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황후궁으로 끌려가 기사들을 깔아뭉갠 것에 대한 질책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달리, 첼루나의 일상은 평화롭게 이어졌다.
그사이 동생을 향한 블레논의 태도는 점점 유해졌고, 황제는 막내에게 한결같이 냉담했으며, 황자와 황녀의 대립은 점점 물밑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첨예해졌다.
그러다가 어느새, 첼루나는 두 번째로 열일곱 살이었다. 회귀한 지 4년째, 사교계에 데뷔하는 해였다.
여전히 부황에게는 찬밥 취급을 받아도 이제 공주궁과 황자궁에서만큼은 골고루 존경받는 그녀는, 날을 신중히 골라 외출을 준비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이 이날이야.’
달력을 만지작대며 첼루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난 생에 텔레스의 충실한 시녀장이 크나큰 슬픔에 빠져 끝내 시녀장 자리까지 사임했던 걸 기억했다.
‘장소도 기억나. 아이가 빠져 죽은 곳…….’
시녀장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수도 시내에서 놀다가 실수로 강에 빠져 익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유모가 잠깐 한눈판 사이 혼자서 놀겠다고 쪼르르 도망친 꼬마. 강변 모래밭. 아이는 물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고 발을 헛디디는 순간 추락했다.
아이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된 곳은 아이가 처음 물에 빠졌던 곳으로 추정됐다.
이후, 그 지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됐다.
첼루나는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을 잘 몰랐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보면 부모의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강하며 숭고하다 하지만 글쎄. 부황을 볼 때마다 그녀는 회의감에 잠겼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 그 시녀장을 떠올리면 어떤 부모는 정녕 자기 자식을 목숨처럼 아끼는 듯했다.
아이를 비명에 보낸 뒤 완전히 망가져서, 얼마 못 가 시녀장은 궁을 떠났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첼루나는 고민했다.
날짜도, 장소도 기억난다. 자신이 그날 우연인 척 외출해서 강변에 혼자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부모에게 데려다주면, 비극의 되풀이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는 고결한 이유 외에도, 첼루나는 나름의 계산적인 동기가 있었다.
‘사고를 막고 아이를 잠깐 데리고 있다가, 찾는 쪽에서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면.’
전생에 아이가 익사체로 발견되기 전,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몇 시간 동안 아이는 사망이 아닌 실종으로 여겨졌다.
이번에도 유모가 아이를 놓친 이후 사람들은 한동안 시내를 샅샅이 뒤질 것이다.
그전에 첼루나는 아이의 신변을 무사히 확보하되, 그를 바로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 아이를 돌려받은 입장에서는 내가 은인이 되겠지.’
상대방이 정말로 애가 달았을 때, 그제야 아이를 돌려받는다면 그만큼 고마움과 감격도 극에 달할 테니.
만약 첼루나가 아이가 있는 엄마였다면 감히 그런 발상조차 떠올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찾았으면 바로 엄마한테 데려가야지, 엄마 속이 타들어 갈 동안 아이를 꼭꼭 감춘 채 보여 주지 않겠다고? 사악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냉소적인 첼루나는 기꺼이 그런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도덕과 양심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 본 적 없는 그녀다.
그녀의 목표는 이복 언니의 시녀장에게 환심을 사는 것, 또한 현재 시녀장이 사임하여 새 시녀장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거였다.
전생에 사임한 옛 시녀장의 후임은 개인적으로 라토르 공작가에 원한이 깊은 자였다.
게다가 매우 똑똑하기도 해서, 그녀 때문에 블레논 진영은 상당히 골치를 썩였다.
‘블레논은 단지 머리 좀 아프고 말았겠지만.’
첼루나는 음울하게 회상했다. 블레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첼루나의 삶은 거의 지옥이었다.
블레논과 마찬가지로 황비 소생인 첼루나, 그러나 항상 더 만만한 첼루나.
새 시녀장의 집요하고 교활한 악의는 늘 첼루나를 더 끔찍하게 괴롭혔다.
‘이번 생에는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아.’
첼루나의 최종 목표는 텔레스를 돕는 거였다.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그녀는 당분간 표면적으로나마 블레논을 따라야 했다.
첩자 노릇을 제대로 해내려면 텔레스를 제외한 다른 모두는 첼루나가 블레논 편이라고 믿어야 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첼루나는 이번 생에 데아론을 멀리하고자 했고, 텔레스의 시녀장이 바뀌는 것도 막고 싶었다.
전생에 앰벌리가 그러했듯 막판까지 자기가 블레논 편이라고 남들을 속이려면 데아론의 가문도 적대해야 했고, 텔레스의 시녀장과도 대립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아이를 구하자.’
아이도 구하고, 황녀 시녀장에게 눈도장도 받고, 무시무시한 후임 시녀장의 입궁도 차단하자.
현재 시녀장이 제게 조금이나마 호의를 품게 된다면, 나중에 혹시라도 자신이 예정보다 일찍 공개적으로 텔레스를 지지해야 할 때 도움이 될까 싶었다.
현재 황녀궁 사람들은 첼루나에게 과하게 적대적이었다.
그럴 만도 하긴 했으나, 궁극적으로 그들과 협업해야 하는 첼루나로서는 그 맹렬한 적의가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미리 관계를 조금 누그러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쨌든 나는 결국에 오빠가 아닌 언니를 따를 텐데, 언니의 사람들이 나를 너무 미워하면 좀 그렇잖아. 슬슬 황녀궁 쪽에서도 작업을 시작할 때였다.
세세한 궁리 끝에 첼루나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시녀장의 아들이 사라지는 날, 그러나 아직 첼루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를 알지 못하는 때였다.
때마침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긴긴 겨울 끝에 찾아온 초봄이었다.
첼루나는 창밖으로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가지 사실을 되새겼다. 아, 예나 지금이나 날씨는 똑같이 되풀이되는구나. 전생 이날에도 창공은 똑같이 청명했던 것 같다.
첼루나는 엘리나 한 명만 데리고 방을 나왔다.
황족치고 수행 인원이 늘 적은 건 홀대의 표시였지만, 첼루나는 이편이 차라리 편했다. 동행 인원이 적을수록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까.
게다가 적은 인원이 홀대의 표시라는 사실 자체가 첼루나에게 나름 유리하게 작용했다.
고작 시녀 하나만 달랑 데리고 돌아다니는 첼루나는 황족치고는 초라해 보였고, 겸손해 보였고, 가련해 보였다.
첼루나는 여전히 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여 아군을 만들었다.
보호 본능 자극하는 우리 외로운 막내 공주님. 사람들은 애정에 가까운 연민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호위는 필요 없으시겠습니까, 공주님?”
엘리나가 안타깝게 물었다. 지난 4년간 그녀는 뼛속까지 첼루나의 사람이 되었다.
“응, 괜찮아. 잠깐 시내에 다녀오는 건데, 뭐.”
첼루나는 온화하게 빙그레 웃었고, 그 한결같이 유순한 모습에 엘리나는 또다시 감동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엘리나는 새삼 되새겼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여기 첼루나 공주님은 완벽한 반례이시다.
엘리나가 혼자 착각에 빠져 애틋해하는 동안, 첼루나는 사뿐사뿐 후원을 가로질러 자신을 기다리는 마차로 향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앗.”
모자 끈이 제대로 안 묶인 듯했다. 리본이 스르륵 풀렸고, 첼루나의 모자는 두둥실 날아올라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해처럼 빨간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첼루나는 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 더 빨랐다.
첼루나보다 더 단단하고, 크고, 굳은살이 박여 살짝 거친 손이 느닷없이 나타나 모자를 낚아챘다.
“공주님.”
정중한 미성이 불렀다. 첼루나는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라크문 경.”
올해 열아홉 살이 된 앰벌리 라크문이었다. 이태 전 성년의 나이를 지난 그는 이제 소년보다 청년에 가까웠다.
단단한 어깨가, 굵어진 목선이, 그가 더는 아이가 아닌 남성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앰벌리를 발견한 엘리나가 얼굴을 붉혔다. 딱히 그에게 연정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어른이 된 앰벌리는 미술품처럼 수려했다. 그를 보고 홍조를 띠거나 잠깐 멍해지는 건, 그저 지극히 반사적인 신체의 농간이었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오직 첼루나만 무덤덤했다. 앰벌리가 공손히 건넨 모자를 첼루나는 살짝 손끝으로만 건네받았다.
“모자를 잡아 줘서 고마워.”
첼루나는 서늘하게 인사했다. 이어, 거북한 마음을 담아 질문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지?”
황자궁 소속인 그대가 어째서 공주궁 후원인 이곳에 있어? 첼루나가 잔뜩 의심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그가 선선히 설명했다.
“황자 전하의 명을 받들어 황제궁으로 심부름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황족들의 처소는 서로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이 아니었다.
공주궁은 다른 궁과도 매끄럽게 연결되었고, 황자궁에서 황제궁으로 가는 지름길은 공주궁을 가로지르는 거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사과드립니다, 공주님.”
그래도 어쨌든 자기 후원을 통로 취급했다는 사실에 황족은 얼마든지 짜증을 낼 권리가 있었다.
앰벌리는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첼루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 어서 그대의 갈 길을 가게.”
구태여 그의 무례를 꾸짖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사과를 구구절절 받아 줄 것도 아니었다.
첼루나는 그저 앰벌리 라크문과 최소한의 접점만 있었으면 했다. 그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회귀 초반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엘리나는 온순하고 상냥하신 공주님이 갑자기 날카로운 냉기를 뿜으시자 조용히 당황했지만, 지혜로운 시녀답게 눈치 없이 질문하지 않았다.
앰벌리는 끝까지 정중하기만 했다. 그는 깍듯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황송합니다, 공주님.”
첼루나는 앰벌리를 지나쳤다. 엘리나는 총총히 공주를 뒤따랐다. 앰벌리는 굽혔던 허리를 폈고, 멀어지는 공주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연청색 눈에는 불꽃이 있었다.
‘기분 나빠.’
한편, 첼루나는 굳은 얼굴로 척척 걸었다. 그녀는 앰벌리를 곱씹었다. 전생의 앰벌리도, 현재의 앰벌리도, 전부.
‘정말이지, 어떤 놈인지 알 수가 없다니까.’
회귀 초반, 첼루나는 다른 모두에게 그러했듯 백치미와 가식을 무기 삼아 앰벌리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무참하게 거절당했고 이후 몇 번 상냥하게 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첼루나는 포기했다. 그러나 포기했다고 후련한 건 아니었고 찜찜함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