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아닌 모리안이 보기에도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이었고 잔혹했다.
일단 책임지겠답시고 저택에 데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실제로 수많은 양심 없는 귀족이 실컷 씨만 뿌려 놓고 혼외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고려했을 때, 텔로아 후작의 행동은 거의 성인군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책임지는 게 양육의 전부는 아니다. 어린아이의 필요는 단순히 호화로운 집과 따뜻한 음식, 깨끗한 의복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조차 받지 못해 추운 곳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귀족의 아들로서 의식주를 보장받은 데아론의 고독은 배부른 불평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비를 향한 원망과 후작가 전체를 향한 증오가 불쑥불쑥 치밀 때마다, 그 착한 소년은 자신이 과분한 은혜를 받았다고 되뇌며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그를 거두지 않았다면 그는 가련한 평민 고아가 되어 가난에 떨어질 뻔했다. 아버지가 구해 주셨으니 나는 그분께 늘 감사해야 해. 그래, 그래야지.
그러나 곁에서 지켜보는 모리안은 알았다. 단순히 지낼 곳과 먹을 것이 있다 해서 사람이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다.
만약 사람의 행복이 그런 것들로만 이뤄졌다면 지금 모리안의 기분이 이렇게 더럽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전하, 혹시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 애한테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라 싫다는 티도 못 낼 것 아닙니까.”
이복동생을 향한 모리안의 심정은 복잡했다.
가여워서 잘해 주고 싶다. 그런데 그러기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사생아여도 동생은 동생이니 형으로서 챙겨 주고 싶은데, 자기가 다가가면 그 애가 오히려 부담스러워할까 봐 이도 저도 못 하는 꼴이었다.
자신의 무뚝뚝한 태도가 문제라는 생각도 해 봤지만, 사람의 성격이란 게 맘먹는다 해서 하루아침에 휙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형이 어색하게 다가갈 때마다 동생은 화들짝 놀라며 그만큼 물러났다. 데아론이 자기 분수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자기 태생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일의 결실이니 감히 애정 같은 걸 구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는 소년의 자세가 장벽에 장벽을 더했다.
그래, 예나 지금이나 모리안은 참 모호한 방관자였다. 가해자만큼이나 잔인한.
“흐음.”
텔레스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며 모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모리안은 그 시선이 불편해서 은근슬쩍 눈을 피했다.
“모리안 너, 동생을 아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해괴한 평이었다. 동생을 아끼는 게 아니라, 아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목적만 있지 실속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동생을 생각하면서 왜 본인한테는 표현을 안 하는지 몰라. 그 애랑 제대로 된 대화 같은 걸 해 본 적 있니? 시도라도 해 봤어?”
“……제가 그 애랑 제대로 대화해 본 적 없다고 어떻게 확언하십니까?”
“뻔하지, 뭐. 오늘 무도회장에 들고 나서 너랑 네 동생이 한마디라도 나눈 적 있어? 없잖아. 평소에 둘이 대화하는 사이였으면 그랬겠냐고.”
모리안은 저 분석이 불편했다. 자신과 동생의 서먹한 사이를 정확히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로 텔레스 황녀가 자신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서.
“모리안, 아까도 말했지만 네 동생과 나는 언젠가 가족이 될 사이야. 좋든 싫든 나는 데아론 텔로아도 가까이 둬야 해. 그런데 다른 텔로아 사람들이 걔만 쏙 골라서 망가진 가구쯤으로만 취급하면 중간에 낀 내가 뭐가 돼, 응? 내가 네 집안 눈치까지 일일이 보면서 움직여야겠어?”
텔레스 황녀는 텔로아 후작가를 자기 시가로 선택했다. 자기 외가와 긴밀했을뿐더러, 정치적으로 유능하여 여러모로 유용한 패였다.
텔로아 후작이 데아론 텔로아를 자기 아들로 인정하고 집에 들인 이상, 그 소년도 유용한 패의 엄연한 일부였다.
텔레스는 자신이 조력자로 선택한 가문에 그 어떤 작은 흠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데아론 텔로아는 분명 흠이었다. 소년 자체보다는 소년을 대하는 가문의 태도가.
텔레스는 데아론 본인에 관한 판단을 일단 보류했다. 아직 제대로 대화해 보지도 않은 사람에 대해 그 무엇도 섣불리 넘겨짚고 싶지 않았다.
황녀는 사교계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반쪽짜리 사생아를 멋대로 경멸하지도, 그렇다고 무턱대고 연민하지도 않았다.
그 정도 냉정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 기어코 권좌를 거머쥐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떠나서 본인 말마따나 황녀는 좋든 싫든 그 소년과 엮여야 했다.
이미 자기 시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소년이 본인 데뷔 무도회 내내 다른 사람들 눈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모습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텔로아 후작께 나 대신 전해 줘, 모리안. 과보호든 학대든 어서 그만두라고. 내게 대놓고 콩가루 집안으로 소문난 시가를 결혼 선물로 바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모리안은 황녀의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얼굴을 붉혔다. 학대. 큰아들에게는 과보호였고 작은아들에게는 학대였다.
“그리고 후작 부인께도 전해 줘.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고 이해하지 않을 자격도 없지만, 나와 인척으로 엮일 각오를 마친 이상 네 동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어머니가 언급되자 모리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가느다란 심호흡 끝에 억지로 입술을 열었다.
“제 어머니는.”
“아마 네 동생을 죽여 버리고 싶겠지.”
텔레스는 다시 말을 받았다. 그녀는 예비 약혼자의 숲 같은 녹색 눈을 자신의 보석처럼 파란 눈으로 직시했다.
“나는 본인이 아니니 완벽하게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곁에서 지켜봤으니 잘 알아.”
역겨운 종자들. 황후의 냉담한 품평이 귓가에 맴돌았다.
감히 네 발끝에도 닿지 못할 하찮은 핏줄이란다.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승리할 거야, 나의 딸.
“게다가 네 어머니는 네 아버지를 사랑하잖아. 아니야?”
황후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았음에도 황비에게 분노했다. 고귀한 귀족 영애의 빳빳한 자존심, 또한 자기 입지에 대한 불안 때문에.
텔레스가 보기에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정말로 불행했다.
그나마 그분이 황제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까. 그분이 받은 상처는 그저 자존심과 정략의 문제에 불과해서.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남편이 어느 날 밖에서 낳은 자식이랍시고 아들을 한 명 데려온다면 무슨 느낌일까.
“사적으로는 유감이다. 집에서까지 네 어머니가 혼외자에게 잘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다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노골적인 배척을 자제해 줘.”
텔레스는 자기가 결코 선하고 고결한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추악하고 잔인한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데아론 텔로아 개인의 행복은 상관없었다. 소년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학대당하고 무시당해도 자기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교계와 대중 앞에서 데아론 텔로아는 텔레스 황녀의 부끄럽지 않은 인척이어야 했다.
황녀와 엮여 언급되는 이름이 결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어서는 아니 된다. 텔레스는 순전히 자신을 위해 데아론의 평판을 보호하길 원했다.
내가 이렇게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이라 오라비와 권좌를 두고 다툴 여지가 있는 거다. 그 자리는 결코, 선하고 깨끗한 자와는 어울리지 않거든.
텔레스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절대 선하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모리안 텔로아는, 엄숙하게 복종했다.
“너도 네 동생 좀 더 잘 챙겨 줘, 모리안. 나중에 내가 등용하고 싶어.”
텔레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미 생각해 둔 바를 단정하게 덧붙였다.
“그 아이를 내 기사로 삼을까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해?”
“기사요?”
모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텔레스는 담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름을 쌓기에 가장 무난한 방법이잖아.”
실제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수많은 평민 소년들과 하급 귀족 자제들에게 황궁 기사단에 입적되는 건 최고의 목표였다.
데아론의 경우, 엄연한 후작의 아들이니 신분 상승을 논하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출생을 생각했을 때 법이나 정치를 배워 황실의 가신으로 입궁하기보다는 기사 자리를 노리는 게 더 유리했다.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고 국정을 돕는 가신의 자리는 이미 유능하고 오만한 고위 귀족들이 전부 꿰차고 있었다. 그 분야에서 명성을 쌓는 건 훨씬 어려우리라.
“네, 그렇지요. 만약 재능만 있다면.”
모리안은 회의적으로 대꾸했다.
그래, 반쪽짜리 사생아가 이제 와서 법이나 정치를 공부하는 것보다는 검술을 배우는 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에게 그럴 만한 재능이 있다면.
“네 동생은 여태 검을 배운 적 없어?”
“있겠습니까?”
모리안이 중얼댔다. 다소 불손한 말투였지만 텔레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럼 네가 한번 확인해 봐.”
모리안은 숙고했다. 데아론 텔로아, 황녀 전하의 기사라. 확실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반쪽짜리 사생아로 남겨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서도 텔레스는 지금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의 인척이 될 소년이 데뷔 무도회에서 제대로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이 못마땅했고, 이를 타개할 해결책으로 기사의 길을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전생의 데아론은 황녀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그 은혜조차 결국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시혜에 불과했다.
기사로서 재능을 인정받고 나서도 데아론은 늘 외로웠다.
과거에 데아론은 죽는 날까지 고통받았다. 가족의 애정을 향한 채울 수 없는 갈증에 매여.
전생에 그가 첼루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고 믿었던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의 삭막한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빛이었으므로.
“분부대로.”
모리안은 끝내 약속했다. 황녀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관심을 보인 한, 그가 더는 동생을 방치할 권한은 없었다.
텔레스는 모리안의 다소 뚱한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녀가 마침내 부드럽게 중얼댔다.
“나는 말이야, 목숨 걸고 경쟁하지 않아도 될 피붙이가 있었으면 정말 잘해 줬을 텐데.”
모리안은 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텔레스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모리안의 동생한테서, 본인의 혈육에게로.
나의 이복동생, 첼루나 포렌타인. 4년 전까지만 해도 성격이 포악하고 품위가 없다고 악명이 자자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최근에 텔레스가 관찰한 첼루나는 옛날과 퍽 달라 보였다.
“불쌍해라.”
“네?”
“그냥, 우리 동생들이.”
텔레스는 솔직하게 속삭였다. 모리안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제 동생이야 방금까지만 해도 저들의 주된 화제였으나 그렇다 치고, 첼루나 공주가 여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