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네가 저기 쟤보다 훨씬 나아. 안 그래?”
블레논이 문득 중얼댔다. 블레논의 파란 눈은 독기를 품고 어깨 너머 텔레스를 향했다. 첼루나는 다시 멍청한 미소를 그렸다.
바로 그때 텔레스가 무심코 돌아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첼루나는 미소를 싹 지웠다.
언니와 동생은 서로 잠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텔레스가 쌩긋 웃었고 첼루나는 당황했다.
“뭐가 그리 우습다고 실실 웃는 건지. 그럴수록 자기 얼굴이 더 추해진다는 건 모르나 봐?”
블레논은 텔레스가 아닌 애면 허공을 보며 낭랑하게 조롱했다. 아, 젠장. 첼루나는 긴장했다.
“흠, 사람이 꼭 웃는다고 추해진다는 법은 없지.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마수처럼 생긴 애들이 있는걸.”
텔레스는 나긋하게 받아쳤다. 그녀의 시선도 엉뚱한 곳을 향했다. 첼루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글쎄, 때로는 비교당한 마수 쪽이 억울하지 않을까 싶어.”
블레논은 자기 손끝을 내려다보며 쾌활하게 비꼬았다. 첼루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억울하다기보다는 지겹지 않을까.”
텔레스는 발랄하게 대꾸했다. 첼루나는 가까스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다행히도, 이복 남매의 신랄한 언쟁 아닌 언쟁은 황제와 황후가 때마침 입장한 덕분에 단숨에 그쳤다.
아니, 어쩌면 별로 다행스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첼루나는 제게 동시에 닿은 두 쌍의 시선을 느끼고 숨을 참았다.
황후의 눈길은 공주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황제는 아주 조금 더 그녀를 응시하다가 마찬가지로 멀어졌다.
첼루나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준비는 다 끝났니?”
“네, 폐하.”
“네, 폐하.”
황제의 질문에 황자와 황녀가 차례로 대답했다. 공주는 잠잠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당사자는 열일곱 살 첼루나로, 사실 황제의 관심은 가장 먼저 막내딸에게 향했어야 했다. 오늘은 그녀가 주인공이므로.
아무런 축하도, 격려도, 질문도 없었다. 첼루나는 차라리 안도했다.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라.>
황후, 황자, 황녀가 모두 보고 듣는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명했던 전생의 황제보다는 나았다.
첼루나는 편안하게 호흡하려 애썼다. 오늘은 나를 그냥 무시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전생의 치욕은 되풀이되지 않으려나 보다.
그래, 차라리 투명 인간 취급받는 게 나아. 누구는 미움보다 무관심이 더 견디기 힘들다고 하지만 글쎄, 내 생각은 반대야.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딴 놈은 어차피 내 아비도 아니라고, 마음으로는 모든 기대도 원망도 혈연의 정도 썩둑 끊어 냈는데.
그런데 심장 부근이 찌르르 아팠다.
“폐하, 방금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시종이 와서 정중하게 고했고 황제는 끄덕였다.
첼루나는 어서 손님들이 입장하기를 바랐다. 한시바삐 이 빌어먹을 가족 놀이가 끝나고 귀족들의 무리가 시선을 분산하기를 바랐다.
오늘 첼루나는 할 일이 있었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은 아비의 냉대에 흔들려 갈팡질팡할 틈이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
이번 생에 나의 주군이 될 자, 텔레스 황녀 전하, 나의 이복 언니. 그녀에게 접근해 충성의 뜻을 밝히려면 오늘이 적기였다.
평소에 첼루나는 텔레스와 말을 섞을 구실이 없었다. 눈과 귀가 가득한 황궁에서는 걸음걸이부터 손짓까지 전부 관찰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음악과 불빛과 말소리와 그림자가 많은 것을 어지럽게 뒤덮고 뒤섞는 무도회에서라면 찰나만이라도 가능할지 몰랐다.
텔레스를 위해 블레논 진영에서 첩자가 되겠다는 결심은 4년 전 회귀 직후에 이미 마쳤으나 첼루나는 여태 고백의 때를 미뤄 왔다.
이전에는 적절한 기회도 없었을뿐더러 성년도 안 된 어린애가 쪼르르 달려가 충성을 맹세해 봤자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4년 전에 첼루나는 오빠에게 툭하면 뺨을 맞는 비참한 공주였다. 그토록 초라한 상태로는 언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다.
자신이 예전보다 그나마 조금 힘 있는 위치로 올라온 지금, 그래서 언니가 자신을 쓸모 있는 패로 여길 만해졌을 때 첼루나는 기회를 거머쥐고 싶었다.
첼루나는 텔레스를 흘긋했다. 황녀는 황후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심장이 또 바보처럼 찌르르 울렸다. 첼루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려, 첼루나.’
바보 첼루나. 이제 와서 어린애처럼 연약해지지 말자. 부질없는 감성에 휩쓸릴 때가 아니야.
평생 받아 본 적도 없는 엄마의 손길이 새삼스레 그리운 것처럼, 황후 전화와 황녀 전하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보고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지 말자.
첼루나는 남몰래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때 무도회장의 문이 열렸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시간, 끔찍한 기억이었다. 전생에서 숱하게 겪어 본 일이었다.
고귀한 자들이 뒤엉킨 무대, 향긋하고 값진 술, 감미로운 음악, 소곤대는 목소리와 우아한 부채질, 쉼 없이 교차하는 시선.
첼루나는 기다렸다. 자신이 처음으로 이복 언니와 비밀스레 이야기할 기회를, 또한 오늘 초대받은 한 사람을.
‘데아론.’
이번 생에는 그의 사랑을 포기하기로 했으니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아야 함을 알면서도.
그녀는 계속해서 무도회장을 훑으며 두 후작가 형제의 등장을 조급하게 기다렸다.
텔로아 후작과 후작 부인은 이미 도착한 뒤였다. 첼루나가 기억하는 과거와 같았다.
후작 부인이 데아론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거의 발작을 일으키는 관계로, 데아론의 사교계 데뷔 날 그는 모리안과 함께 황궁에 따로 도착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첼루나는 데아론 텔로아의 입장을 지켜보았다.
첼루나는 자신이 치맛자락을 너무 세게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느릿느릿 손가락에 힘을 풀었다.
“저 아이가 그 아이죠? 텔로아 후작이 밖에서 데려왔다는.”
“그런가 봐요. 세상에, 후작의 판박인데요.”
“그렇게 보이나요? 제가 보기엔 전혀 닮지 않았는데.”
“머리카락 색은 똑같네요. 그래도 이목구비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라요. 봐요, 제 형과도 닮은 구석이 별로 없잖아요.”
“역시, 비천한 핏줄이라 그런가?”
주변에서 이기죽대는 소리가 들렸다. 첼루나는 단어 하나하나를 마음에 표독하게 새겼다.
화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끝까지 원한으로 남겼다가 나중에라도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보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돌아보는 시간조차 아까워, 첼루나는 데아론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데아론은 다소 위축된 모습으로, 그러나 대체로 침착한 태도로 무도회장을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첼루나를 발견했다.
소년과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 첼루나는 알았다. 데아론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첼루나는 무도회장 상석에 자리했다. 각각 황제와 황후일 수밖에 없는 중년 남녀 근처에, 다른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과 함께.
‘……귀족이 아니었구나.’
황족이었어.
데아론의 심장은 바닥까지 떨어졌다.
첼루나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계획하고 각오한 대로였다. 나는 그를 잊어버린 척해야 한다.
지금껏 그를 찾느라 무도회장을 샅샅이 둘러본 주제에 뒤늦게 이러는 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애써야 전생에 쌓은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테니까.
전생에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린 데아론. 이번 생에는 부디 더 평화롭고 안전하고 행복한 연애를 하길 바란다. 누군가를 위해 삶까지 걸어야 하는 사랑은 하지 말기 바란다.
만약 텔레스 황녀가 자신을 첩자로 받아 준다면, 첼루나는 앞으로도 계속 블레논과 친한 척하면서 황녀와 친한 텔로아 후작가를 적대해야 했다.
비록 가문에서 겉도는 신세기는 하지만 너도 결국 황녀 전하를 섬길 것이므로.
첼루나는 미리 데아론을 향한 마음을 꼭꼭 잠갔다. 들킬 수 없도록. 새어 나가지 않도록.
“…….”
데아론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면하는 막내 황녀를 묵묵히 보다가 본인도 시선을 거두었다.
‘황족이었어.’
그냥 귀족이었어도 까마득했을 텐데.
후작의 아들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평민인 나는, 당신이 그냥 웬만큼 고귀한 가문의 여식이었어도 어려웠을 텐데.
‘황제의, 딸.’
그런데 황족이라고? 황녀라고? 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자의 딸이라고?
신분으로 많은 게 정해지는 이 불평등한 세상에서, 태생만으로도 꼭대기에 자리한 그런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고.
‘……대체 그날 거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데아론은 멍하니 회고했다.
두 달 전, 데아론은 달랑 시녀와 어린애만 하나씩 데리고 시내를 돌아다니던 첼루나를 떠올렸다. 황족이라기엔 너무 소박한 인원이었다.
데아론은 문득 자신이 지난 2년간 후작 저에 얹혀살며 주워들은 아득한 정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현재 황제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고, 막내딸은 모친을 난산 때문에 죽게 했다는 이유로 자식 취급도 못 받는다고.
그 막내딸이 저분이시구나.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제 폐하께 자식 취급도 못 받으신다는 분.
데아론의 보랏빛 눈에 연민이 들어찼다.
황실에서 입지가 그만큼 좁기에 그날 그토록 황족답지 않게 돌아다니신 건가? 호위도 없이 시녀 하나만 데리고.
만약 첼루나가 지금 데아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넌 이런 상황에마저 남 걱정만 하고 있냐고 마구 소리쳤을지도 모르지.
데아론은 그만큼 순전하게 공주를 걱정하다가, 연민이 동질감으로 번지는 순간 생각을 뚝 그쳤다.
‘허튼소리.’
동질감이라니. 내가, 감히? 감히 황족과 나를 비교하다니.
아무리 저분이 사랑받지 못하고 큰 천덕꾸러기라고 해도. 그 상황을 지금 후작가에서의 나와 비교할 법하다고 생각하다니.
‘큰일 날 소리야.’
지난 2년간 데아론의 자존감은 한없이 낮아지기만 했다.
엄마에게 사랑받으며 평범하고 행복하게 크던 시절은 가물가물하고, 그는 반쪽짜리 사생아로서 자신의 주제를 끝없이 배웠다.
어느새 그는 스스로 무작정 낮추는 게 익숙해졌다. 본인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미쳤지, 진짜.’
그는 자신이 감히 공주에게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과, 두 달 전 그녀를 만났을 때 습관적으로 말을 낮췄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창백해졌다.
데아론은 첼루나가 두 달 전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까 공주의 시선은 분명 아무런 표정 없이 그를 지나쳤다.
그는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