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14)

“전하, 감히 황족에 대해 무례하게 말하는 걸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첼루나 공주님은 전하께서 연민하실 필요가 없는 자입니다.”

모리안은 나지막이 간언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공주가 포악하든 상냥하든, 천대를 받든 예쁨을 받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공주는 블레논 황자의 동복동생이었고 그뿐이었다.

“흐음, 그래?”

텔레스는 모호하게 대꾸했다. 이에 모리안이 또 무어라 말하기 전, 그녀는 문득 창턱에서 가뿐히 내려와 그를 명랑하게 마주했다.

“그럼 이제 춤이나 출까?”

“예?”

“여기 너무 오래 있었잖아. 슬슬 우리가 없어졌다는 걸 눈치챘을걸.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선 안 되지.”

그토록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과 함께, 텔레스는 해처럼 방긋 웃으며 모리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면인지 진심인지 모를 듯한 태도로.

“모리안 텔로아, 내게 춤을 신청하겠어?”

가면이든 진심이든 어차피 상관없었다. 주군의 뜻과 언행을 낱낱이 가늠하고 분석하는 건 충신의 태도가 아니었다.

충신 모리안은 그저, 황녀가 내민 우아한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기꺼이.”

황녀는 내리 웃었다. 손을 맞잡은 남자와 함께 무대로 나아갈 때까지.

첼루나가 여느 황족과 다른 점은, 그녀가 과거 워낙 방치되어 살았기에 황궁을 혼자 돌아다니는 재주가 꽤 뛰어나다는 거였다.

그녀는 보통 궁인들이 사용하는 지름길과 은신처, 심지어 개구멍까지 꿰고 있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동하고 싶을 때면 첼루나는 서슴없이 그런 개구멍을 통과하기도 했다.

만약 그녀가 호위병과 시녀에게 둘러싸인 보통의 황족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 외롭게 버려졌던 천덕꾸러기 공주는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 자유로웠다.

회귀 이후 첼루나는 혼자 담을 넘고 개구멍을 통과하는 기행을 벌인 적 없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은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그녀는 능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여기만 넘어가면 돼.”

소녀가 소년에게 쾌활하게 손짓했다. 그새 그들은 황제궁과 별궁 중간 어디쯤 낡은 담벼락까지 도달한 뒤였다.

어느덧 저도 모르게 공주와 단둘이 돌아다니는 게 익숙해진 데아론은 주저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데아론은 먼저 날렵하게 담을 넘었다. 열다섯 살 때까지 들판에서 뛰놀고 강물에서 수영하던 평민 출신 소년에겐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님, 넘어오세요.”

데아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첼루나는 씩 웃으며 치렁치렁한 치마를 살짝 걷은 뒤, 본인도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월담했다.

옛날로 돌아온 듯한 기분에 아련한 향수가 그녀를 덮쳤다. 괴로운 옛날이 아닌, 연인과 함께하여 행복한 옛날이었다.

방치되어 외로웠던 만큼 자유롭던 공주와, 평민 시절의 자유분방함이 남아 있는 후작의 사생아.

전생에도 그들은 예법과 상관없이 가끔 이런 유치한 일탈을 즐기곤 했다.

짧고 애틋한, 그래서 더욱 소중한 단꿈. 그토록 꿈같던 시간이 이번 생에 역시 같으면서도 다른 형태로 반복되고 있었다.

“공주님, 괜찮으시겠어요?”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래쪽 어둠 속에서 데아론의 초조한 물음이 들렸다. 첼루나는 다소 위태롭게 담을 넘는 와중에도 자신 있게 대답했다.

데뷔 무도회를 위해 특별히 차려입은 드레스는 평소 복장보다도 훨씬 치렁치렁하고 미끈거렸다.

전생에는 이 옷을 입고 담을 넘어 본 적 없는 첼루나는 속으로 욕했다.

“윽……!”

“공주님!”

데아론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 첼루나의 발이 미처 땅바닥에 닿기 전, 그녀의 몸이 풀썩 기울었다. 첼루나는 놀라서 신음했고 데아론은 곧장 달려갔다.

데아론이 첼루나를 양팔로 받았다. 본인은 휘청대지도 않고 견고하게.

소녀는 졸지에 소년의 품에 폭 안긴 모양이 되어 버렸다. 숨결이 서로 맞닿았다.

“아.”

데아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자그마한 동작이 제 뺨을 간지럽혀, 첼루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첼루나의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에서는 달큼한 향기가 풍겼고, 저를 가볍게 누르는 말랑한 몸은 몹시 따스했다.

부드러운 굴곡이 옷 너머로 전해지자 데아론의 뺨은 확 달아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데아론은 말을 더듬으며 첼루나를 밀어냈다. 명백한 실수였다. 소년과 비슷한 이유로 어지러워하던 소녀는 소년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으악?!”

“공……!”

첼루나가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함께 철퍼덕 자빠지는 순간, 데아론은 자신이 공주를 밀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서둘러 팔을 뻗었다.

그 결과, 첼루나는 땅에 쓰러졌고, 데아론은 그녀 위로 아슬아슬하게 엎어졌다.

“……!”

야릇한 자세였다. 첼루나는 풀밭에 누워 있었고 데아론은 그녀의 머리 옆을 손으로 짚은 채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소녀를 덮친 모양이 되어 버린 이 상황에 둘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와 달빛, 산들바람이 서걱서걱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데아론은 역시나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몸이 얼어 버린 듯했다. 달아오른 심장만 거칠게 쿵, 쿵, 뛰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을 올려다보았다. 주위의 어둠을 머금어 검게 변한 제비꽃색 눈이 그녀의 금빛 눈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욕심내면 어떻게 될까. 미친 척 약속을 잊고, 회귀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손을 뻗어 네 뺨을 감싸고 입술을 포갠다면.

첼루나는 간신히 인내했다. 사랑은 충동을 불렀지만 또한 자제를 부르기도 했다. 사랑했기에 끌리면서도 사랑했기에 억눌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본인의 과욕 따위 서슴없이 짓밟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감을 수 있었다.

“데아론, 좀 일어나 줄래?”

“……네, 공주님.”

첼루나가 최대한 침착하게 요청하자 데아론은 짓눌린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에 그는 사과하지 않았다. 무례를 범했으니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웬 영문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공주 위로 쓰러져 그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으므로.

데아론이 먼저 일어났다. 그는 말없이 공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첼루나는 그 크고 따뜻한 손을 맞잡은 채 일어섰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 마주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응.”

첼루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데아론도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첼루나는 데아론의 온기를 떼어 냈다. 데아론은 지독한 아쉬움을 삼켰다.

“여기 예쁘지?”

첼루나는 데아론을 반쯤 등지며 자신들을 둘러싼 고요한 풀밭을 가리켰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개구리가 달빛을 받으며 울었다.

“황궁에는 이렇게 버려진 곳이 많아. 옛날에는 누군가의 처소였다가 이제 더는 쓰이지 않는 곳들. 세대마다 태어나는 황족의 수는 다르니까.”

과거에는 어떤 황녀가 썼다가, 언젠가는 어느 황자가 살고. 때로는 손님이 머물렀고, 때로는 그저 박물관처럼 사용되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현재 머무는 궁도 이렇게 방치됐을 거야. 지금이야 그나마 주인이 있어서 사람 사는 곳처럼 가꿔지지만.”

첼루나는 씁쓸하게 설명했다. 오빠와 언니의 처소보다 훨씬 작고 볼품없으며 구석진 곳에 자리한 별궁. 그곳이 지금 공주궁으로 불렸다.

“그건.”

데아론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잔인하다고, 너무하다고,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그딴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첼루나는 처연하게 웃었고 데아론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 어여뻐서, 너무 서러워서. 첼루나의 그 미소가 그의 가슴을 저몄다.

“우리 여기서 춤출래, 데아론?”

첼루나가 속삭였다. 현재 그녀의 아련한 표정은 전혀 연기가 아니었다.

남들에게 하듯 가련한 연출로 상대방의 동정과 환심을 사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서글펐다.

“여기가 무도회장은 아니지만 우리 데뷔 무도회는 맞잖아.”

데아론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예나 지금이나 그가 너무 많이 고통받았다는 사실이 비통했다.

오늘 밤이 그저 꿈같은 일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구슬펐다.

이번 생에 첼루나는 데아론을 멀리해야 했다. 지금은 진심에 떠밀려 약속을 깼지만 당장 내일부터는 다시 거리를 둬야 하리라.

그러니까 이 순간만큼은 행복한 꿈으로 남겨 두자. 부디 이번 생에도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쯤은 만들자.

나중에 네가 다른 이의 연인이 되고 어쩌면 남편이 되어 내가 모르는 아늑한 행복을 누릴 때에, 내가 치졸하게 원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버틸 수 있도록.

“영광입니다.”

데아론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어, 첼루나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귀족보다 평민으로 산 나날이 더 많은 소년이지만 후작가에서 살게 된 이후 기본적인 건 익혔다. 예컨대, 사교춤 같은.

한쪽 손은 맞잡은 채 나머지 손은 공주의 허리에 조심스레 올렸고, 소녀는 역으로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세가 완성되었다.

두 사람은 빙글빙글 돌았다. 나풀나풀, 자박자박, 음악도 없이. 그러나 풀벌레와 개구리가 웬만한 성가대보다도 우렁찼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랄랄라.”

그래도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언제든 본인이 채우면 그만이었다.

첼루나가 흥얼대기 시작하자 데아론은 샘물처럼 웃었다. 아름답고 맑은 희소였다.

첼루나도 쌩긋 웃었다. 희열과 향수가 그녀를 휘감았다. 전생에도 그들은 이렇게 춤췄다. 풀밭에서 초라하게, 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무도회장의 제대로 된 조명 밑에서는 멸시받는 그들이지만, 온 세상을 은빛으로 표백하는 달 아래서는 그들을 짓밟을 자가 없었다.

구두에 진흙이 묻고 치마폭에 풀물이 들어 나중에 난리가 나겠지만 첼루나는 그런 현실적인 염려를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오롯이 연인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첫사랑, 마지막 사랑, 옛날에도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에게.

데아론도 그녀를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가락을 흥얼거리느라 부드럽게 오므린 공주의 입술을 보며 살짝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이 순간을 만끽했다.

보랏빛 눈과 황금색 눈이 따스하게 얽혔다. 그러다 순간, 데아론은 다소 제멋대로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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