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14)

이제라도 데아론이 자신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거나 명백하게 불편한 티를 내 준다면 첼루나는 의지를 다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데아론의 눈빛은 한결같이 다정했다.

여전히 다소 이상한 생물체 보듯이 행동하는 감은 없잖아 있었으나, 그조차 경멸보다는 보호 본능에 가까웠다.

‘보호 본능이라니.’

첼루나는 내적으로 탄식했다.

이 착해 빠진 아이는 자신을 무슨 정신이 불안정한 연약한 환자로 여기는 듯했다. 조금 엉뚱하긴 하지만 뼛속까지 무해한.

확실히 오늘 데아론이 본 첼루나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대놓고 무시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런 구석진 곳까지 쫓아와 헛소리나 늘어놓았으니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차라리 불쾌하거나 불편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데아론의 눈빛에는 호의와 흥미가 공존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데아론은 즐겁게 생각했다. 그의 내적 반문은 절대 나쁜 뜻이 아니었다.

그는 첼루나의 불가사의한 행동이 최근에 겪은 모든 일 중에 가장 신선하고 반가웠다.

‘황족이면서.’

다른 누구도 아닌 황족이면서, 대체 뭐가 아쉬워 후작의 사생아 아들을 찾아 이런 후미진 곳까지 들어오셨나.

게다가 그가 다쳤던 날을 언급하며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물어보는 거 보니,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잊지 않았을뿐더러 공주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 걱정. 그리고 아까 모른 척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데아론은 첼루나의 괴로워하는 낯빛에서 그런 감정들을 읽어 냈다.

딱 거기까지였다. 걱정과 죄책감, 그 이상의 짙고 깊은 감정은 데아론의 이해 밖이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눈앞의 소녀가 무슨 기억을 품고 있는지.

눈앞의 공주가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을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열일곱 살 데아론은 당연히 몰랐다.

“아까는,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었어.”

첼루나는 대뜸 고백했다.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녀의 입술은 진심을 핑계 삼아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냥 그대를 보고 깜짝 놀라서 시선을 피한 거야.”

그녀는 무작정 말을 지어냈다. 이제는 자신이 내뱉는 게 헛소리인지 진실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대가, 어, 귀족일 줄은 몰랐거든.”

으아악, 그만해! 그녀의 이성이 절규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진심은 데아론에게 악착같이 매달렸다. 첼루나는 기어코 덧붙였다.

“그대가 그때 나한테 말을 낮춰서, 평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데아론이 얼굴을 확 붉혔다. 첼루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홍조를 머금은 소년의 앳된 얼굴은 너무, 너무 예뻤다.

“그때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공주님.”

데아론은 바닥을 보며 웅얼거렸다. 겁도 없이 황족에게 반말을 지껄이던 과거 모습을 회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대방의 격한 수치심을 보고 첼루나는 역으로 당황했다. 애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첼루나는 급히 해명했다.

“아니, 아니야! 사과를 받아 내려고 한 거 아니야. 정말로 괜찮아, 진짜로.”

첼루나는 파닥파닥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자신의 경박한 몸짓이 부끄러워 서둘러 손을 말아 쥐었다.

‘으윽, 바보.’

첼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아론 앞에서 어설프게 허둥대는 것도, 그 어설픔을 창피해하는 것도 전부 스스로 한심했다.

얘 앞에서 좀 바보처럼 보이면 어때? 데아론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 잘 보이는 건 위험했다.

헛소리를 지껄이고, 말을 더듬고, 바보처럼 손을 펄럭펄럭 휘젓는 게 차라리 나았다.

내가 좀 모자란 애로 보여야 데아론이 나를 멀리할 거 아니야.

그러나 데아론은 남의 모자람보다는 본인의 불손함에 더 정신이 팔렸다.

하필이면 자신이 생각 없이 하대한 대상이 이 나라의 공주라니. 심지어 그 공주가 그걸 똑똑히 기억 중이라니.

<그대가 그때 나한테 말을 낮춰서, 평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공주의 말이 그를 수치심과 슬픔으로 찔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아직 귀족들의 예절이 서툴러서 공주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데아론은 우울하게 사죄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자 심장 부근이 지독하게 쑤셨다.

아아, 엄마. 당신의 살아생전 아들임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거늘, 당신이 나를 떠나신 후 세상은 내게 자학만을 가르쳐요.

“사실, 제가……. 제 어머니가 평민이시거든요. 그래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자신의 신분이 비통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가 억울했던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부끄러웠던 적도, 자신이 근본적으로 부족하거나 부정한 존재라고 여긴 적 없었다.

소년이 아직 무지했을 때, 행복했을 때. 그를 아껴 주는 이웃들과 친구들도 어차피 다 평민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모친이 비천하며 그런즉 자기도 비천하고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한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숨 쉬듯 상기하며 살았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실제로 그가 그런 인간인지를 떠나, 소년의 사고방식은 이미 자기 비하적 습관에 찌들어 있었다.

한창 예민하고 위태로울 사춘기에 그의 내면을 잠식한 처량한 자기혐오는 어쩌면 그를 통째로 망가트릴 수도 있었다.

다만, 그가 워낙 천성적으로도 습관적으로도 강인한 아이라서.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또한, 그를 있는 그대로 아낌없이 사랑해 준 한 사람이 있어서.

“그대가 평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절대 나쁜 뜻이 아니었어.”

열다섯 살 때까지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열일곱 살 때부터는 그를 붙들어 준 친구이자 연인이자 가족이 있어서.

“어머니가 평민이면 어때.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대 모친은 분명 훌륭한 사람이었을 거야.”

예나 지금이나 그는 온전히 혼자 버려진 적이 없어서, 숱한 고통을 당했음에도 찌그러질지언정 부서지지는 않고 끝까지 버텼다.

“이렇게 다정하고 용감한 아들을 길러 냈으니.”

데아론을 멀리해야 한다는 다짐은 잊혔다. 첼루나는 그의 눈에 고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가 평민이고 자신은 사생아라 스스로 낮춰야 한다고 지난 2년간 끊임없이 세뇌되며 살아온 너.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그딴 태도를 주입한 모두에게 첼루나는 뜨거운 분노를 느꼈다.

전생에 첼루나의 삶에 데아론이 유일한 빛이자 온기였듯, 첼루나도 똑같았다. 데아론은 오직 연인을 통해 온전히 위로받았다.

전생에 있었던 마수 토벌을 기점으로 데아론은 기사로서 실력을 인정받게 됐고, 출신을 이유로 멸시받는 일은 적어졌다.

그러나 그의 상처는 깊게 남았다. 그는 선량한 사람이었기에 모두에게 다정했으나, 다정하게 구는 것과 마음을 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과거에 그는 모두에게 상냥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그는 목숨까지 버렸다.

“어, 음. 감사합니다.”

뜻밖의 칭찬에 데아론은 떨떨해졌다. 그러다 아까 사과할 때처럼 얼굴을 붉혔다.

아, 세상에. 첼루나는 재차 정신이 혼미해졌다. 너무, 너무 예뻐서.

“그런데, 그……. 제가 언제 그렇게 다정하고 용감했는지……?”

데아론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가 언제 얼마나 봤다고 다정하고 용감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친한 사람끼리 나누기에도 꽤 낯간지러운 칭찬이었다.

배 속이 왠지 간질간질했다. 몽글몽글한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목덜미까지 화끈거렸다. 절대 싫은 감각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아이를 구하려고 마차 앞에 몸을 던졌잖아. 그 정도면 용감한 거지.”

첼루나는 핀잔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투가 어느새 좀 뚱해졌다. 그때를 떠올리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찔했다.

“물론 용감함과 무모함은 고작 한 끗 차이지만.”

첼루나는 괜히 새침하게 덧붙였다. 데아론은 문득 피식 웃었다.

“앞으로는 두 가지를 잘 구분하도록 하겠습니다.”

귀여워. 그의 미친 진심이 생각했다. 도도한 고양이처럼 뾰로통하게 구는 첼루나가 심각하게 귀여워 보였다. 내가 미쳤지, 진짜.

감히 그 누구도, 특히 평민의 아들 따위가 높으신 공주님을 상대로 품을 감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공주님 본인이 말씀하셨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말을 유심히 곱씹었다. 그의 마음이 따스하게 부풀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공주님.”

“뭐가?”

데아론이 명랑하게 덧붙이자 첼루나는 퉁명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이유로 그가 원망스러웠다. 왜 저렇게 예쁘게 웃지? 쓸데없이 잘생겼잖아, 젠장.

“제 어머니를 칭찬해 주셔서요.”

본인 말마따나 귀족의 예법이 서툰 소년은 빙빙 돌려 말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고마우면 고맙다고 시원하게 고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어머니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공주님 같은 분이 칭찬해 주셨다는 걸 아셨다면요.”

비록 남들에게는 더러운 불륜의 대상일지라도. 15년간 하나뿐인 가족에게 풍족하게 사랑받으며 큰 그에게, 그녀는 그리운 엄마였다. 변함없이, 하릴없이.

“글쎄, 과분한 쪽은 내가 아니라 그대의 어머니야. 나야 그분을 칭찬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어.”

첼루나는 다시 풀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발언에는 한 치의 거짓도, 과장도 없었다. 그녀는 아마, 데아론의 모친에게 이 두 번째 삶을 빚졌으므로.

첼루나는 아직도 회귀의 정확한 계기와 방법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꿈같고, 기적 같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그러나 짐작은 가능했다.

데아론의 목걸이.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고 데아론이 죽어 가며 속삭였던 그 물건이, 첼루나가 가진 유일한 단서였다.

만약 정말로 데아론의 모친이 안배한 그 목걸이가 제 아들의 죽음을 지우고 첼루나를 과거로 돌려놨다면, 그렇다면 첼루나에게 그분은 이 세상 어떤 신보다도 위대했다.

“그, 그렇게까지 칭찬할 만한 분은 아닙니다.”

데아론은 다시 머쓱해져서 제 생모를 우물우물 깎아내렸다.

어쩌다 보니 죽은 엄마를 비하한 패륜을 저지른 것 같아 그가 절절매는 사이, 첼루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런데, 데아론.”

이제 나는 가야 해.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황족인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돼. 그런 핑계를 대려고 했다.

처음에는 루이사 펠르만 때문에 불안해져서 정신없이 달려왔고, 아까는 자기 예법이 미흡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데아론을 위로하고 싶어서 곁에 남았다.

이제 그녀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마지못해 자신의 다짐을 상기했다.

이번 생에는 데아론과 엮이면 안 된다. 이미 엮인 것 같긴 하지만, 상황을 더 심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첼루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작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한마디도 덧붙이기 전, 근처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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