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서는 내내, 이번 생에서는 열세 살 여름 전까지 첼루나는 모두에게 비웃음당하는 존재였다.
현재 그녀의 평판은 파격적으로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녀를 업신여기는 자들은 남아 있었다.
특히 황후궁 사람들은 까다로웠다. 황제와 황후, 황자와 황녀 중에 첼루나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황후여서일까.
황제는 첼루나를 미워했지만 아들은 예뻐했다. 적어도 황제가 아들을 향한 불만까지 싸잡아 딸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없었다.
황후는 블레논도, 첼루나도 싫어했다. 제 남편이 다른 여자를 통해 낳은 자식들이니 예뻐 보이기는 힘들 것이다.
황비의 두 자식이 객관적으로 사랑스러운 성격이었다면 황후도 그들을 너그럽게 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블레논은 황후에게 불손했고, 첼루나는 회귀 전까지 까칠하게 날을 세우며 황후가 보인 모든 화해의 시도를 튕겨 냈다.
언제부턴가 황후는 블레논, 첼루나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포기했다.
특히 최근, 텔레스와 블레논이 슬슬 본격적인 대립을 시작하면서 황후의 팔은 명백하게 안으로 굽었다.
최소한 황후 본인은 직접 블레논과 첼루나를 불러 괴롭히는 품위 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 블레논의 경우 황제가 워낙 예뻐해서,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만만한 쪽은 항상 첼루나였다. 주인을 향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황후궁 사람들이 적대하는 대상도 첼루나였다.
그 비겁한 작자들은 블레논 황자에게, 심지어 첼루나 공주에게 당당히 삿대질할 배짱도 없으면서 공주궁의 하녀들과 하인들을 붙잡아 모욕을 주곤 했다.
‘지긋지긋한 놈들, 진짜!’
첼루나는 내적으로 씩씩대며 폭풍처럼 다가갔다. 이번에 표적으로 낙인찍힌 하녀들이 유달리 작고 앳된 애들이라는 점에서 화가 더욱 치밀었다.
‘일부러 가장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서 말이야. 비겁한 새끼들.’
첼루나는 항상 저런 부류를 가장 혐오했다. 자신을 학대하는 황제와 황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할 거면서, 힘없는 공주인 자신을 뻔뻔하게 짓밟던 이들.
적어도 첼루나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까칠했다. 이 때문에 전생에 그녀는 자기편이 하나도 없었지만 적어도 약자만 골라 화풀이하는 저열한 전적은 없었다.
난폭한 발소리가 다가오자 기사들은 주춤했다. 공주궁 하녀들을 괴롭히던 황후궁 호위병들이 돌아보았다. 첼루나를 발견하자 그들은 몹시 무례하게 웃었다.
“이런,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한 명이 과장된 몸짓으로 첼루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이들도 얼추 따라 했다.
희롱당하던 하녀들은 각자 얼굴이 새하얗거나 새빨갰고, 엘리나는 입술을 깨물며 호위병들을 노려보았다.
“야.”
그리고 첼루나는, 짜증 때문에 이성이 마비됐다.
“그대들이 그러고도 기사야?”
안 그래도 데아론을 생각하느라 심란해 죽겠는데. 머리 좀 식히려고 산책을 나왔는데. 왜 또 네놈들이야. 왜 매번 너흰데?
“내가 너무 멍청해서 기사도의 뜻을 헷갈린 건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건 아닌 것 같거든. 자기보다 몸집 작고 나이 어린 여자들을 골리는 게 기사돈가? 무뢰배의 유희 아니고?”
“저기, 공주님.”
기사는 충격받은 눈빛이었다. 나머지도 비슷하게 얼빠진 표정이었다.
과거의 성질 더러운 첼루나 공주는 사라지고, 나긋하고 유약하며 소심한 첼루나 공주가 활동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옛날 첼루나가 돌아왔다.
“존경하는 황후 전하께서 지금 그대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아시는지 모르겠네.”
첼루나는 씹어 뱉었다. 공주가 기어코 황후까지 언급하자 하녀 하나는 숨을 삼켰고, 엘리나는 입을 떡 벌렸으며, 나머지는 얼어붙었다.
“내가 아는 황후 전하는 기품 있고 지혜로운 분이신데, 가끔 그대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는 걸 보면 의아할 정도야. 아니면 설마, 모르고 계시나?”
“공주님!”
또 다른 기사가 격분해서 외쳤다. 이제 그들은 대체로 푹 삶은 토마토 색깔이었다.
첼루나는 그들의 분노를 보고 픽, 비웃었다. 이 또한 오랜 습관이었다.
“왜. 나한테 화가 나? 감히?”
전생에 첼루나는, 무려 23년간 첼루나는 짓밟히는 게 익숙했다.
그리고 짓밟힐수록 오기가 치미는 더러운 성질머리 덕분에, 보통의 우아한 황족은 상상도 못 할 화려한 독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줄줄이 읊는 재주가 있었다.
지난 2년간 첼루나는 회귀 직후 정한 전략대로 자신의 본모습을 꾹꾹 억눌러 왔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인간이었다. 한낱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가끔 폭발한다.
“내가 황제 폐하의 딸이라는 걸 그대들은 가끔 잊는 것 같아.”
첼루나는 즐겁게 쏘아붙였다. 이제는 울분을 넘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기사들을 보고 첼루나는 사납게 방글거렸다.
아, 저놈들이 듣기엔 얼마나 우스울까. 얼마나 답답할까.
첼루나가 황제에게 딸 취급도 못 받는다는 사실을 온 나라가 아는데, 그걸 또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첼루나는 부조리한 신분제를 비웃고 케케묵은 혈통주의를 경멸했다. 그딴 게 다 뭐라고.
고작 그딴 신분 때문에, 지금 이놈들은 내 아랫사람은 실컷 괴롭히면서 정작 내 앞에서는 위선적으로 망설인다.
고작 그깟 혈통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데아론은 전생에 온갖 천대를 견뎌야 했다. 어머니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첼루나는 그 모든 게 씁쓸하고 지겨웠다. 지금 자신이 이 기사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도 그녀가 허울이나마 황족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도 이놈들과 같은 수준인 걸까? 나도 똑같이 비겁한가?
나를 딸 취급도 하지 않는 황제 폐하를 들먹이며 이들의 곤란한 표정을 즐기고 있으니, 어쩌면 나도 똑같이 저열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자, 어서 그대들이 불량배처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사과해. 진심으로 정중하게 사과해야만 하네. 그리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그럼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지.”
첼루나는 여전히 예쁘게 방싯대며 기사들을 포악하게 압박했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씩 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선을 넘는 걸까 봐 겨우 참았다.
‘뭐, 황후 전하를 언급했을 때 이미 선을 넘은 것 같지만.’
첼루나는 아주 살짝만 반성했다. 이런 지저분한 언쟁에 황후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건 확실히 무모하긴 했다.
그래도 변명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첼루나는 전생 때부터 눈앞의 바로 이 기사들에게 사적인 원한이 있었다.
블레논이 패배하고 첼루나도 덩달아 몰락했을 때, 황후의 기사들이 그녀를 연행하러 왔다.
그때 면전에서 비웃음에 음담패설을 섞으며 그녀를 끌고 가는 척 은근슬쩍 더듬어 대던 그들을 첼루나가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공주님, 아뢰옵기 송구하지만. 정확히 저희가 어떤 일로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 건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때, 기사 하나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아까 첼루나가 황후를 에둘러 비난하자 그녀에게 언성을 높였던 작자였다.
“뭐?”
그 철면피에 첼루나는 역으로 당황했다. 그자의 동료들도 전부 경악했다.
“억울합니다, 공주님. 저희는 맹세코 공주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기사는 당돌하게 우겼다. 그의 동료들은 이제 울상이었다.
고작 천덕꾸러기 공주에게 치욕을 당한 게 분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여기서 공주에게 대들어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첼루나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분명 황족이었다.
아무리 딸 취급 못 받는 버린 자식이라도 그녀의 몸에는 황제의 피가 흘렀다.
공주 앞에서 우회적으로 빈정대는 것까지는 할 수 있어도, 이토록 직설적인 명령마저 거부하는 건 신분제 사회에 길든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 지금 이성을 잃고 결백을 주장하는 기사 놈은 조금 덜 비겁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감히 황족 앞에서도 한결같이 뻔뻔하니까.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어?”
이제 첼루나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눈앞의 기사는 그녀보다 신체적으로 훨씬 위협적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분노에 눈이 멀어 공포를 느낄 틈이 없었다.
“내가 그대에게 무릎 꿇고 땅에 이마를 박으라고 명해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겠는가?”
씹어 뱉는 언어가 차가웠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움찔했고, 가장 불손한 기사마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과해.”
명령. 이건 명령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자가 거부한다면 첼루나는 선이고 뭐고 그의 뺨을 칠 예정이었다.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기사를 꿰뚫었다. 불손한 놈은 잠시 쭈뼛대다가 끝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제야 첼루나는 다시 웃었다. 아름답고 나긋하여 더욱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응, 잘했어. 그리고 이 애들한테도 사과해.”
그동안 숨도 못 쉬고 구석에 쭈그려 있던 하녀들은 공주가 짧게 손짓하자 흠칫 떨었다.
기사들은 하나둘씩 사죄의 말을 웅얼거렸다. 하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꺼져.”
아직 분이 덜 풀린 첼루나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기사들은 헐레벌떡 복종했다.
“둘 다 괜찮니?”
첼루나의 음성이 팍 누그러졌다. 앳된 하녀들을 돌아보는 눈빛이 진심으로 상냥했다.
“네…….”
“네, 공주님.”
그들이 각자 버벅거렸다. 첼루나를 향한 그들의 시선은 수줍은 경외로 반짝였다.
공주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라면 몰라도, 허드렛일을 맡은 하녀에게 자신의 주인은 하늘나라 천사처럼 머나먼 존재였다.
그토록 아득하고 고귀하신 황족께서 방금 저들을 도우셨을뿐더러 지금은 직접 말을 걸어 주시니, 그들은 이 상황이 황송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황제 폐하께 딸 취급도 못 받는 천덕꾸러기 공주라 하지만 우리 같은 아랫것들에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어쨌든 황족은 황족이시다. 그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두 하녀는 공주에게 진심으로 예를 갖췄다.
얼결에 추종자 둘을 추가로 얻은 첼루나는 기뻐하려 애썼다.
자신이 누군가를 불쾌한 경험에서 구했다는 사실도 뿌듯했고, 어쨌든 아까 그 기사들을 제압한 것도 후련했다.
하지만 찜찜함은 남았다. 자신이 황후의 사람들을 상대로 너무 세게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이미 늦었지, 뭐.’
그래도 결국은 엎지른 물이었다. 첼루나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를 갈무리하며 하녀들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하녀들의 마음에 공주님을 향한 경애가 새롭게 샘솟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상황을,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 누군가 근처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