다.

황자는 여전히 동생을 저보다 수준 낮은 인간으로 취급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자기 울타리 안에 들여보내 준 뒤였다.

첼루나는 오라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어, 상냥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속으로 그녀는 웃는 듯 울었다.

무도회 이후로도 시간은 흘러, 어느덧 화창한 여름이었다.

덥고 건조한 제국의 하계는 한 해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 여겨졌다. 잠깐 불볕더위가 찾아오는 한여름을 제외하면 야유회에 가장 적합한 날씨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계절, 어느 쾌청한 여름날에 하늘과 땅을 비명으로 물들인 비극적인 사건을 첼루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마탑 신축 기념행사…….’

이미 4년 전, 거의 회귀 직후, 첼루나는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며 잊을 수 없는 전생의 사건을 곱씹었었다.

천덕꾸러기 공주 첼루나는 당시 초대받지 못했지만, 주워들은 얘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국에서 마법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마법은 학문이었고, 기술이었고, 부유한 자들을 위한 일상이었다.

횃불이나 모닥불 없이도 밤에 빛을 낸다든가, 멀리 사는 사람에게 우편물을 순식간에 전송하고, 심지어 군대를 유지하고 전투를 치르는 데도 마법이 사용됐다.

그 마법이 발명되고 보존되고 배포되는 곳이 마탑이었다.

역사상 포렌타인의 수많은 군주가 마탑을 국유화하려 했으나 왕실 또는 황실의 마법 독점에 반발한 귀족들 때문에 마탑은 여전히 독립적인 기관이었다.

비록 독립적인 기관이지만 마탑도 결국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런즉 연줄이 생기고 파벌이 갈리고 별로 가치 중립적이지 않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기 마련이었다.

전생에, 그리고 이번 생에도 마탑의 마법사들은 황실의 권력 다툼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마탑주가 황후의 먼 친척이고 황후의 가문이 마법사들을 대대로 후원해 왔다는 이유로 마탑은 텔레스 황녀와 긴밀했다.

반면, 마탑과 여러모로 대척점에 있는 교회는 블레논 황자를 지지했다.

교회의 사제들에게는 마탑의 학문과 기술은 없었으나 민중의 신앙을 좌우할 힘이 있었다.

현재 교회에서 권력을 잡은 고위 사제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족속이었다.

맏이이자 아들인 블레논이 아비의 권좌를 이어받는 건 그들이 보기에 너무나 당연한 이치였다.

이토록 두 세력이 황족들과 첨예하게 맞물려 위태롭게 대립하던 참에, 전생의 이맘때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결국 블레논 쪽의 자작극으로 밝혀졌지.’

황후의 가문이 후원한 마탑 신축 기념행사에서, 뜬금없이 마수 떼가 나타나 행사장을 휩쓰는 바람에 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토르 공작의 자작극으로.’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마수 떼의 규모와 힘이 행사장에 있던 전투 마법사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다행보다는 또 다른 불행에 가까웠다.

호위 인력으로 배치된 전투 마법사들은 허겁지겁 마수들을 무찔렀고, 그 결과 증거가 인멸되었다.

‘한 마리라도 살려서 교회로 데려갔으면 진실이 훨씬 빨리 밝혀졌을 텐데.’

처음에 그 마수들은 마탑의 불법 실험 부작용이 낳은 존재로 판정되었고, 마탑과 마법사들을 향한 여론은 싸늘하게 변했다.

그들과 사이좋기로 유명한 황후와 황녀도 덩달아 비난받았다.

실은 황자의 외조부 라토르 공작에게 매수당한 부패한 사제들이 짐승 사체를 모아 저주를 건 거라고, 진실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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