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14)

분명 자신과 앰벌리는 언젠가는 엮일 것이다. 아무리 엮이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블레논 황자와 텔레스 황녀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황자의 동생인 첼루나와 황자의 기사인 앰벌리는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생에는 황녀를 위한 첩자가 된다면, 더더욱.

어차피 엮일 수밖에 없는 관계라면 미리 친해지면 좋을 텐데. 최소한, 상대방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미리 파악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첼루나는 앰벌리를 종잡을 수 없었다.

왜 저렇게 내게 반감을 드러낼까? 전생에는 안 그랬으면서. 오히려 내게 친절한 편이었으면서. 적어도 내게 잔인하지는 않았어.

영문을 모를수록 혼란은 짙어졌고, 그럴수록 첼루나는 앰벌리가 불편해졌다.

전생을 기억하는 첼루나는 남들보다 조금 유리했다. 주변의 누가 어떤 사람이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그녀는 나름 세세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앰벌리 라크문. 저 인간은 정말이지 미지의 세계였다. 불안한 변수였다. 그런 걸 원한 적 없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의 통제 범위 안이어야 했다.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대로 상황과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훗날 목표를 달성하기 쉬워질 테니까.

이번 생에는 데아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야 하는 첼루나는, 그것들을 무력화하는 앰벌리의 존재가 퍽 껄끄러웠다.

‘날 싫어하는 건지, 뭔지, 지금은 왜 또 저러는지……. 차라리 일관성이라도 갖추라고, 이놈아.’

뜻밖에도 첼루나에게 반감을 보이던 앰벌리는 언젠가부터 태도가 돌변하더니, 공주를 볼 때마다 자기가 먼저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하곤 했다.

그 변화가 첼루나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이 또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변수, 선뜻 써먹을 수 없는 대상이었으므로.

‘뭐, 내가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봤자 당장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일단 잊자.’

그래, 그딴 놈이야 일단 잊자. 첼루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을 집중했다.

오늘은 전생에 익사한 아이를 구하는 날, 중대한 계획이 있었으므로.

첼루나와 엘리나는 마차에 올랐고 곧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리암은 올해 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여덟 살 꼬마들이 자주 그렇듯, 자신이 이미 클 대로 다 컸다고 믿는 편이었다.

자기는 혼자서 잘만 놀 수 있는데 계속해서 감시하고 훈계하며 자유를 억압하는 어른들의 폭정에 리암은 분노했다.

하여, 폭정에 대한 저항으로 리암은 오늘 시내에서 유모를 몰래 따돌렸다.

유모가 꼬마 도련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아동용 모자를 신중하게 고르는 동안, 리암은 짤막한 다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다람쥐처럼 도망쳤다.

리암은 시내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변으로 향했다.

어른들은 물가가 위험하다며 그가 모래밭에서 혼자 노는 것조차 금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거대한 모래성을 쌓는 게 꿈이었던 리암은 어른들의 경고를 가뿐히 무시했다.

강에는 물이 콸콸 흘렀다. 최근에 꾸준히 내린 봄비가 수량을 위태롭게 불려 놨음을 어린이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무식해서 용감한 어린아이는 겁도 없이 강 언저리까지 바짝 다가갔다. 생각보다 탁한 물살이 무척 신기해서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웃거렸다.

‘물이 녹색이네?’

리암은 충격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빛이 섞인 암녹색에 가까웠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해는 빨간색, 물은 파란색으로 단순하게 색칠해 온 리암은 새롭게 깨달은 진리 앞에서 고개를 엄숙하게 끄덕였다.

‘물이 꼭 파란색은 아니구나.’

호기심만 많고 안전 의식은 없는 꼬마는 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곳에 절대 고이는 법 없이 콸콸콸 흘러가는 물결이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만져 볼까? 만지고 싶었다.

아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얘야!”

누군가 급히 외쳤다. 리암은 흠칫 놀랐고, 물속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가 흙탕물에 풍덩 빠지기 전, 가녀린 팔이 그의 허리를 감쌌다.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리암은 난생처음 보는 어른이었다. 어른, 어른인가?

열일곱 살이면 여덟 살짜리가 보기에 매우 크긴 하지만, 확실히 리암이 아는 다른 어른들에 비해선 앳된 얼굴이었다.

단순히 앳되기만 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예뻤다. 그건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회성에 찌든 어른들과 달리 어린아이는 말을 거르는 법을 잘 몰랐다.

그래서, 리암은 자신을 다급히 잡아챈 빨간 머리 소녀를 올려다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우와, 예쁘다.”

첼루나는 당황했다. 당황은 짜증으로 바뀌었다.

자기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정작 사고를 당할 뻔한 당사자는 태평하게 외모 품평이나 하고 있다니.

“얘, 꼬마야.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니? 물에 이렇게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는 거 몰라?”

그냥 남의 얘기를 주워듣는 것과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건 서로 차원이 달랐다.

오늘의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첼루나에게 아이는 인격체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과 우연히 같은 세상에 공존하게 된 누군가일 뿐.

아이를 전혀 모를 때 그의 익사는 그저 끔찍한 사고, 애도할 만한 비극, 그리고 언젠가는 잊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살아 호흡하는 자그마한 꼬마가 앙증맞은 온기로 자기 품속에서 꼼지락대는 순간, 첼루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렇게 작은 애였나?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니 이전에는 알 길이 없었다. 원래 여덟 살이 이렇게 작아? 아, 모르겠어. 이전까지는 몰랐어.

이렇게 작고 따뜻하고 연약한 생명체가, 만약 자신이 오늘 여기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죽을 뻔했다. 혼자, 외롭게, 고통스럽게.

첼루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쳇, 누군데 갑자기 잔소리예요?”

아이는 상대방의 미모에 대한 감격도 잊고 볼을 꿍하게 부풀렸다. 낯선 어른의 예고 없는 잔소리에 충분히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첼루나는 만약 자신이 이 꼬마였다면 비슷하게 반응했을 거라는 생각도 잊고 그의 빵빵한 볼을 콱 꼬집었다. 리암이 버둥거렸다.

“아야! 갑자기 왜 이래요?”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잔소리는, 무슨.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란다.”

첼루나는 딱딱거린 뒤, 한숨과 함께 소년의 볼을 놔주었다.

리암은 물기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첼루나를 노려보았다. 첼루나는 묵직하게 한숨지었다.

“같이 가자. 네 유모한테 데려다줄게.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거든.”

첼루나는 충동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못 하겠어. 엄마와 유모와 아이를 아끼는 다른 사람들이 혼비백산 찾는 동안 아이를 숨긴 채 침묵하는 건, 정말 못 하겠어.

“제 유모를 아세요?”

리암은 뜨끔해서 물었다. 그는 유모의 잔소리가 귀찮았고 부모님이 그를 과보호한다고 당돌하게 생각했지만, 그들을 걱정시키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응, 알아. 네 어머니도 알고. 사실 나는 네 어머니 친구야.”

첼루나는 대강 둘러댔다. 사실 나는 이 나라 황제의 딸이야, 라고 소개하기가 퍽 껄끄러웠다.

어차피 여덟 살 꼬맹이가 공주의 얼굴을 알지는 못할 터. 거짓말은 쉽게 먹혔다.

“……저기, 어머니한테는 제가 오늘 여기 온 거 비밀로 해 주세요.”

아이는 절절매며 속삭였다. 첼루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음산하게 쏘아붙였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첼루나는 리암을 모래밭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가 휘청거리다 물에 빠지기 전에 그의 손을 휙 붙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모래밭을 빠져나왔다.

“공—”

“엘리나, 우리 이 아이의 유모를 함께 찾아볼까? 아이가 혼자 놀고 있던데.”

엘리나가 허둥지둥 다가오며 익숙한 호칭을 부르는 순간, 첼루나는 냉큼 시녀의 말을 무질렀다.

엘리나는 당황하여 주춤했으나 역시 이번에도 눈치 빠르게 알아들었다. 그녀가 끄덕였다.

“네, 아가씨.”

첼루나는 리암의 손을 잡고 큰길로 올라왔다. 엘리나가 가깝게 뒤따랐다. 첼루나가 리암에게 물었다.

“얘야, 마지막으로 네 유모를 어디서 봤니?”

원래는 최소 한두 시간쯤은 데리고 있다가 황녀 시녀장에게 직접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계획이 바뀐 이상 아이 유모에게 곧장 가는 게 목표였다.

“음, 제 모자를 고르고 있었어요.”

리암이 작은 입으로 종알종알 말했다. 모자라. 첼루나는 엘리나를 돌아보았다.

“시내에서 고급 아동복을 파는 곳이 어디지?”

“일단 길을 건너셔야 할 거예요.”

수도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는 엘리나가 즉시 답했다. 이어, 그녀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가씨, 아이는 제가 데리고 걷겠습니다.”

고귀하신 황족께서 보모 역할을 떠맡다니, 안 될 말씀. 성실한 시녀는 윗사람의 수고를 덜어 주고자 했다.

첼루나는 손힘을 느슨히 풀었다. 이제부터는 이분의 손을 잡고 걸으라고, 리암에게 말하고자 입술을 떼며.

아주 잠깐이었다. 그리고 원래 이 세상 많은 일이 고작 찰나에 걸쳐 일어난다.

“어, 유모다!”

길 건너편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 아이가 해맑게 외쳤다. 곧이어 다람쥐처럼 빠르고 바위처럼 무식하게 길에 뛰어들었다.

아이는 그저 길을 건너고 싶었을 뿐이다. 큰길 위의 말과 마차는 아이의 계산 밖이었다.

엘리나는 비명을 질렀고, 첼루나는 그조차 하지 못해 얼어붙었다.

퍽! 소리가 아프게 울렸다.

데아론은 집에 있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온종일 되도록 오래오래 싸돌아다니려 애썼다.

후작가 사용인들은 둘째 도련님이 점잖지 못하게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닌다고 흉보기 일쑤였으나 데아론은 차라리 그게 편했다. 어차피 그런 게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니까.

내가 내 형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존재임을 거듭 입증하는 것.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였으니 그는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오늘 오후에도 데아론은 우울하게 길가를 헤매고 있었다. 명색이 후작가 도련님이었으나 그의 곁에 따라붙는 호위나 시종은 없었다.

바로 그때, 데아론은 똑똑히 보았다.

“꺄아악!”

어느 여인이 비명을 지르기 직전, 데아론은 땅을 박차 길에 뛰어들어 아이를 감쌌다.

만약 그의 운동 신경이 조금만 둔했다면 본인과 아이 모두 마차에 치이는 참극이 일어났겠지만, 결과적으로 다친 건 본인뿐이었고 마차와의 충돌은 없었다.

“윽…….”

길바닥을 장렬하게 구른 데아론은 온몸이 욱신거리는 감각 덕분에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죽은 상태에서 이렇게 아플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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