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14)

“아!”

데아론이 첼루나의 허리를 번쩍 안아 들자 첼루나가 놀라서 신음을 토했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치뜬 눈을 올려다보며 데아론은 씩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사과했다. 하지만 이번 사과는 처량하지도 씁쓸하지도 않았다.

데아론은 장난기 가득한 눈매를 곱게 휜 채 첼루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첼루나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힘자랑하기는.”

“화나셨나요?”

“아니.”

데아론은 계속 생글거렸다. 첼루나도 끝내 부드럽게 픽 웃었다. 이토록 온화하게 들뜬 데아론 앞에서 오래 새침한 척하기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까 허리 양쪽에 닿았던 단단한 감촉이 너무나 생생해서.

쾅쾅 뛰며 열기를 내뿜는 심장 때문에 그녀의 눈빛까지 전부 설탕처럼 사르르 녹았다.

“공주님, 제가 다른 춤을 가르쳐 드려도 될까요?”

“다른 춤?”

데아론이 조심스레 제안하자 첼루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제안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고향에서 추던 춤입니다. 무도회에서 추는 춤과 좀 많이 다르긴 한데…….”

고향에서 추던 춤, 즉 평민들의 춤이었다. 저도 모르게 운을 뗐던 데아론은 뒤늦게 첼루나의 눈치를 살폈다.

달빛 아래서 춤추는 순간이 너무나 마법 같아서, 공주의 저 눈부신 금색 눈에 홀려 마음대로 말하고야 말았다.

이번에야말로 마법이 깨질지도 모른다. 어딜 감히 비천한 자들의 춤을 제게 가르치냐며 공주가 화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런다면 데아론은 진심으로 사죄하며, 지금껏 누린 달밤의 추억만으로 충분히 만족한 채 슬프게, 하지만 순순히 현실로 돌아가리라.

“응, 가르쳐 줘.”

첼루나는 기꺼이 답했다. 데아론의 눈이 동그래졌다.

“배우고 싶어, 데아론.”

이미 다 아는 춤이지만. 그리고 어차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귀족의 춤이나 평민의 춤이나 결국에는 다 비슷했다. 다리를 쓰고, 팔을 사용하고. 어차피 같은 인간이었다.

“음, 그런데 춤이 좀 과격합니다.”

“괜찮아. 나 과격한 거 좋아해.”

“어, 그래요?”

“응. 뭐든 적당히 과격해야 할 맛이 나지.”

첼루나는 진지한 듯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데아론을 향해 쌩긋 웃었다. 그 미소에 이끌려 데아론도 걱정을 잊었다. 그가 밝게 말했다.

“그럼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할게요.”

춤곡에는 종류가 다양했다. 왈츠, 미뉴에트, 폴카 등등.

개중 귀족들의 춤곡은 느리고 우아한 쪽에 속했고 아무리 박자가 빠르다 한들 기껏해야 경쾌한 수준이었다.

평민들의 춤은 달랐다.

그들의 무대는 비싼 샴페인을 곁들인 고급스러운 무도회장이 아닌 맥주와 럼주, 뜨뜻한 벽난로와 오래된 피아노가 난무한 왁자지껄한 곳이었다.

여관이나 거실에서 적당히 흥이 오르면 그날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쌓인 스트레스를 술과 춤으로 푸는 이들이 식탁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게 일상이었다.

아직 전기가 없던 시절 부유한 귀족들이 마법으로 빛을 낼 동안 평민들은 난롯불 하나에 의지해 방을 밝혔다.

긴긴 겨울밤에 가로등 따위는 없었으므로 해가 빨리 지는 계절에 달리 외출할 곳이 없는 평민들은 집에서 모든 유희를 해결했다.

데아론의 엄마도 아들에게 거실에서 춤을 가르쳤다.

평민들의 저녁에 무도회는 없으니 벽난로에 장작을 그득 담아 놓고 그 앞에서 뛰노는 걸로 충분했다.

데아론은 이제 첼루나에게 그 지식을 전수했다.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그저 야만적으로 날뛰는 것처럼 보일 법한 동작에도 나름의 안무와 규칙이 있었다.

파트너가 왼쪽으로 돌면 자기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든가, 언제는 팔짱을 껴야 하고 언제는 손을 맞잡는 걸로 충분한지, 데아론은 첼루나에게 즐겁게 가르쳤다.

“금방 따라 하시네요!”

데아론은 기쁘고 놀라서 유쾌하게 외쳤다.

이쯤 되자 둘 다 너무 열심히 뛰어다닌 탓에 볼은 사과색이었고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라 목소리마저 커졌다.

“당연하지. 나는 못하는 게 없어.”

첼루나는 괜히 자랑하듯 말한 뒤 상쾌하게 웃었다. 지난 생에 이미 실컷 배워 써먹은 동작이니 못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폭소는 햇빛처럼 넘쳐흘렀다.

데아론도 첼루나를 따라 웃었다. 애정과 희락은 전염성이 있었다.

만약 이곳이 실내였다면 구두까지 벗어 던졌을 텐데, 아쉽게도 흙이 가득한 풀밭에서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게 현명했다.

소녀와 소년은 빙글 돌고, 폴짝 뛰고, 서로 잡아당겼다가 밀어내기도 하며 시시덕거렸다.

어쩌면 이게 훨씬 그들의 나이다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년과 소녀는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아직 작은 일들에도 설레는 그런 어린아이들.

사랑도 설렘도 금지당해 외롭게 말라 가던 아이들이, 천덕꾸러기 공주와 사생아 소년이, 그날 서로 덕에 구원받았다.

지난 생에도 그러했다.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첼루나는 더위와 기쁨으로 붉게 달아오른 데아론을 보며 한 가지 분명한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이번 생에도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이 삶과 지난 삶의 궤적이 바뀌더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절대.

“데아론.”

“네?”

첼루나가 부르자 데아론이 반응했다. 그는 첼루나를 보며 천진하게 웃었다. 첼루나도 빙그레 마주 웃었다.

“그냥 불러 봤어.”

사랑해. 사랑해, 데아론. 그녀는 속으로만 고백한 뒤, 슬픔을 미소로 지워 버렸다.

그들은 새벽까지 함께했다.

* * *

데아론, 너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어?

글쎄.

나는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어.

나도 마찬가지야.

* * *

달밤이 저물고 아침이 밝아 오면 달빛 아래 가능했던 모든 마법은 새벽에 밀려나 묽어진다.

첼루나는 밤하늘의 동쪽 끄트머리가 점점 희끄무레한 빛을 머금는 걸 보고 제게 주어진 단꿈의 순간이 거의 끝났음을 직감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시선을 좇았고, 그 끝에 놓인 희멀건 서광을 보고 그녀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춤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제 돌아가셔야 하죠?”

그리고 이번에 당신이 돌아서면, 아마 나는 다시는 당신을 보지 못하겠지.

물론 그가 공주를 다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멀리서만. 형식적으로.

그의 가문이 황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스치듯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의 딸과 귀족의 아들로.

그러나 그뿐이었다. 예법과 서열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두 사람은 지난밤처럼 자유롭게 땀 흘리며 미소와 폭소를 교환하지 못할 것이다.

하룻밤의 단꿈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아는데. 충분함을 넘어 과분하다는 것마저 아는데.

데아론은 지독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를 잃은 이후 느껴 본 유일한 행복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응, 돌아가야 해.”

첼루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달궈진 쇠꼬챙이에 명치끝을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첼루나는 자기 자신에게 한 약속을 어겼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그를 멀리하기로 했지. 그래서 아까 무도회 시작 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일부러 외면했었다.

또한, 첼루나는 이번 생에는 언니를 위한 첩자가 되기로 다짐했다. 그 포부를 밝히고자 지난밤 언니에게 찾아가기로 결심했거늘, 밤새 풀밭에서 데아론과 함께하느라 그 기회를 놓쳤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냉정을 유지하는 데 실패한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녀는 충동과 진심에 떠밀려 합리적으로 최상의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첼루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 없었다. 지난밤 그녀는 행복했으므로. 무엇보다, 데아론이 행복했으므로. 자기 앞에서 그 아이는 몇 번이고 웃었다.

이제 데아론은 비참해 보였다. 이별을 예감한 그는 제비꽃색 눈에 넘실대는 설움을 감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번 생에 아직 열일곱 살 어린애인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훨씬 서툴렀다.

정신적으로 그보다 한참 연상인 첼루나는 표정을 꾸미는 데 훨씬 능숙해야 마땅했다. 실제로 첼루나는 그보다 더 선수였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앞으론 그대와 이렇게 단둘이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이 그 예외였다. 데아론 앞에서 연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른 모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데아론 앞에서 첼루나는 투명한 거울 같았다.

“절대 그대가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황궁에 살고, 또…….”

회귀를 통해 얻은 모든 이점도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남들보다 10년을 더 살았다는 점을 이용해 교활하고 능숙하게 지내 왔으나, 지난 4년간의 거짓이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해합니다. 정말이에요, 공주님.”

데아론은 서글프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이 순간에도 참 착하고 다정한 소년이었다.

그는 공주의 장갑 낀 손에 정중히 입을 맞췄다. 이 정도 욕심은 그냥 황족을 향한 예절로 둘러댈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 어울려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데아론은 첼루나가 그저 착해서, 또한 그에게 호의 어린 호기심을 느껴서 하룻밤쯤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라고 슬프게 오해했다.

현재 첼루나의 심중에 들끓는 뜨겁고 애달픈 사랑을 데아론은 알 길이 없었다.

고작 오늘 두 번째로 만난 공주가 제게 단순 호감 이상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이분은 다정하시니까, 테라스에 혼자 숨어 있던 내가 불쌍해서 나와 함께 있어 주신 거야. 데아론은 침통하게 넘겨짚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착각을 얼추 짐작했다. 지난 생에 무려 6년간 연인이었던 그녀는 그의 사소한 눈빛만으로도 의중을 파악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데아론이 다시 자격지심에 휩싸여 공주의 하룻밤 일탈을 그저 친절한 성격 탓으로 돌리는 걸 추측하고, 첼루나는 분통이 터져 그에게 소리칠 뻔했다.

‘아니야, 이 바보야.’

착하긴 누가 착해. 친절하긴 누가 친절해? 그건 너잖아, 이 바보야.

전생에도 첼루나는 데아론에게만 친절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정한 데아론과 달리 첼루나는 제게 상냥한 자에게만 선행으로 갚아 주는, 연인과는 많이 다른 의미로 공평한 사람이었다.

이번 생에는 첼루나의 태도 변화로 인해 그녀에게 상냥한 사람이 하나둘 늘어났기에, 친절함이 닿는 범위도 조금씩 늘어났다.

예컨대, 그녀의 충실한 수족이 된 시녀 엘리나와 그녀의 친구처럼 변한 아델라 프란체스 등.

이번 생에는 그들도 첼루나가 아끼는 사람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첼루나의 본성은 똑같았다.

제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못되게 굴 정도로 편협하고 냉혹한 작자는 아니지만, 원수까지 포용할 정도의 그릇은 아닌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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