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14)

둘 다 흠칫했다. 소녀와 소년은 발소리가 나는 쪽을 빠끔히 돌아보았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과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데아론이 중얼댔다. 첼루나는 흠칫했다.

아, 맞다. 전생에도 데아론은 맑고 선한 인상과 다르게 가끔 몹시 걸쭉한 욕으로 참신한 부조화를 연출하곤 했다.

데아론이 손을 뻗었다. 그가 첼루나의 손을 덥석 감쌌다. 이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꼭 잡고 테라스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로 가면 무도회장과 너무 멀어진다고 첼루나는 알려 주고 싶었다. 나는 어서 무도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집해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첼루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나란히 움직였다. 빠르게, 조용하게, 손을 맞잡고.

“이쪽으로.”

중간에 첼루나가 무심코 말했다. 이제는 그녀가 앞장서는 쪽이었다.

첼루나는 소년의 따뜻한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야회용 장갑 때문에 맨살이 닿지 않는 게 아쉬웠다.

첼루나는 모퉁이를 돌았다. 전생에 23년, 회귀 이후 4년을 살았으니 황궁 지리쯤이야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녀는 금세 건물을 빠져나왔다. 고요한 후원이었다.

“엇.”

데아론은 그제야 자신이 소녀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화들짝 놀라며 손을 물렸다.

“이 정도면 됐지?”

“네?”

“누가 우리 둘이 같이 있는 걸 보는 게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첼루나는 비난도 비꼼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추측했다.

아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불현듯 욕하며 무작정 도망친 건 말 그대로 회피였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습관과 생각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웬 어둡고 으슥한 곳에 여자와 단둘이 있는 모습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기야 누가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겠느냐만, 데아론은 사교계에 데뷔할 무렵부터 그런 일에 유독 예민했다.

아무리 평민의 문화가 귀족의 것보다 훨씬 자유롭고 느슨하다 해도 기본적인 감상은 비슷한 법이다.

남녀 둘이 어둠 속에 맞붙어 있는 게 보통 무슨 뜻으로 해석되는지는 귀족이라서 아는 게 아니었다.

만약 데아론이 더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그저 조금 놀림당하고 끝날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상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고, 그가 겁내는 건 가벼운 희롱이 아니라 지독한 추문이었다.

손가락질과 수군댐의 대상이 되는 건 이제 지긋지긋했다. 무도회의 어둠 속에서 여자애와 놀아났다는 비아냥까지 더해지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애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딸이라면.

데아론은 여러모로 그 끝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을 위해서도, 공주를 위해서도.

“……네.”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우스워서 데아론은 자그맣게 대답했다.

그는 아까 공주와 맞닿았던 손끝을 괜히 한 번 꼼지락거렸다. 새삼스레 열이 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가 서둘러 덧붙였다.

아무리 남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 무작정 움직였다 한들 공주까지 끌고 도망치다니, 끌려가는 쪽에서는 퍽 불쾌했을 거다.

“아니야.”

하지만, 물론, 정작 상대방은 불쾌하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무례하지 않았어.”

첼루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원망했다.

어두운 후원에 데아론과 단둘이 남겨졌다는 사실에 남몰래 설레는 이 마음이 싫었다.

마치 자신들이 밀회를 나누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연인을 돌려받은 기분이라서, 첼루나는 감정이 북받쳤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딴 향수에 젖으면 안 되는데. 이번 생에는 데아론을 멀리해야 하는데.

하지만 부질없이, 심장은 아릿하게 진동했다.

“내친김에 내가 후원 구경 좀 시켜 줄까?”

“네?”

첼루나의 충동적인 제안에 데아론은 눈을 홉떴다.

첼루나는 본인의 발언에 경악하며, 그러나 멈출 의지 없이, 즐겁게 부연했다.

“어차피 그대, 무도회로 돌아가기 싫잖아.”

나중에 데아론이 황녀의 기사가 되어 평판이 조금이나마 나아졌을 때라면 모를까, 전생 이맘때 데아론은 무도회를 비롯한 온갖 사교 모임을 싫어했다.

데아론이 수줍음이 많거나 반사회적 성향이 커서는 절대 아니었다. 사실 그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사람들과 잘만 어울리는 유쾌한 아이였다.

그런 그를 이토록 어둡고 외로운 곳으로 내몬 사교계의 잔인한 귀족들을 첼루나는 깊이 증오했다.

하지만 괜찮아. 적어도 오늘은 내가 이 아이와 함께할 테니까.

“나도 별로 들어가기 싫거든.”

첼루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그녀의 경우, 남들의 비웃는 시선만큼이나 모임들 자체가 껄끄러운 편이었다.

원한다면 충분히 눈웃음과 가면을 쓰고 위화감 없이 무리에 섞일 수 있었지만 기실 첼루나는 시끌벅적함보다는 고즈넉함을, 사교보다는 사색을 선호했다.

정말 소중한 소수와 도란도란 단란하게 얘기하거나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는 게 그녀의 성미에 더 맞았다.

지금 그녀가 정말 전략적으로만 생각했다면, 당장 무도회장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계획대로 텔레스 황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첼루나는 데아론과 함께 있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충동적이고 무모했지만 이게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회귀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실은 회귀 전부터 그녀를 움직인 가장 강력한 동기였다.

“내가 황궁 구경을 시켜 줄게. 오늘 밤만은 나를 그대의 안내자로 여기게.”

오늘 밤만, 오늘 밤만이라도. 그 이상은 이어질 수 없음을 첼루나도 잘 알았다. 그리고 데아론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녀와 조금 다른 이유이긴 했지만.

“……감사합니다, 공주님.”

하룻밤의 꿈같은 일탈이었다. 남들의 시선도, 황실의 예법도 벗어던지고 단둘이 밤하늘 아래를 누비는 건.

데아론은 어째서 오늘 겨우 두 번째로 만난 공주가 제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이분께 초면부터 반말을 지껄였는데.

어쩌면 공주님이 너무 착하셔서 그런 거라고, 아니면 심심했을 뿐이라고, 데아론은 첼루나가 알았다면 어이없어했을 여러 추론을 머릿속에 나열했다.

또한, 데아론은 첼루나가 외로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께는 사랑받지 못했다는 비운의 막내.

과분하다고 생각해서 애써 참고 있던 동질감과 연민이 다시 울컥 차올랐다.

데아론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조금 더 힘주어 또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데아론의 천성은 역시나 다정했다.

만약 막내 공주가 정말로 후작의 사생아 따위에게 관심을 보일 정도로 외로움을 타는 거라면, 그는 그런 그녀에게 도움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유대가 지속될 수 없음을 데아론은 알았다.

오늘은 하룻밤 어울려 드린다 해도 앞으로는 자기가 원한다 한들 감히 황족에게 닿을 수 없으리라.

하룻밤의 행운을 그는 기꺼이 붙잡았다. 혼자 무도회장 테라스에 숨어 밤새도록 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첼루나가 속삭였다. 이어,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손을 뻗었다.

첼루나가 자신의 손을 감싸자 데아론은 명치끝이 찌르르 울렸다.

각자 야회용 장갑에 가로막혀 맨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손목까지 어쩐지 뜨끈뜨끈했다.

첼루나는 앞장섰다. 데아론은 이끌렸다. 소녀와 소년은 함께 달빛 아래를 내디뎠다.

그 순간만큼은, 둘 다 자유로웠다.

텔레스와 모리안은 무도회장에 함께 있었다. 그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거의 밤새도록 춤추고 얘기하고 남들에게 웃어 준 끝에 텔레스 황녀는 자신이 조금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무도회장 구석에 자리한 두툼한 벨벳 휘장 뒤에 숨었다. 휘장 뒤에는 사람이 앉을 만큼 넓은 창턱이 있었고, 휘장의 두꺼운 재질은 소음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텔레스는 구두를 벗어 벽에 가지런히 기대 놓은 뒤 창턱에 날렵하게 걸터앉았다. 모리안은 벽에 기대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모리안이 담담하게 권하자 텔레스는 고개를 짧게 저었다. 그녀는 문득 모리안을 유심히 보더니 대뜸 말했다.

“네 동생이 안 보이던데.”

그 당연한 지적에 모리안은 눈에 띄게 굳었다. 텔레스는 작게 코웃음 쳤다.

“설마 끝까지 숨겨 두려고 했던 건 아니지?”

모리안은 침묵했다. 데아론을 숨겨 두려고 했다기보다는 치워 버리려고 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아비 텔로아 후작이 차남의 은폐를 원했다.

“그렇게 꽁꽁 감춰 놓지만 말고 나한테도 소개해 줬으면 좋겠는데.”

“……왜요?”

“왜긴 왜야? 네 동생이잖아. 만나 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언젠가 가족이 될 사이인데.”

텔레스의 단언에 모리안은 황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마침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와 전하의 약혼은 아직 확정되지—”

“확정되지 않았지만, 사실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지.”

모리안의 나직한 반박을 텔레스는 도중에 가로채 태연하게 끝맺었다.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나는 너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 없어, 모리안.”

얼핏 들으면 굉장히 낭만적인 고백 같았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정치적인 선언임을 둘 다 잘만 알았다.

적어도, 모리안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텔레스는 모리안이 그렇게 믿고 싶다는 걸 알았고, 슬픈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원래 화제로 돌아가서. 네 동생.”

텔레스는 말을 이었다. 모리안은 다시 경직했다. 그의 동생, 데아론 텔로아. 항상 모리안에게는 까다로운 주제였다.

“아까 폐하께 인사 올릴 때 보기는 봤어. 너랑 많이 닮았더라.”

모리안은 이제 뺨을 맞은 표정이 되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그가 악물린 잇새로 힘겹게 청했다.

“저랑 그 애랑 닮았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 애가 싫어합니다.”

그나마 텔레스가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저런 망발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텔레스가 예쁜 눈썹을 가늘게 치켰다.

“그 애가 싫어하는 거 맞아? 네가 싫어하는 거 아니고?”

“농담하지 마십시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지금 네 표정만 보면 딱 그래. 싫어서 돌아 버리겠다는 표정인데.”

“싫은 게 아니라…….”

싫은 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런 위선적인 감상을 곧이곧대로 털어놓는 대신 모리안은 뚝뚝하게 부연했다.

“그 애는 저랑 닮았다는 말을 듣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그 애가 저를 닮은 이유가 우리 둘이 피가 섞여서인데. 그 피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미안하다는 감정은 결국 위선이었다. 모리안은 제 안쓰러운 동생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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