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아론은 숨기로 했다. 다시 공주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의 결정을 곧장 실천에 옮겼고 불빛을 등진 채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첼루나가 그가 있던 쪽을 돌아봤을 때, 그는 이미 그늘에 녹아든 뒤였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라.>
황제께서 그렇게 명령하시는데 거역할 길은 없었다.
전생에 첼루나는 그해 데뷔한 귀족들이 황제 일가에게 인사 올리는 시간까지 버텼다가, 최소한의 의무를 마치고 곧장 어둑한 테라스로 도망쳤다.
거기서 첼루나는 데아론을 처음 만났다. 그녀가 가장 초라하고 비참하게 울고 있을 때, 역시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숨어 있던 소년을.
고위 귀족의 아들이지만 평민 피가 섞인 사생아라는 이유로 핍박받던 소년은, 마찬가지로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받던 소녀에게 한 줌의 위로이자 빛이었다.
이제 그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옛일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단 한 명의 증인은 여러 이유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척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데아론을 찾아 테라스를 샅샅이 뒤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첼루나는 전생에 없던 새로운 고역을 견뎠다.
이번 생에 그녀는 빛 아래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각종 힐끔대는 시선의 표적이 되었다.
‘차라리 눈에 띄지 말라는 명령을 듣는 게 나을 뻔했나.’
첼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도 이를 악무는 모습을 들키지 않게 손부채로 우아하게 입술을 가렸다.
‘이건 너무 어중간하잖아. 이도 저도 아니야.’
차라리 전생처럼 아예 쫓겨나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든가.
아니면 자신도 텔레스와 블레논처럼 자유롭게 춤추고 얘기하고 조명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회귀 이후, 첼루나 본인의 열렬한 노력 덕에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는 많이 누그러졌다.
문제는 황제였다. 황자도 물러졌고 시녀들도 달라졌으나 황제는 여전히 빙하처럼 차가웠다.
이번 생에 막내딸의 호전된 평판을 의식한 그는 그녀를 대놓고 몰아내지는 않았다. 다만 살갑게 구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한결같이 무시할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난처해진 건 첼루나에게 호기심을 품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올해 처음 사교계에 나타난 막내 공주를 궁금해했고, 대다수가 그녀의 미모에 감탄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삐딱하고 까칠하며 품위라곤 없다고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최근에 많이 나아져서 꽤 사랑스러운 성품을 지녔다고 말했다.
상반된 평가 앞에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첼루나 포렌타인, 그녀는 누구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겉모습만 보면 아름답고 유순한데, 오히려 저 어여쁜 외모로 추문이나 흘리는 간사한 계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들끼리 경박하게 떠들며 그들은 그녀를 먼발치에서 가늠했다.
몇몇 과감한 사내들은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고자 했으나 주변에서 눈치껏 뜯어말렸다. 천덕꾸러기 공주와 괜히 친근한 모습을 보였다가 황제 눈 밖에 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어쨌든 황족이었다. 블레논 황자와 텔레스 황녀보다 훨씬 만만한 상대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부담스러운 혈통이었다.
만만하면서도 부담스럽고, 성격이 포악하다는 평가와 성품이 온화하다는 소문이 서로 엇갈리는 사람. 그녀는 그토록 모순투성이였다.
순식간에 엄청난 신비주의 인물로 부상한 첼루나는 이 상황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 한참 멀었구나.’
첼루나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지난 4년간 처절하게 노력했건만, 궁인들은 훌륭하게 휘어잡았어도 아직 그녀가 사교계에서 지닌 권력은 전무했다.
첼루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언니에게 유용한 패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지금 그녀는 무도회장에 세워 둔 예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이래서 어디 도움이나 되겠어?’
이래서 내가 과연 황녀 전하께 도움이 될까? 데아론에게 조금이나마 유용할 수 있을까?
이번 생에도 나는 블레논 오빠와 더불어 무력하게 몰락하는 건 아닐까. 모든 건 부질없는 일이었을까. 마음이 무거워졌고 곧 진득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머릿속에 괴로운 생각이 가득한 탓에 첼루나는 제게 다가오는 부드러운 발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발소리가 바로 앞에 멈춘 뒤에야 그녀는 흠칫 놀랐다.
“첼루나 공주님. 부디 제가 공주님과 춤을 추는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장황한 사교계 화법과 정중한 미성이 맞물렸다. 첼루나는 눈을 홉떴다.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고, 몇 명은 아예 대놓고 수군댔다.
“……물론이야, 라크문 경.”
너무 놀라서 거절할 핑계를 지어낼 틈을 놓쳤다. 어차피 자신이 춤 신청을 거절할 힘이나 있는지 첼루나는 의문이었다.
어차피 달리 파트너도 없으면서 딱 하나의 춤 신청을 거절한 도도한 계집. 그딴 비웃음이 따라붙기 전, 첼루나는 얼결에 앰벌리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앰벌리가 매끄럽게 말했다. 그의 준수한 얼굴과 청색 눈은 특별한 감정 없이 그저 점잖았다.
그의 가면 같은 얼굴이 첼루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녀는 본인의 표정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두 남녀는 예법대로 손을 맞잡은 채 무대로 나아갔다. 마침 새로운 춤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대는 못하는 게 없나 봐.”
“무슨 뜻입니까?”
“검술의 천재로 알려졌으면서, 알고 보니 춤도 잘 추는 건가?”
첼루나는 생각나는 대로 나불댔다. 사교계의 중요한 관례였다. 미치도록 거북한 사람과도 친한 척 대화하기.
“황송합니다, 공주님. 하지만 제 춤 실력이 썩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앰벌리는 담백하게 응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자세를 잡았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안무가 이어졌다.
“썩 훌륭하지도 않은 실력으로 황족에게 춤을 신청한 거야?”
첼루나는 짐짓 농담했다. 그녀가 앰벌리의 주변을 나비처럼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빨간 머리칼이 나풀대며 공중에 향수 내음이 번졌다.
“썩 훌륭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지, 평균 이하라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앰벌리가 슬쩍 웃었다. 아마도 첼루나는 처음 보는 미소였다. 눈매가 가늘게 휘며 그에게 평소와 꽤 다른 분위기를 덧칠했다. 조금 더…… 여우 같은.
“엄청나게 잘하지는 않아도 사교계의 평균 정도는 가능하니, 공주님의 파트너가 되기에 부족하지는 않다고 여겼습니다.”
앰벌리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첼루나의 곁을 한 바퀴 돌았다.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확실히 평균 정도면 부족하지는 않지.”
첼루나가 가볍게 수긍했다. 앰벌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옅게 웃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첼루나는 그와 눈을 맞췄다. 황금색과 연청색이 정면으로 맞닿았다.
그리고 첼루나는 또다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빳빳하게 굳혔다.
첼루나는 이런 앰벌리가 낯설었다.
전생에 그녀에게 무덤덤했던 앰벌리도 아니고, 회귀 초반 쌀쌀맞던 그도 아니었으며, 최근에 뜻밖에도 깍듯하던 그 역시 아니었다.
첼루나를 향한 앰벌리의 눈에는 불꽃이 있었다. 너무나 낯설면서도 낯익은 불꽃이었다.
낯선 이유는, 절대 저런 종류의 불꽃을 다른 누구도 아닌 앰벌리의 눈에서 찾을 줄은 몰랐기에.
낯익은 이유는, 다른 사람의 눈에서는 저와 비슷한 빛을 거듭 확인해 봐서.
지금 앰벌리는, 전생의 데아론이 첼루나를 볼 때와 사뭇 닮은 열기를 눈에 품고 있었다.
‘미친 소리……!’
첼루나는 숨을 삼키며 속으로 욕했다. 말도 안 돼. 앰벌리가, 나를? 앰벌리 라크문이?
그녀의 눈치가 둔하지는 않았다. 그냥 타고난 건지, 전생에서부터 하도 눈칫밥 먹는 게 일상이어서 그런지 예리하다면 예리한 그녀였다.
첼루나는 자신이 눈치가 빠른 게 아니라 그냥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쪽으로 결론짓고 싶었다.
차라리 과대망상, 또는 자의식 과잉이 훨씬 그럴싸한 설명 같았다.
앰벌리 라크문이, 데아론과 같은 눈으로 나를 본다고. 불가능했다.
“……그대의 평균적인 춤 실력을 나한테만 쏟아붓지 않기를 바라. 분명 오늘 이 황궁에 그대의 춤 신청을 기다리는 숙녀들이 꽤 많은 듯하니.”
첼루나는 속마음이 충격과 의심으로 쾅쾅 울리지 않는 척 장난스레 타일렀다. 빙그레 덧붙인 미소마저 자연스러웠다. 반면 앰벌리는 오히려 웃음을 그쳤다.
“분부대로.”
그가 짤막하게 아뢰었다. 첼루나는 이쯤에서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외면했다. 스스로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첼루나의 지적은 딴청인 동시에 사실이었다. 아름답고 늠름한 앰벌리는 과연 주변의 숱한 여자에게 뜨거운 설렘을 불어넣고 있었다.
물론, 그의 외모와 절도 있는 동작에 분명 호감을 느끼면서도 괜한 자존심을 내세워 아닌 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앰벌리가 평민 출신이라는 걸 아는 자들이었다.
아무리 평민으로 태어났어도 기사 작위를 받은 이상 앰벌리는 엄연히 귀족이었다.
심지어 그냥 기사도 아니고 황자의 기사니, 그 정도면 웬만한 명문가 자제보다도 고귀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귀족 중에서도 특히 거만하고 보수적인 자들은 현재 앰벌리의 신분을 잊은 척하며 그의 태생을 근거로 은근히 비웃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몇몇 사람들은 그가 감히 황족에게 춤을 청한 일을 숙덕숙덕 비난했다.
첼루나도 같은 이유로 걱정스러웠다. 안 그래도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황제가 자신이 고작 평민 출신 기사와 춤췄다는 이유로 생트집을 잡을까 봐.
‘뭐, 꼭 앰벌리가 아니더라도 핑계는 많았겠지만.’
첼루나가 한미한 출신의 남자와 춤추면 황족의 체면에 먹칠했다고 비난할 테고, 고위 귀족과 춤춘다면 자기 분수를 모른다고 조롱하겠지.
그렇다고 아예 춤추지 않고 목석처럼 가만있었다간 어째서 그리 시큰둥하게 있느냐고 욕먹을 게 뻔했다.
하여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자기 아비가 꼬투리를 잡지 못할 길은 없을 거라고 첼루나는 음울하게 생각했다.
앰벌리의 출신이 어쩌면 도화선이 되려나. 아니면 앰벌리 라크문이 황제 폐하의 귀한 아드님 블레논 황자의 가신이니 괜찮을까?
한편, 앰벌리는 조용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완벽한 사교계 화술로 구구절절 이야기하던 그가 어째서 갑자기 침묵하는지, 첼루나는 잠시 고민했다.
‘왜 또 이러는 거야?’
지금 앰벌리는 다시 무뚝뚝했다. 첼루나는 본인이라도 형식적으로나마 대화를 이어 가고자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하지 말자, 그냥.’
문득, 짜증스러웠다. 굳이 이 사람을 대상으로 그렇게까지 애쓰고 싶지 않았다.
꽁하게 있고 싶으면 꽁하게 있으라지. 그의 알 수 없는 변덕을 분석하는 것도 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