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과묵하게 끝났다. 한 쌍의 남녀는 각자 우아하게 동작을 마무리했고, 빈틈없이 예를 갖추어 서로 마주 인사했다.
“영광이었습니다.”
앰벌리가 나직하게 고했다. 첼루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나야말로.”
첼루나의 경우, 영광이었다는 말은 거짓에 가까웠다. 하지만 상대방의 경우 어떠할지, 알 수 없었다.
첼루나는 돌아섰다. 다시 예쁜 허수아비 역할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그새 자기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사내에게 앞을 가로막혔다.
“공주님, 부디 제게 공주님과 춤추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사내의 살짝 어색한 태도에는 소심함과 대범함이 공존했다.
짐작건대, 여태껏 공주와 춤추고 싶어도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하다가 다른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낸 걸 보고 덩달아 마음을 정한 게 분명했다.
첼루나의 눈에 얼핏 짜증이 스쳤다. 그녀는 사내가 미처 알아채기 전에 표정을 갈무리한 뒤, 다시 사교계의 가식을 한껏 그러모아 빙긋 웃었다.
“물론이네.”
사실, 전혀 내키지 않았다. 첼루나는 여전히 이런 상황이 거북하고 낯설었다.
과거에 그녀의 자리는 늘 어둠 속이었지, 조명이 적나라하게 반짝이는 춤 무대가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익숙한 척 해내려니 그것도 고역이었다. 그나마 충분히 각오하고 준비한 일이라 제법 단단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눈앞의 사내와 춤추는 건 불쾌했다. 앰벌리와 연관된 불편한 마음과는 또 다른 의미의 반감이었다.
‘발이라도 콱 밟아 버릴까.’
첼루나는 이 사내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전생에 나를 엄청나게 무시했었지, 아마.
이 사람만 그랬던 건 아니기에 그를 유독 미워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를 곱게 볼 이유도 전혀 없었다.
첼루나는 고상한 공주의 몸짓으로 남자와 합을 맞춰 나붓대다가 음악이 가장 감미로운 구간에 다다랐을 때쯤 그의 발등을 세게 밟았다.
“으윽!”
“어머, 어떡해, 정말 미안해.”
공주는 순진한 눈망울을 커다랗게 뜨고 허둥지둥 사과했다. 남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듯한 표정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괘, 괜찮습니다, 공주님.”
첼루나는 속으로 사악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정강이도 몇 번 걷어차고 싶은데, 그랬다간 자신이 지난 4년간 간신히 쌓아 둔 평판이 무너질까 봐 애써 참았다.
첼루나는 춤을 그럭저럭 무사히 끝냈다. 끝에 마주 인사하며 첼루나는 남자에게 천사처럼 웃어 주었고, 남자는 발뼈가 부서진 듯한 느낌을 무시하며 홀린 듯 마주 웃었다.
첼루나는 두 명과 연달아 더 춤추었다. 이어서 다섯 번째 사내가 달려들었을 때쯤, 피곤하다는 핑계로 잽싸게 몸을 피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춤을 너무 많이 춰서도 안 되고, 너무 적게 춰서도 안 된다. 사교계의 까다롭고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여인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특히 가혹했다.
춤 신청을 너무 적게 받으면 매력이 부족하고, 너무 많이 받으면 현숙하지 못하며, 많이 받았는데 많이 거절하면 콧대가 너무 높다.
첼루나가 단 한 명과도 춤추지 못하고 내내 오도카니 있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기꺼이 조롱했으리라. 역시, 아무리 평판이 최근에 호전됐다 해도 결국은 외톨이 공주라고.
그러나 그녀가 상냥한 태도로 너무 많은 사내와 연달아 춤추면 그녀의 눈웃음이 참 요사스럽다고 흉보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첼루나는 총 네 명과의 연속적인 춤으로 자신이 외톨이가 아니라는 걸 입증한 뒤, 나긋한 눈웃음이 부당한 비난을 부르기 전에 서둘러 무대를 벗어났다.
‘피곤해.’
첼루나는 또다시 부채를 펼쳐 자신의 뻣뻣하게 굳은 하관을 효과적으로 가렸다.
피곤했고, 지겨웠다. 외로웠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데아론.’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급격하게 우울해진 마음을 억지로 감추며 첼루나는 무도회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습관적으로 이복 언니를 찾아 사람들을 훑던 중, 첼루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숨을 멈췄다.
‘아.’
루이사 펠르만. 첼루나는 저 선명한 금발을 기억했다.
첼루나는 벌꿀 같은 머리카락과 바다 같은 눈을 지닌 동갑내기 백작 영애가 이제 막 춤 하나를 끝내고 무도회장 언저리로 자리를 옮기는 걸 지켜보았다.
춤을 워낙 오래 춰서 다리가 아픈 듯했다. 첼루나 본인도 지금 종아리가 잔뜩 땅기는 느낌이라, 저 사람 역시 어떤 상태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루이사 펠르만이 한숨지었다. 너무 멀어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 모양을 보니 한숨짓는 듯했다.
금발 소녀는 테라스 쪽을 간절하게 돌아보았다. 아마도 아픈 다리를 쉬게 할 겸 잠시 어두운 곳에 앉으려는 듯했다.
‘안 돼.’
첼루나의 이성보다는 본능이 외쳤다. 그녀의 머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녀는 표정을 정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런 식의 움직임이 전혀 세련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는 걸 잊고, 거의 달렸다.
첼루나는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지나친 몇 명이 빤히 쳐다볼 정도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금발의 루이사 펠르만을 바람처럼 휙 지나 테라스 입구를 통과했다. 무도회장에서 바깥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였다. 첼루나는 그 어둠 속에 발을 디뎠다.
전생에, 이제는 그녀 혼자만 기억하는 그 삶에, 첼루나는 이곳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으라는 황명이 서럽고 서러워서, 평소의 표독스러운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울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과 가족의 부담을 피해 고독하게 숨어 있던 어느 소년은 웬 울음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조심스레 다가왔다.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다정하고 올곧은 소년과, 우느라 지쳐 평소처럼 남을 까칠하게 튕겨 낼 힘이 없었던 소녀.
데아론은 첼루나가 황제의 사랑받지 못하는 막내딸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를 비웃거나 슬금슬금 피하는 대신, 그녀에게 눈물을 닦을 만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첼루나도 데아론이 그 악명 높은 후작의 비천한 사생아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저 울다 들킨 게 창피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매우 지저분하게 흐르는 상태였기에 수치심은 더욱 깊었다.
소녀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로 소년의 손수건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얼굴을 닦을 무언가가 필요하긴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을 이제는 오직 첼루나만 기억했다.
그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으면서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린 소년은 혼자 창턱에 기대어 빈둥대고 있었다.
“데아론 텔로아!”
이성보다 본능, 머리보다 마음에 이끌려 단숨에 달려온 첼루나는 또다시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첼루나 공주님?”
데아론은 놀라서 창턱에서 몸을 벌떡 뗐다.
데아론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첼루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게.
“그, 저기, 그, 그게.”
첼루나는 횡설수설했다. 그러면서도 데아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데아론은 아까 자신을 깡그리 무시했던 공주님이 뜬금없이 저를 찾아 이런 으슥한 곳까지 온 것과, 막상 와서는 괴상한 단음절만 얼버무리는 상황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 어……. 그때는 집에 잘 들어갔나? 그때.”
첼루나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녀의 이성은 아까부터 그녀에게 닥치라고 애원했으나, 아, 그녀가 언제 데아론과 관련된 일로 이성의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이게 다 그 사람 때문이야. 첼루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펠르만 백작의 딸을 절박하게 욕했다. 루이사 펠르만 때문에, 내가 조급해져서 그래.
전생에 루이사 펠르만은 데아론을 좋아했다. 심지어 데아론과 혼담까지 오갔던 사이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첼루나를 싫어했다.
펠르만 백작은 텔레스 황녀의 지지자였고 텔로아 후작과도 정치적으로 긴밀했다.
후작의 차남과 자신의 여식을 맺어 주려 한 건 그 동맹을 더욱 공고화하기 위함이었다.
지금이야 데아론은 구구절절 욕만 먹는 비루한 사생아지만, 나중에 황녀의 기사로 공적을 쌓으면서 그의 평판은 조금씩 나아졌다.
특히 서부의 마수 토벌에 함께한 후로 펠르만 백작은 점점 데아론에게 호감을 품고, 끝내 자기 딸과 데아론의 혼약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루이사 본인도 혼인을 원했다. 그녀는 자신이 텔로아 후작의 아들과 결혼함으로써 생길 정치적 이점을 충분히 파악한 영리한 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분명 데아론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다.
호감을 갖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전생에도 데아론은 무척 다정하며 섬세했고 그때쯤 이미 꽤 이름난 기사였으므로.
또한 부인할 수 없이 잘생기기까지 했고.
이건 모두 전생의 얘기였다. 이번 생에 그대로 되풀이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전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첼루나는 지독하게 불안했다. 이번 생에도 루이사 펠르만이 기어코 데아론을 좋아하게 될까 봐. 이번에도 혼담이 오갈까 봐.
어쩌면, 이번 생에는 과거와 달리 데아론도 루이사를 좋아할까 봐. 이번 생에 그는 첼루나의 연인이 되지 않을 테니.
아까 루이사가 테라스에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첼루나는 숨이 막혔다.
전생대로라면 데아론은 테라스에 있을 것이다. 만약 루이사가 들어왔다면, 그대로 그를 만났으리라.
“‘그때’라 하시면 언제를 말씀하십니까?”
데아론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사실 그는 이미 답을 짐작했지만 넘겨짚는 건 무례할 것 같아 구태여 확인차 여쭈었다.
게다가 눈앞의 소녀는 황족이었다. 단순히 기본적인 예절을 넘어 극진한 법도를 요구하는 존재. 반쪽짜리 평민인 그는 긴장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네가 다쳤을 때 있잖아.”
첼루나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루이사에 대한 생각이 단숨에 사라졌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는 장면은 그저, 아이를 안고 구르느라 피멍이 든 데아론뿐이었다.
그 장면은 이제는 지나 버린 삶으로 이어져 숲속에 외롭게 버려진 시체로 옮겨 갔다. 첼루나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몸이 저절로 움찔 떨렸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데아론은 놀라서 초조하게 물었다. 첼루나는 바닥을 보며 겨우 중얼거렸다.
“응, 나는 괜찮아.”
괜찮아야만 했다. 네가 네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내게 허락한 두 번째 삶이니까.
“아, 그리고. 저는 그때 집에 잘 들어갔습니다.”
데아론은 뒤늦게 덧붙였다. 그의 쓸데없이 성실한 대답에 첼루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꽉 물었다.
‘나,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지.’
이제야 자괴감이 밀려왔다. 루이사 펠르만 때문에 불안해졌다는 핑계는 말 그대로 정말 핑계에 불과했다. 제게는 불안조차 과분했다.
“그래, 다행이야.”
이번 생에는 바라만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바라보는 것조차 과욕일 텐데.
다가가지도, 닿지도 않기로 했거늘 처음부터 초라한 의지는 빠르게 와르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