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14)

“너는.”

첼루나는 뭉툭하게 물었다. 그녀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반말을 이어 갔다. 평범한 귀족 소녀처럼 보이려면 말을 높여야겠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너는, 괜찮아?”

엘리나의 언니가 부른 주치의는 조금 전에 다녀갔다.

소년을 조심스레 진단한 결과, 의사는 근육과 뼈는 멀쩡하며 곳곳에 타박상이 많으니 상처를 빨리 소독하면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엘리나의 언니는 흙투성이가 된 데아론에게 목욕을 권했지만 그는 더는 남에게 신세 지기를 거부하며 자기 집도 여기 근처라고 웅얼웅얼 얼버무렸다.

만약 데아론이 정말 엘리나의 가족에게 더는 폐 끼치지 않는 것만 생각했다면, 진즉 도망치듯 빠져나와 터덜터덜 후작 저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이 몰골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과 별개로, 그는 아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암이라는 꼬마와 이름 모를 소녀 때문이었다. 꼬맹이와 또래가 엉엉 울고 있는데 야멸차게 돌아서는 건 데아론의 천성에 어긋났다.

리암은 이미 진정했고 소녀도 이제 울음을 그쳤으니 데아론은 여기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졌다.

자기도 어서 돌아가 더러워진 옷을 처리하고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그런데, 까닭은 모르겠지만 저 소녀가 계속 눈에 밟혀서. 데아론은 주저했다. 무의식중에 사로잡힌 듯.

“응, 괜찮아.”

데아론은 대답했다. 방금 자신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도 헷갈렸다. 몸의 상처는 견딜 만한데 마음이, 마음이 이상하게 아렸다.

“그래.”

첼루나가 속삭였다.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인다고 반박하고 싶었다. 지금 네가 어딜 봐서 괜찮냐고 화내고 싶었다.

왜 너는 너 자신을 돌보지 않는 거냐고, 전생의 비탄까지 담아 그를 마구 원망하고 싶었다.

그냥 내가 죽게 두지 그랬어. 생판 남인 어느 꼬마가 다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연인도, 어린애도. 그들을 돕느라 네가 다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데아론이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서, 첼루나는 그를 사랑했다.

“아까 의사 선생님 얘기 들었지? 애는 멀쩡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데아론이 상냥하게 달랬다. 그는 첼루나가 아까 다짜고짜 통곡한 이유가 눈앞에서 꼬마가 사고를 당할 뻔한 것 때문이라고 믿었다. 첼루나는 그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

첼루나는 맥없이 대꾸했다. 나는 리암을 걱정한 것도 맞지만 너 때문에 가장 미치겠다고, 털어놓을 수 없었다.

“으음, 그럼. 나는 이제 슬슬 가 볼게.”

데아론이 서둘러 말했다. 다른 누군가 들어와서 그를 이상하게 보기 전에 떠나고 싶었다.

여기서 그는 불청객 느낌이었다. 사실, 지난 2년간 그는 어디서나 자신이 불청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불륜의 열매. 반쪽짜리 후작 아들. 평민의 피가 섞인 비루한 사생아. 그게 현재 데아론 텔로아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분명 그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그는 그냥 평범하게 행복한 10대 소년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뒤, 모든 게 불행하게 바뀌었다.

“잘 가.”

첼루나는 슬프게 말했다. 그녀는 일부러 끝까지 자기소개를 삼갔다.

그녀가 이름을 밝힌다면 데아론도 그래야 하고, 그녀는 첼루나가 낯선 귀족과 통성명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전생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전생에 이맘때쯤만 해도 데아론은 제국의 사교계에서 첼루나와 같은 존재였다. 누구나 이름만 말해도 곧장 알아듣고 비웃음을 머금게 하는 존재.

천덕꾸러기 공주든, 평민의 피가 섞인 사생아든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데아론은 자신이 ‘그’ 데아론 텔로아라고 소개하는 순간을 꺼렸다.

지금 데아론은 첼루나를 그냥 ‘어떤 귀족 소녀’쯤으로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를 그냥 보내 주자.

어차피 두 달 뒤 무도회에서 그들은 만나게 되어 있었다.

“너도 집에 잘 들어가.”

데아론은 다정하게 화답했다.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으나, 그는 꾹 참았다.

첼루나의 예상대로 데아론은 그녀를 수도 귀족쯤으로 여겼다. 그녀가 황족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지만, 그녀가 평민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다.

저 여자애가 귀족이라면 당연히 들어 봤을 것이다. 텔로아 후작의 볼품없는 사생아에 대한 소문. 굳이 자기가 그 사람이라고 미리 자백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두 달 뒤에 다시 만날 테니까. 쟤도 귀족이고 나도 형식적으로나마 귀족이니, 황궁에서 열리는 데뷔 무도회에 둘 다 참석할 테다.

“혹시 몇 살이야?”

데아론은 대뜸 물었다. 이름도 안 물은 주제에 나이부터 확인하는 게 웃기긴 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열일곱 살.”

첼루나가 대답했다. 그녀는 저 질문의 이유를 짐작했다.

“그렇구나.”

데아론이 끄덕였다. 역시, 나랑 동갑이구나. 그럼 무도회에서 확실히 만나겠네. 그는 그 사실이 반갑기도 했고, 끔찍하게 싫기도 했다.

“그럼, 이제 정말 갈게.”

두 달 뒤에 네가 나를 만나 내가 텔로아 후작의 악명 높은 혼외자라는 사실을 알아내면, 너도 나를 차가운 눈으로 보겠지.

데아론은 첼루나에게 싱긋 웃어 준 뒤 돌아섰다. 아까 길에서 구른 것 때문에 살짝 절뚝대는 것치고는 굉장히 민첩한 몸짓으로.

첼루나는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계절이 마침내 온전히 따뜻해졌을 때, 황궁에서 데뷔 무도회가 열렸다.

올해 열일곱 살, 즉 성년이 된 앳된 귀족들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매력을 뽐내고 친목을 다지며 고귀하신 황제께 인사드리기 위해 궁에 모였다.

마차가 문 앞에서 멈췄다. 이곳은 황실의 별궁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으로, 데뷔하는 귀족들이 사교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모리안과 데아론 텔로아가 마차에서 내렸다. 데아론은 내심 안도했다.

마차 안에서 이복형의 맞은편에 앉아 보낸 긴긴 침묵의 시간은 숨 막히게 불편했다.

“긴장한 건 아니지?”

모리안이 대뜸 물었다. 데아론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형을 보다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왜 그런 걸 물으시죠? 딱 그런 눈빛이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모리안은 자신이 관심 비슷한 걸 보이자 화들짝 놀라며 움츠리는 동생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외면했다.

“그럼 다행이고.”

어색했다. 대화라는 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거더라.

형이 말을 걸면 동생은 깍듯하게 대답했고, 형이 말을 그치면 동생은 얌전히 물러났다. 그러니 대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데아론은 그저 민폐를 끼치지 않는 데 주력했고, 모리안은 마지막으로 남한테 살갑게 군 기억이 까마득한 작자였다. 어긋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이제 가자.”

모리안은 뚝뚝하게 말했다. 데아론은 다소곳이 형을 뒤따랐다.

데아론은 걸어가는 중에 고개를 들어 호화로운 불빛을 뿜어내는 황궁 건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저곳에 그 소녀가 있을까?

태양 같은 머리칼과 황금 같은 눈. 누구보다 예쁜, 그리고 누구보다 이상했던 그 아이.

나사 풀린 사람처럼 초면부터 오열하던 와중에도 데아론은 그 이름 모를 소녀가 참 예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그녀는 미인이었다.

누구보다 예뻤으며 누구보다 이상했다. 뜬금없는 대성통곡은 둘째 치고, 데아론은 자신이 말을 낮추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평민으로 산 기간이 훨씬 길기에 데아론은 자주 잊었지만 이제 그가 속한 귀족의 세계는 참 까다로운 곳이었다.

그의 친근한 하대에 첼루나는 화냈어야 마땅했다. 그대는 대체 어느 집안의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례하게 구냐고 따졌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봤다. 잘 가라고 인사했다. 심지어 그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다짜고짜 나이부터 캐묻는 그에게 순순히 대답해 줬다.

‘이상한 사람.’

데아론은 결론지었다. 이상하고, 예쁘고. 그리고 어쩐지 그리웠다.

몇 마디 나눈 게 전부면서 어째서 이런 그리움을 느끼는 건지 데아론은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감정 자체는 분명했다.

‘……오늘 볼 수 있겠구나.’

생각이 이어져, 데아론은 침착하게 절망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올해 열일곱 살이라던 소녀. 오늘 그들은 무도회에서 만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이름을 알아내고, 불륜의 결실로 태어난 나를 경멸하며 외면하겠지.

예정된 결말에 심장이 지그시 아렸다. 데아론은 애써 그 통증을 무시했다.

형제는 함께 나란히 걸어 궁전의 웅장한 대문을 통과했다. 많은 것이 새로 시작된 밤이 그들을 기다렸다.

첼루나의 전생에 데뷔 무도회는 차갑고 외로운 기억이었다.

법적으로 성년이 된 첼루나를 아예 데뷔시키지 않을 수는 없으니, 황제는 마지못해 막내딸의 무도회 참석을 허락했었다.

하지만 죽은 황비를 쏙 빼닮은 얼굴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는 부황을 피해 첼루나는 스스로 그늘 속에 숨어야 했다.

황제에게 막내딸은 사랑하는 후궁이 이승에 남긴 원망스러운 흔적에 불과했다.

그는 광인처럼 첼루나의 외모에 집착했다가, 그녀가 황비를 닮았을 뿐 황비 본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구기며 그녀를 내쳤다.

내가 어머니를 닮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사랑이나마 받아 볼 수 있었을까? 전생의 비참한 순간마다 첼루나는 쓸쓸하게 고민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6년 뒤에 죽을 학대범 따위 더는 내 아비도 아니다.

첼루나에게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데아론, 데아론, 데아론. 오늘 그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를 바라볼 수밖에 없겠지. 다가갈 수도, 닿을 수도 없겠지.

어쩌면 바라보는 것조차 과욕일지 몰라.

황자와 황녀, 그리고 막내 공주는 귀족들보다 먼저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오늘 그 어떤 참석자보다 더 고귀한 그들은 미리 대기하며 손님들을 맞이하는 역할이었다.

“이렇게 입혀 놓으니까 좀 봐줄 만하네.”

블레논은 첼루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흡족하게 끄덕였다.

첼루나는 그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그를 보며 유순하게 웃었다.

텔레스는 밝은 금발과 썩 어울리는 은회색 드레스를 입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올해 스물한 살인 그녀는 벌써 지루해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손님들이 입장하는 순간 따분한 기색을 싹 지우며 우아하게 방긋 웃어 줄 사람이지만.

텔레스도, 블레논도, 첼루나도 전부 훌륭한 배우였다. 서로 가면만 쓸 줄 아는 자들이라 그렇게 부딪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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