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아이구나. 내 남편을 닮아서.”
써늘한 손으로 멋대로 소년을 틀어쥔 여인이 아이의 뽀송뽀송한 얼굴을 뜯어보며 평했다. 데아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묵했다.
“그런데, 눈은.”
여인의 손이 소년의 뺨에 닿았다. 수직으로 세운 손톱이 눈꼬리까지 천천히 올라오자 데아론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전혀 안 닮았네?”
여인의 눈은 부드러운 갈색이었다. 그 갈색에 언뜻 광기가 비쳤다.
죽은 엄마를 닮아 홍채가 제비꽃색인 소년은, 그날 처음으로 사람이 무서워졌다.
“어머니!”
여인이 아이의 눈을 찌르기 직전, 누군가 사납게 외쳤다.
여인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데아론의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유령처럼 활짝 웃었다.
“아아, 내 아들.”
모리안은 외투를 벗지도 않고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데아론은 그때까지 겁에 질려 여자에게 붙들려 있었다.
모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귀부인의 손목은 앙상했다. 모리안은 그녀를 쉽게 밀어냈다.
“어머니. 제발.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모리안은 나직이 애원하며 은근슬쩍 소년을 가렸다. 그사이 집사가 데아론의 어깨를 쥐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데아론은 삐걱삐걱 끌려갔다.
“모리안, 내 아들. 내 남편이 그 여자의 자식을 데려왔어.”
후작 부인이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푸념했다. 갈색 눈은 여전히 정신없이 번뜩였다.
내 남편, 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 처절한 소유욕이 뚝뚝 묻어났다.
“네, 어머니. 알아요.”
“어쩜, 얼마나 예쁘던지. 내 남편을 똑 닮았단다. 너처럼 말이지. 그런데 눈은 보라색이더라? 보라색이야.”
“네, 어머니.”
“너랑 내 남편은 눈이 녹색이지. 그렇지?”
“네.”
“그럼 저 애는 누구를 닮았니?”
후작 부인이 뱀처럼 속삭였다. 모리안은 이제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건 대화 같은 게 아니었다.
대화는 소통을 전제로 할진대, 한쪽이 이미 반쯤 미쳐 버린 와중에 소통이란 게 존재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집사의 다급한 안내 아래 무사히 방에 도착한 데아론은 가늘게 떨며 눈가를 덮었다.
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비록 그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이전 생과 다름없는 어느 하루였다.
제국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졌다. 텔로아 후작이 데려온 사생아가 난폭하고 게으르며 무식하여, 후작가의 큰 골칫거리라고.
‘이번에도 똑같네.’
전생과 동일한 흐름이었다. 첼루나는 창밖을 골똘히 내다보며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텔로아 후작, 이 개자식아.’
욕설은 습관이었다. 회귀 전부터 첼루나는 데아론의 친부를 싫어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라지만 그녀가 아는 텔로아 후작은 정도가 지나쳤다.
그래도 핏줄이니 책임지겠답시고 작은아들을 데려오고선, 혹시라도 그가 제 이복형의 자리를 위협할까 봐 비하적인 헛소문을 퍼트리는 꼴이란.
전생에도 데아론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도록 강요받았다.
자신이 모리안 텔로아의 경쟁자 같은 건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자 거듭 부족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나중에 그가 황녀의 기사로 활약하면서 그 정도가 현저히 줄긴 했지만, 과거 그는 여전히 제 형보다 대체로 못났다는 평을 들었다.
적장자가 빛 속에 머물기 위해 사생아 차남은 그늘에 파묻혀야 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첼루나는 늘 텔로아 후작의 태도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과잉보호하고, 둘째는 학대하고. 개자식.’
후작이 그리 애쓰지 않아도 모리안 텔로아는 어차피 객관적으로 훌륭한 인재였다.
굳이 작은아들을 깎아내려 큰아들이 상대적으로 빛나 보이게 할 필요가 없었다.
<죄책감이겠지요, 뭐. 아버지는 나름대로 속죄하는 겁니다.>
전생의 어느 날, 연인과 서글픈 밀회를 즐기던 데아론이 냉소적으로 속닥인 적 있었다.
그때 그의 눈빛은 참 쓸쓸했었다. 그 어여쁜 제비꽃색 눈이.
<형님께 미안하니까. 제 존재 자체가 죄스러워서.>
후작이 자기를 미워하는 건 아닐 거라고 데아론은 단조롭게 말했다.
다만, 자기한테 잘해 주기엔 첫째한테 미안하고 아내 앞에서 부끄러우니까.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둘째를 절대 자랑하지 않는 거라고, 오히려 더더욱 어두운 곳에 처박아 숨기는 거라고.
<전 괜찮아요, 공주님.>
연인이 분노와 비애가 뒤섞인 눈으로 자기를 보자 데아론은 다정하게 타일렀다. 그는 처연한 와중에도 상냥했다.
첼루나는 그를 안아 주었다. 그는 연인의 품에서 낮게 고백했다.
<저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
가족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어. 나는 괜찮아. 이렇게 키워 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한 은혜인걸.
평민의 피가 섞인 내가 지금은 황녀 전하의 기사잖아.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
데아론은 강인하게 첼루나를 달랬다. 하지만 첼루나는 속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본다. 그녀는 그의 눈에 듬뿍 고인 통증을 여실히 알아봤다.
과거의 너는 그렇게나 외로웠는데. 그렇게나 괴로웠는데.
“데안.”
앞으로 새롭게 겪을 미래는, 과연 다를 수 있을까?
연인의 이름을 중얼대던 첼루나의 눈빛이 슬퍼졌다. 과연 다를 수 있을지, 첼루나는 깊이 회의했다.
전생을 아는 그녀가 이번 생에 그의 가정 환경을 바꿀 힘은 없었다.
비록 회귀했다고 해서 그녀가 갑자기 후작의 사람됨을 바꾸고, 죽은 데아론의 모친을 되살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번 생에 그녀의 목표는 데아론이 자신을 위해 죽는 걸 막는 거였다.
그 목표만으로도 이미 벅차서, 그녀는 데아론의 가족 관계를 안타깝게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이었으면 진즉에 바꿨겠지.’
기왕 회귀한 김에 초능력까지 생겼으면 좋았을걸.
손가락 한 번 딱 튕겨서 후작이 착해지고, 모리안 텔로아가 상냥해지고, 후작 부인이 데아론에게 잘해 주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전생에 후작은 냉정했고, 모리안 텔로아는 무뚝뚝했으며, 후작 부인은 광기에 가까운 증오로 남편의 사생아를 대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첼루나 개인이 자유롭게 바꿀 수는 없었다. 데아론이 이번 생에 이미 받았을 전생과 똑같은 상처를 없던 걸로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의 주군이 될 텔레스 황녀가 이번 생에도 승리할 수 있게 돕는 것.
또한, 이번 생에는 그와 연인이 되지 않는 것.
“데안.”
또다시 불러 본다.
이번 생에 너는 나를 아직 모르지만, 나는 너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해. 네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희망하고 두려워하는지. 눈빛, 몸짓, 숨결, 모두.
“데아론 텔로아…….”
이번 생엔 네가 나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워.
첼루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그의 나이 스물셋,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기준이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닿았을 때 그가 어떤 상태였는지 떠올리고, 그녀는 서둘러 환영을 지워 버렸다.
‘안 돼.’
그녀를 대신해 칼을 맞고 아프게 죽어 가던 그가 떠올랐다.
‘이번에는 절대 안 돼.’
이번 생에는 반드시 우리 둘 다 승자가 되리라. 혼자 승자였던 네가 패자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 없도록.
그리고 설령 너 혼자 다시 승자가 되더라도, 네가 나를 위해 희생할 일은 없을 거야.
첼루나의 심장 부근에 지긋한 통증이 번졌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나 아팠다. 데아론의 안녕을 위해서 그와 사랑한 나날을 전부 없던 일로 해야 한다는 게.
그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빌어 줘야 했다.
그가 건강하게 장수하며 가정을 꾸리고,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어 앙증맞은 손자녀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꿈꿔야 했다.
자신이 과연 그 고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그런 꼴을 보기 전에 요절하는 게 그녀의 진정한 행복일지도.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첼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반드시 장수하리라. 오래오래 살아남아 데아론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걸 지켜볼 거야. 그리고 나 또한 행복하게 살아가야지.
불행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전생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사람이었고, 그저 사람이었고, 행복을 바라는 건 본능이었다.
“엘리나.”
“네, 공주님.”
“우리 산책이나 좀 할까?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아름다운 늦봄이었다. 옛사랑을 생각할수록 괴로움만 늘어나니 차라리 황궁 정원의 예쁜 풍경에 푹 취해 근심을 잊고 싶었다.
지난 2년간 공주의 변화에 감격하여 그녀의 충실한 수족이 된 시녀 엘리나는 즉각 복종했다.
엘리나는 기꺼이 공주의 옷시중을 들었고, 적절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첼루나는 시녀 한 명만 데리고 방을 떠났다.
그녀는 건물을 나와 후원에 발을 디뎠다. 적당한 산들바람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데안이랑 정원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첼루나는 전생의 숱한 밀회를 곱씹었다. 그러다 곧 내적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덜 괴로운 현재에 집중하고 싶었다.
첼루나는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걸었다. 후원을 막연하게 거니는 공주의 발자취를 시녀는 충실히 따라다녔다. 그러다, 멈칫했다.
“어…….”
엘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춤했다. 첼루나도 걸음을 그쳤다.
첼루나는 엘리나의 시선을 좇았고, 시녀와 똑같은 장면을 발견하자 얼굴을 굳혔다.
‘쟤넨 또 뭐야?’
쟤네, 그러니까 기사들이었다. 아마 호위병이리라. 자세히 보니 공주궁 소속은 아니었다. 첼루나는 그들의 얼굴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황후궁 소속이야.’
황족들의 처소는 서로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이 아니었다.
공주궁의 후원은 황후궁과 붙어 있었고 굳이 애쓴다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는 건 퍽 쉬웠다.
첼루나가 굳이 애쓴 건 아니었다. 다만, 데아론에 대한 아픈 생각을 떨쳐 내려 노력하며 마구잡이로 걷다 보니 너무 멀리 나온 듯했다.
황후궁 소속 호위병들은 하녀 둘을 에워싸고 있었다. 첼루나는 하녀들도 알아보았다. 그들은 공주궁 소속이었다.
“……엘리나, 잠깐 저쪽으로 가자.”
첼루나는 굳은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나는 살짝 겁먹은 눈빛이었지만, 공주님의 명령에 별수 없이 복종했다.
첼루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사들과 하녀들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분노는 짙어졌다.
그녀에겐 너무나 익숙한 구도였다. 공주궁의 만만한 궁인들, 그런 그들을 에워싸고 조롱하며 멸시하는 황제궁, 황후궁, 황자궁, 황녀궁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