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4)

그녀가 머리 장식을 내려놓았다. 공주를 바라보는 황녀의 얼굴은 이제 무표정했다. 아까 진짜로든 가짜로든 지었던 인자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날 내가 무슨 장신구를 찼는지 관찰하면서까지 나랑 독대할 기회를 구한 것 같은데. 무슨 용건인지 들어나 보자.”

첼루나는 손끝을 빳빳하게 말아 쥐었다.

그저 전생을 기억하는 탓에 느끼는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황녀가 내뿜는 스산한 위압감에 호흡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말문이 막혀 버벅거릴 생각은 없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떠올리며 용기를 냈다. 기적처럼 얻은 두 번째 삶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전하와 독대를 원했습니다.”

내 주군이 본론을 원하시니, 바로 털어놓자. 어설프게 우회적인 화법을 고집하지 말고 솔직한 언어로 의심을 피하는 게 나았다.

“왜냐하면, 전하, 저는 전하의 신하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급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털어놓은 본심에 텔레스의 무표정이 흔들렸다.

설마 이렇게 대놓고 신하 운운하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터라 텔레스는 진정 당황했다.

“전하께서 블레논 전하와 사이가 나쁘시다는 걸 압니다. 궁인들과 귀족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릴 정도입니다. 전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전하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텔레스의 당황이 깊어졌다. 사뭇 참신한 경험이었다.

차라리 첼루나가 매끄러운 사교계 화술로 그녀를 떠보려 했다면 능숙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그깟 얍삽한 머리싸움이야 지긋지긋하게 해 왔으니까.

하지만 막냇동생의 투명한 절박함은 텔레스가 흔히 다뤄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만 계속 풀다 보면 막상 쉬운 문제를 마주했을 때 사고가 정지한다던가. 지금 텔레스는 딱 그런 기분이었다.

“……네 오빠가 내게 와서 그렇게 말하라고 시키던가?”

텔레스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쉽고 단순한 문제보다는 오히려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푸는 게 익숙한 그녀는 고도의 계략을 의심했다. 첼루나가 충분히 예측한 대로였다.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첼루나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일부러 순진하게 충격받은 척 눈을 휘둥그레 치뜨는 연기는 생략했다. 현재 그녀의 한결같은 전략은 솔직함이었다.

“블레논 전하는 제게 그런 일을 시킬 만큼 저를 신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이 평소에 저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전하께서도 아시겠지요. 그래서 제가 지금 전하께 찾아온 겁니다. 저는 도저히, 그런 이와 동복이라는 이름으로 엮어 계속 고통받고 싶지 않습니다.”

첼루나의 고백은 진솔함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지난 4년간 그녀의 삶은 대부분이 가식이고 연기였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그녀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첼루나는 블레논을 용서한 적 없었다.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회귀 이후 첼루나가 태도를 바꾸면서 그녀를 향한 블레논의 언행도 훨씬 유해졌지만, 첼루나의 원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생에 그녀가 겪은 학대, 동복인 황자의 허무한 패배로 인한 그녀의 몰락, 또 그로 인한 데아론의 죽음.

그 모든 죗값을 첼루나는 블레논에게 똑똑히 받아 내고자 했다.

이로써 아들은 끔찍이도 아끼면서 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비에게도 복수할 계획이었다.

“부디 저를 받아 주십시오, 전하.”

그 계획의 달성을 위해서는 이복 언니가 꼭 필요했다.

그녀가 자신을 아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신뢰, 적당한 총애가 필요했다.

이제 와서 자신이 가슴 뭉클한 자매애를 누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첼루나는 훈훈한 가족애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딴 건 희망하지 않는 게 나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오직, 이번 생에 자신도 살고 데아론도 살아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오래오래 함께 늙어 가길 원했다. 설령, 그 ‘함께’가 전생과 다른 의미더라도.

“필요하시다면 저를 시험하셔도 좋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드린 말씀이 전부 진실함을 입증할 기회를 주십시오.”

석상처럼 침묵하는 황녀에게 공주는 겸손히 고개 숙이며 자신을 시험할 것을 제안했다.

황녀가 처음부터 흔쾌히 자신을 받아 줄 거로는 생각한 적 없었다. 만약 언니가 너무 빨리 의심을 풀었더라면 오히려 첼루나가 그녀를 의심했으리라.

“……글쎄, 시험이라.”

황녀가 마침내 말했다. 첼루나는 시선을 비스듬히 수그렸기에, 텔레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텐데.”

첼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텔레스는 우아하게 찻잔을 집었다.

넘겨짚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첼루나는 텔레스가 차를 마시는 걸 핑계로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생각을 정돈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데, 내가 네 진심을 시험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니. 시험을 해서 결과가 나오면, 내가 과연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을까?”

이제는 첼루나가 침묵했다. 그녀는 제 언니가 그러하듯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연기할 수도 없었다. 긴장으로 다시 손끝이 떨렸다.

“일단, 첼루나. 우리는 서로 친해지는 게 먼저일 것 같아.”

찻잔을 내려놓으며 텔레스는 싱긋 웃었다. 첼루나는 실낱같은 희망과 더한 긴장 속에서 언니의 얼굴을 빠끔히 훔쳐보았다.

“비록 지금껏 사이가 소원하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자매잖니. 피를 나눈 가족끼리 서먹하게 지내는 건 너무 슬픈 일이야. 안 그래?”

텔레스는 다정하게 웃었다. 첼루나는 저 미소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하지도 않았다.

텔레스는 동생에게 여지를 주고 있었다. 첼루나가 언제든지 자기 진심을 증명하고 언니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여지.

만약 텔레스가 첼루나를 완전히 거절하고자 했다면, 굳이 친하게 지내자며 떠볼 필요 없이 즉각 내쫓았을 것이다. 황녀에겐 그만큼의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텔레스는 동생에게 흥미를 느꼈다. 적어도, 곁에 더 가까이 두고 자세히 관찰하고 싶어졌다. 첼루나의 말마따나, 시험이었다.

정말로 그녀가 동복을 배신할 준비가 되었는지, 정말로 그녀가 써먹을 만한 패가 될지, 텔레스는 직접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믿음이니 뭐니 그런 거창한 얘기부터 하기 전에. 우리 서로 찬찬히 알아 가는 시간을 갖자.”

텔레스가 제안했다. 첼루나는 그 속뜻을 곱씹다가, 얌전히 끄덕였다.

“네, 황녀 전하.”

아직은 절망도, 희망도 너무 이른 시기였다.

텔레스는 정말로 동생과 ‘평범한’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음악 취향이나 좋아하는 음식, 또는 읽어 본 책들만으로도 한 시간을 꼬박 대화할 수 있었다.

이미 사교계 화법에 능통한 텔레스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화제는 교묘하게 피하면서도 경쾌하고 일상적인 얘기를 이어 가는 재주가 탁월했다.

첼루나는 언니보다 훨씬 서툴렀다. 그러나 언니의 인도를 매끄럽게 따라갈 정도의 눈치는 충분했다.

겉으로는 훈훈하나 사실 속으로는 각자 폭탄 백 개쯤은 품은 듯한 대화가 끝나고 소담한 다과상이 마침내 텅 비었을 때, 텔레스가 말했다.

“앞으로 가끔 초대할게, 첼루나.”

첼루나는 그 말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기뻐서, 진심으로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이복 언니와 마주 앉아 서로 안 그런 척 팽팽한 탐색전을 벌이는 건 참으로 기 빨리는 일이었다. 순전히 자기 기분만 생각한다면 다시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텔레스가 필요했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 생에도 그 아이의 주군이 될 당신은, 이번에는 내 아군까지 되어 주어야겠다.

첼루나는 텔레스에게 다소곳이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언니는 동생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문이 닫히고 손님이 사라지자 황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텔레스는 언제나처럼 생각에 잠겼다.

언니와의 복잡 미묘한 다과회가 끝나고 불과 몇 시간 뒤, 첼루나는 오빠 방으로 불려 갔다.

“황녀궁에 다녀왔다며?”

블레논은 본론부터 투척했다. 차가운 의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텔레스 황녀와 마찬가지로 보석처럼 파란 눈이기도 했다.

다소 우습게도, 서로 모친이 다른 황자와 황녀는 연한 금발부터 새파란 눈까지 외모를 쏙 빼닮았다.

첼루나 혼자 아빠가 아닌 엄마를 닮아 머리는 태양 색깔이었고 눈은 황금 같았다.

겉모습만 보면 거의 쌍둥이 같은 이복남매가 목숨 걸고 싸우고, 빨간 머리 외톨이는 혼자 겉도는 게 과거의 싸움 양상이었다.

“네, 전하.”

첼루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은 없었고,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블레논의 정보력은 텔레스만큼이나 뛰어났다.

“왜?”

블레논은 구태여 질문을 길게 하지 않았다.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회귀 전의 오라비가 떠올라서 첼루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저 표정도 오랜만이네.’

나를 벌레 보듯 보는 표정. 회귀 이후 자신이 열심히 순종적인 동생을 연기하면서 조금씩 지워진 표정이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아직도 첼루나는 황자를 미워했고, 그를 용서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이번 생에도 그의 파멸을 원했다.

하지만 나약하고 간사한 인간의 마음은 그새 저도 모르게 조금 물러졌나 보다.

지난 4년간 블레논이 제게 그나마 잘해 주는 순간이 조금씩 늘어서.

여전히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아비와 달리 그나마 내 가식적인 모습이나마 알아주고 받아 줘서.

자신의 형제자매 중 어머니가 같은 유일한 사람이라서. 어쩌면 제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서.

사실 전생부터 지금까지 첼루나는 늘 애정에 굶주려서. 어쩌면, 저도 모르게, 오빠에게 조금 기댔을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 따지자면 저딴 쓰레기에게 정을 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절대 그리 이성적이지만은 않다.

블레논 포렌타인은 부인할 수 없는 학대범이었고 첼루나는 그런 그를 증오했지만, 때로는 외로움이 너무 커서 오빠라는 작자에게 뭔가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저 싸늘한 눈초리를 보자 헛된 환상은 전부 깨졌다.

“제가 황녀 전하의 머리 장식을 주웠거든요. 무도회에서 전하가 찬 머리 장식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무도회장에서 주웠는데 알고 보니 황녀 전하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착각했어요.”

첼루나는 천진한 표정으로 간략히 설명했다. 오빠 앞에서 백치미를 연기하는 건 이제 일상이라 별로 망설일 것도 없었다.

그래, 우리는 이런 관계지. 나는 네놈을 속이고, 너는 내 얄팍한 가면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상기한 첼루나는 명치끝의 아릿한 통증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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