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의 데아론이 아직 첼루나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악독하게 굴 수 있는지 모르는 이유는, 오늘 그가 그녀를 고작 두 번째로 만났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도 너는 언젠가 알아내겠지. 그때가 되면 전생과 달리 나를 경멸하게 될까.
과거에 너는 내 못나고 못된 모습을 알아내고도 사랑으로 전부 품었지만, 나는 그런 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미움이 가득한 사람이었어.
어쩌면 이번 생에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데아론 앞에서 끝까지 감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첼루나는 씁쓸함을 삼켰다.
‘우리가 계속 남남으로 지낸다면, 네가 알아낼 일도 없겠지.’
이번 생에 나는 네 연인이 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 너는 나의 깊은 본성까지 알아낼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도 고마웠어, 데아론.”
모든 괴로운 속내를 거짓 미소 아래 감추며 첼루나는 부드럽게 답했다. 과거형을 강조하며.
“내가 먼저 들어갈게.”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새도록 단둘이 무도회장 밖에서 노닥거리며 지냈다고 홍보할 생각은 없었다.
“네, 공주님.”
데아론은 힘없이 속삭였다. 첼루나는 데아론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억지로 웃어 주었다. 직후, 어렵게 돌아섰다.
소녀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고 소년은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이들의 단꿈은 그렇게 끝났다. 일단은.
첼루나는 무도회장에 슬그머니 입장했다. 그녀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대략 30분쯤 더 기다리면 무도회는 끝날 것이다.
그녀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쪽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온 첼루나를 알아채고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다들 슬슬 피곤해 보였고, 몇몇 사람은 그래도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중 누구도 존재감 적은 막내 공주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럴 때는 편리하군.’
첼루나는 안도했다.
그녀는 4년을 노력해서 이미지를 쇄신하고 전생에 없었던 권위와 권력을 얻고자 했지만 여전히 오빠와 언니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전생에 그러했듯 첼루나의 미미한 존재감은 이럴 때는 확실히 유용했다.
과거에 그녀는 모두의 상대적인 무관심 속에서 이복 언니의 기사와 비밀 연애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사실 첼루나와 데아론의 연애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아무리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쳐 봤자 정치적으로 큰 영향은 없다는 판단 아래 다들 웬만하면 눈감아 주었다.
물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묵인되었을 뿐이지 절대 환영받은 적은 없었다. 주변 사람에게 격려를 받은 적도, 빈말로라도 부럽다거나 축하해 주는 이도 없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둘이 잘해 보든가, 그렇게 차갑게 비꼬는 눈으로 세간은 두 연인의 관계를 품평했다.
실제로 전생에 데아론은 몇 번 첼루나를 두고 가족과 매섭게 싸웠다.
첼루나는 그때마다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지만, 그에게 이별을 제안할 만큼 자기희생적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제안했다 한들, 데아론이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확실히, 오늘 밤은 눈에 안 띄는 게 좋았어.’
첼루나는 누구도 제게 다가와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느냐고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리고 내내 이 구석에 있었던 척, 벽에 태연하게 기대며 부채를 꺼내 입가를 살랑살랑 부쳤다.
그러다 그녀는 우뚝 굳었다. 방을 가로질러 블레논 황자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황자는 동생을 보더니 눈썹을 까딱, 치켰다.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했다.
‘젠장.’
저 예리한 놈. 아니, 그냥 이번 생에는 내게 관심이 너무 많아진 건가? 둘 다일지도 모른다.
원래도 블레논은 둔한 편이 아니었다. 오만함이 눈을 가려 놓치는 게 생겼을 뿐이지.
자기가 관심을 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겐 놀랍도록 무관심한 거만한 황자님.
지난 생에도 그는 ‘훈육’ 또는 화풀이를 위해 동생을 방으로 불러 폭행하거나 그녀에게 불쾌한 심부름을 시킬 때 빼고는 첼루나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첼루나의 필사적인 아양이 퍽 효과적이었던 듯했다.
블레논은 첼루나가 몇 시간을 통째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낌새챈 눈치였고, 첼루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식은땀이 흘렸다. 첼루나는 스르륵 시선을 회피했다. 그냥 얼버무리면 그만이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그리 편한 것만도 아니었다.
‘저놈은 그렇다 치고, 황녀 전하는…….’
첼루나는 블레논의 시선도 피할 겸, 그녀의 다른 피붙이를 따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결국 말을 못 걸었네.’
첼루나는 부채 뒤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데아론과 함께하느라 결국 시간이 없었다.
데아론을 선택한 데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머리가 아픈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차선책을 모색했다. 그러다 황녀를 발견했다.
‘아하.’
텔레스는 블레논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황녀의 옆에는 어김없이 모리안 텔로아가 있었고, 그들은 황녀의 외사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첼루나는 텔레스의 우아한 금발 위에 반짝이는 은색 머리 장식에 주목했다.
그녀는 사뿐히 다가가 장신구를 더 가까이서 관찰했다. 청옥으로 세공된 장미꽃 모양이었다.
첼루나는 머리 장식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대강이나마 계획을 세운 뒤, 자신이 황녀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에 돌아서서 그늘에 녹아들었다.
이후, 정말로 약 30분 뒤 무도회는 막을 내렸다.
첼루나는 무도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미룰수록 신빙성이 떨어지는 핑계를 준비했으므로 예절대로 하루를 기다리는 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보통 무도회는 밤새도록 이어지니 무도회가 끝난 당일에는 누군가를 절대 방문하지 않는 게 사교계의 기본적인 예절이었다. 지난밤을 꼴딱 지새운 사람은 당연히 피곤할 테니까.
그래서 제게 허락된 가장 이른 시간인 다음 날 오후, 첼루나는 텔레스 황녀에게 전언을 보냈다. 만나 뵙고 싶다는 내용으로.
“첼루나가?”
텔레스는 놀랐다. 그러나 곧 놀라움을 감추며 전언을 전달한 시녀에게 대답했다.
“그럼 3시에 오라고 해. 다과를 준비할 테니.”
황족들은 평범한 가족일 수 없다.
애초에 이 넓은 황궁에서 서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기에 서로 방문하려면 꽤 심각하게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면에서 가족의 처소를 방문하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했다.
정말로 뚜렷한 용건이 있거나, 평소에 허물없이 친해서 딱히 용건이 필요 없거나.
첼루나는 확실히 후자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여태 살면서 언니의 처소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었다.
용건이라니, 하찮은 막내 공주가 고귀하신 황녀 전하께 용건 같은 게 있을 리가.
그런데 오늘 첼루나는 명분이 확실했다. 황녀 전하께 돌려 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어제 아침 무도회장을 떠나기 직전에 머리 장식을 하나 주웠는데, 이게 황녀의 것인지 확실치 않아서 일단 갖고 있었다고, 그녀의 전언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대들은 전부 물러가게. 그 애랑 혼자 있고 싶어.”
첼루나의 도착 전, 텔레스는 시녀들에게 명령했다.
상대방이 첼루나가 아닌 블레논이었다면 시녀들은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자신들을 내보내지 말라고 간청했을지 모른다.
블레논 황자는 위험했다. 이복 남매는 벌써 명백한 적대 관계였다. 주변에 증인이 될 만한 아랫사람도 없이 단둘이 남는다면 불안해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첼루나는 그저 하찮은 막내 공주였다. 불쾌하긴 하지만 위험할 이유는 없는. 황녀의 시녀들은 반대 없이 자리를 비켰다.
첼루나가 입장했다. 지난 생까지 포함, 난생처음 이복 언니의 응접실에 들어선 그녀는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 첼루나.”
첼루나가 치맛자락을 쥐고 공손히 인사하자 텔레스는 나긋하게 환영했다.
첼루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텔레스 맞은편에 다소곳이 착석했다.
지금 첼루나의 소심함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과거의 승자, 전생의 군주, 이번 생에는 자신의 주군 될 자를 앞두고 진심으로 떨었다.
“차부터 마실래?”
텔레스가 권했다. 가족이든 친구든, 아군이든 숙적이든 손님이 찾아왔는데 음료조차 대접하지 않는 건 사교계의 예절에 어긋났다. 황녀는 그 규칙을 착실히 따랐다.
“네, 감사합니다, 전하.”
첼루나는 얌전히 대답했다. 그녀는 언니가 윗사람의 도리대로 손님과 본인의 잔을 차례로 가득 채우는 걸 지켜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니?”
주전자를 내려놓은 텔레스가 동생을 똑바로 보며 온화하게 물었다.
마치 상대방이 자신을 찾아오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 지극히 산뜻하고 평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첼루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니의 친절한 태도를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만약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저도 모르게 조금 물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 회귀한 첼루나는, 눈앞의 다정해 보이는 여인의 명으로 수도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전하께 돌려 드릴 게 있습니다.”
“그래, 그 얘기는 들었어.”
“그전에 이게 전하의 물건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첼루나는 자신이 가져온 은색 꽃 모양 머리 장식을 텔레스에게 조심스레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도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이건…….”
머리 장식을 건네받은 텔레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첼루나가 부연했다.
“무도회장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웠습니다. 마침 그날 전하께서 비슷한 장신구를 차신 것을 봐서, 혹시 전하께서 떨어트리신 게 아닐까 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실에 불과했다. 그날 텔레스의 패물을 무심코 살펴본 첼루나가 거의 즉석에서 지어낸 간단한 계략이었다.
첼루나는 살면서 언니의 처소에 드나든 적이 없다. 안 하던 짓을 해서 의심받지 않으려면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했다.
마침 첼루나는 텔레스가 무도회에서 착용한 장신구와 비슷한 색깔과 모양의 머리 장식이 있었다.
평소에 치장할 일이 워낙 없어 남들 앞에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첼루나는 텔레스가 머리 장식을 떨어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다.
하지만 떨어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순진무구한 얼굴로 장신구를 들고 나타났다.
텔레스는 첼루나가 건넨 머리 장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얼핏 보면 자신이 무도회 때 착용한 장신구와 정말 비슷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간신히 비슷한 수준에 불과한 물건을.
“노력이 가상하구나.”
하여, 텔레스는 부드럽게 평했다.
힘없는 동생과 달리 그녀는 굳이 핑계를 만들어 말을 빙빙 돌려 할 이유가 없었다. 권력 있는 자는 후폭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정곡을 찔렀다.
“그래서, 본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