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14)

“꼬마야, 괜찮니?”

데아론은 겨우 중얼거렸다. 어린아이는 충격 탓인지 데아론의 품속에서 얼어붙어 꼼짝하지도 않았다.

데아론은 어렵게 일어나 앉았다. 전신의 통증이 짙어졌다.

“세상에, 어떡해, 둘 다 괜찮아요?”

엘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데아론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데아론은 반사적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의 한복판에, 첼루나는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세상에, 피가……. 괜찮으세요? 치료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여기 애부터…….”

데아론.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피가 이렇게 나는데! 뼈가 부러졌을지도 몰라요. 의사를 불러야 해요.”

“아, 아니요, 진짜 괜찮습니다.”

데아론.

“어휴, 고집부리지 마시고. 애야, 뚝!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저기, 제 언니가 근처에 살거든요. 가서 진료도 받고 애도 달래는 게 어때요?”

“아니, 저, 진짜 괜찮은데…….”

데아론.

데아론, 네가, 또 내 앞에서.

예상치 못한 재회였다. 전생에 없던 상황이었다.

과거에 첼루나와 데아론이 처음 만난 건 늦봄 데뷔 무도회, 아직 두 달을 더 기다려야 올 순간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지금 자신이 데아론을 마주한 게 전생의 흐름과 어긋나는 일이라서뿐만은 아니라.

데아론이,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자기 앞에서 다쳐서.

연인을 위해 추격자들과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은 데아론. 어린아이를 구하고자 도로에 뛰어들었다가 사고를 당할 뻔한 데아론.

왜 매번, 어째서 너는, 네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내 앞에서.

“흑…….”

첼루나는 울기 시작했다.

여기서 누가 더 당황했는지 순위를 가리기 힘들었다. 뜬금없이 윗사람의 눈물을 목격한 엘리나인지, 난생처음 보는 소녀를 울려 버린 데아론인지.

안 그래도 정신없는 와중에 아이도 울고, 어른도 울고, 데아론은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으며 엘리나는 공황 상태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어, 음.”

데아론은 길가에 널브러진 채 입을 뻐끔거렸다. 엘리나는 자신이 모시는 황족이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린 게 너무 무서워서 넋이 나갔다. 리암은 계속 훌쩍였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 누구도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 몇 초쯤 흐른 뒤, 엘리나가 가장 먼저 회복했다.

“저기, 그…… 제 언니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자리 이동이 우선이었다.

첼루나는 자신이 매우 비이성적으로 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생 기준으로는 초면인 남자애와 겨우 자기편으로 만들어 둔 시녀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펑펑 우는 게 별로 현명한 짓은 아니라는 것도.

하긴, 머리로 안다고 해서 모든 걸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이딴 식으로 굴러가지는 않았겠지.

첼루나는 계속 애처럼 울음을 쏟았고, 엘리나의 언니와 형부가 제공한 응접실에서 엘리나 본인이 우린 따뜻한 차를 받을 때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드세요, 아가씨. 좀 진정이 되실 거예요.”

“크읍, 훌쩍! 킁, 후우, 그래, 알았어.”

첼루나는 토끼처럼 빨갛게 부은 눈으로 우스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엘리나의 염려하는 시선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다. 갑자기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환자가 된 느낌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하필…….’

하필, 데아론이. 첼루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아론이 여기 있었다.

열일곱 살 소년은 맑고 고운 자색 눈으로 소녀를 걱정스레 살피고 있었다. 엘리나와 비슷한 시선으로.

‘으아아, 창피해!’

첼루나는 내적으로 절규했다. 그녀는 상상 속의 이불을 여러 번 걷어차며 머릿속의 절벽에서 수십 번은 뛰어내렸다.

착한 소년 데아론은 뜬금없이 자기 앞에서 꺼이꺼이 울어 버린 소녀를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다만 매우 이상하고 연약한 생명체를 다루듯 조심스레 물을 뿐이었다.

“저기, 음. 이제 좀 괜찮아?”

‘그건 내가 묻고 싶어, 이놈아……!’

첼루나는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아이를 구하다가 본인이 다쳐 버린 데아론은 찢긴 소매 틈새로 시퍼런 피멍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을 걱정하다니. 너무나 한결같이 본인다운 반응이라 첼루나는 안타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한편, 엘리나는 데아론의 화법을 듣고 경악했다. 반말, 반말이라니? 이렇게 무례할 수가!

첼루나가 황족이라는 사실은 둘째 치고, 귀족들의 까다로운 사회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낮추는 건 엄청난 무례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평민으로 살았던 데아론은 그런 거추장스러운 예법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았다. 다짜고짜 쌍욕이라도 퍼붓지 않는 한, 고작 반말이 뭐가 그리 무례하다고?

첼루나가 나이 지긋한 중년이었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제 또래로 보이는 그녀에게 소년은 다정한 하대를 건네 놓고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어, 응. 괜찮아.”

첼루나는 얼결에 본인도 하대하며 중얼중얼 대답했다. 짠물로 퉁퉁 부은 얼굴이 부끄러워 차마 데아론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참극이람. 왜 하필 이번 생의 첫 만남이 이따위란 말인가.

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맥락도 예고도 없이 초면부터 질질 짜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이?

데아론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서러웠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 훨씬 유쾌하고 정상적인 추억이 많은데, 너는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는구나.

‘차라리 다행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이번 생에는 멀리하려고 했잖아.’

첼루나는 절박한 자기 세뇌를 시작했다. 다행이다, 차라리 다행이야,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이번 생에 내 목표는 텔레스 언니를 위한 첩자가 되는 거고, 그러려면 겉으로나마 데아론의 가문을 적대해야 하며, 어차피 나는, 이번 생에 그가 나와 엮이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착한 네가 또 나 때문에 희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해. 네가 기왕이면 다른 좋은 이를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 다행이야. 다행이라고. 차라리 다행…….’

오래오래, 행복하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자기 세뇌는 실패했고 첼루나는 또 하릴없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어, 울지 마!”

데아론은 혼비백산했다. 엘리나는 기절하고 싶어졌다.

그나마 리암은 엘리나의 언니가 의사에게 데려간 뒤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첼루나가 우는 걸 보고 리암까지 덩달아 훌쩍이기 시작했다면, 데아론과 엘리나의 정신 건강이야말로 심각한 해를 입었으리라.

데아론은 황망하게 손을 뻗었다. 그의 살이 첼루나의 뺨에 닿았다. 첼루나는 아까 울음을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뚝 그쳤다.

“괜찮아?”

데아론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귀족들의 까다로운 예법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이 아는 상식대로 행동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우는데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위로를 시도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따뜻하게, 부드럽게.

엘리나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아찔해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데아론을 쏘아보는 시선이 섬뜩했다.

이제까지는 공주님이 무슨 영문인지 자기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시는 듯해서 침묵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더는 소년의 무례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엘리나.”

첼루나가 불쑥 불렀다. 그녀는 데아론에게 시선을 박은 채 단호한 저음으로 시녀에게 지시했다.

“부엌에 가서 차를 좀 더 우려 줄래?”

나가라는 뜻이었다. 엘리나는 멈칫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공주궁 시녀들마저 첼루나의 지시를 밥 먹듯 무시하던 시절은 이제 과거였다.

지난 4년간 공주궁의 위계는 명확해졌고, 이제 엘리나는 감히 공주의 뜻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그런즉, 지금 엘리나는 제게 내려진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첼루나는 자기 신분을 소년 앞에서 밝히고 싶지 않았고 그와 단둘이 있기를 원했다. 그게 공주님의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이상 복종해야 할 텐데. 엘리나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나.”

첼루나의 음성이 조금 더 낮아졌다. 그건 분명한 경고였다.

엘리나는 흠칫 떨었다. 그녀는 문득, 4년 전 공주님께서 철들기 전 얼마나 포악했는지 두렵게 떠올렸다.

“네, 아가씨.”

엘리나는 결국 깍듯이 인사한 뒤, 서둘러 뒤돌아 부엌으로 향했다.

응접실 안에는 소녀와 소년만 남았다. 데아론은 첼루나가 울음을 그친 걸 보고 그녀의 뺨에서 손을 뗐다.

“좀 나아졌어?”

소년이 물었다. 그의 손에는 소녀의 뺨에서 옮겨붙은 끈적한 물기가 남아 있었다. 괜히 살갗이 뜨뜻해서 데아론은 손가락 끝끼리 살짝 문질렀다.

“응.”

첼루나가 속삭였다. 그녀는 데아론을 하염없이 뜯어보았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회귀한 게 4년 전. 즉, 마지막으로 데아론을 봤던 것도 4년 전이었다. 그리고 열일곱 살 데아론을 만난 건 무려 10년 전이었다.

4년, 또는 10년 만에 만난 연인이 낯설고도 낯익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데아론. 그래서 너무 낯선 데아론.

앳된 얼굴과 매끈한 턱도 전부 생경했다. 전생의 마지막 기억은 스물세 살 건장한 청년을 담아 냈으므로, 지금 눈앞의 풋풋한 소년은 괴리감을 불렀다.

동시에, 너무 낯익었다. 낯익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기억과 다르면서도 기억과 똑같았다.

들꽃을 닮은 청명한 홍채. 온화한 눈매와 반듯한 콧날,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칼, 귓불과 입술과 속눈썹까지.

6년의 세월이 흐르면 저 싱그러운 이목구비는 짙어지며 깊어질 테고 완연한 어른의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전생의 마지막에 데아론은 연인을 대신해 칼을 맞았다.

첼루나는 이를 꾹 물었다. 또다시 소년 앞에서 엉엉 울어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그녀는 속으로만 비명을 질렀다. 결코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으리라.

정말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싶지 않은 한, 자신이 이미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며 전생에 저들이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함부로 지껄일 수 없을 테니.

‘사랑해.’

그리고 설령 회귀에 대한 자신의 고백이 헛소리로 치부되지 않더라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절대, 이번 생에는 너를 나와 사랑에 빠트리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에 너는 내 연인이 되지 않을 거야.

이번 생에는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자기 마음의 방향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를 사랑했다. 예전부터 그를 사랑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사랑하리라.

자기 혼자 사랑하고 자기 혼자 아파하며 평생 진심은 침묵에 가둘 테니 이번 생에 데아론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그 누구를 위해 희생하지도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했다.

‘사랑해, 데아론.’

이 끔찍한 고통은 나 혼자 알면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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