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모리안의 사생아 동생이 처음으로 수도 후작가 저택에 입성하는 날이었다.
최근에 모친을 잃었다는 그 아이는 잠시 후작가 영지에서 지내다가, 앞으로 수도에서 길러지기 위해 오늘 이사를 마쳤다.
“피하는 게 아닙니다만. 아시다시피 전하와 대련하는 게 원래 제 일정입니다.”
모리안은 덤덤하게 아뢰었다. 그래, 확실히 저것도 반응이긴 하지. 외면, 또는 현실 부정도 반응의 일종이었다.
“그래, 그래, 알겠어. 그럼 원래 일정에 집중해 볼까?”
텔레스는 모리안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대련에 초점을 맞췄다. 모리안은 내심 안도하며 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필사적으로 무덤덤한 척했지만, 사실 모리안은 제 이복동생을 둘러싼 소란이 거북했다.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동생이었다. 평생 몰랐으면 좋았을 피붙이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여인과 동침하여 품은 혈육이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텔레스는 모리안이 불편한 상황을 무작정 피하는 중이라고 비판했고, 그는 황녀의 지적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 저와 피가 반만 섞인 열다섯 살 꼬마를 난생처음 마주하느니, 차라리 궁에서 최대한 오래 뻗대며 황녀와 검을 섞는 게 나았다.
황녀와의 대련은 모리안의 뇌리에서 잡생각을 몰아냈다.
황녀의 실력이 형편없었다면 짜증만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의 검술은 객관적으로 우수했다.
“나날이 느시는군요.”
“뼈 빠지게 노력하는데 안 늘면 큰일이지, 그럼.”
남녀 모두 땀으로 흠뻑 젖은 뒤에야 대련은 마무리되었다.
연무장 구석에서 대기하던 궁인이 공손히 다가와 황녀에게 수건과 물통을 건넸다.
황녀는 수건으로 이마를 닦은 뒤, 고개를 젖히고 목을 축였다.
모리안은 황녀의 매끄러운 살이 땀방울로 반짝이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목을 마저 축인 텔레스가 모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씁쓸하게 물었다.
“이제는 대련도 끝났겠다, 정말 귀가해야지?”
시간이 제법 늦었다. 이제는 모리안이 황궁에서 외박이라도 하지 않는 한, 더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핑계가 없었다.
“네, 그래야겠죠.”
집에 돌아가 외도를 저지른 자신의 아버지와, 그 사실을 알아낸 이후 방에서 거의 두문불출하는 어머니, 그리고 최근에야 존재를 알아낸 이복동생을 마주해야 했다.
텔레스는 모리안을 보며 흐리게 웃었다. 그와 헤어질 시간이라는 걸 대놓고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모리안은 저 눈빛이 언제나 불편했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황녀 전하.”
지금 헤어져 봤자 어차피 거의 매일같이 만나는 사이에 뭘 그리 매번 아쉬워하시는지.
그리고 설령 정말 아쉽더라도 적당히 감정을 숨기는 게 황족의 미덕 아닌가?
‘평소에는 잘만 숨기시면서.’
표정 관리에 능숙하기 그지없는 황녀가 유독 자기 앞에서는 너무 솔직하다.
모리안은 그 사실이 매우, 매우 불만스러웠다.
“내일 다시 보자, 모리안.”
텔레스가 모리안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알아보기 쉬운 동작이었다.
모리안은 여태 늘 그래 왔듯, 황녀의 손끝을 잡고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내림으로써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연무장을 나와 옷을 갈아입고자 손님방으로 향하면서 모리안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냉철하고 냉담한 텔로아 후작.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성으로 제국의 고위 귀족 다수를 휘어잡은 유능한 전략가이자 정치인.
<내가 한때 사랑했던 여자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몇 달 전 뜬금없이 사랑, 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얼마나 우습던지.
<나도 떳떳한 일이 아니었다는 건 알아. 그래서 평생 말할 생각 없었는데……. 그 여자가, 최근에 사고로 죽었다는구나. 애는 남기고.>
사랑? 사랑이라고? 사랑 때문에 아내에게 죄짓고 아들을 기만했어?
그것도 하필이면 평민인, 심지어 한때 사제였던 여자 때문에.
<그 애는 외가 식구가 없다. 그래서 내가 거두어 키우기로 했으니, 모리안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그날부터 모리안에게 그의 아비는 낯선 사람이었다. 모리안이 평생 알고 따랐던 텔로아 후작이 아니었다.
불륜으로 사생아를 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덜미를 움켜잡고 기함하기 충분한데, 불륜 상대의 신분과 그녀의 과거 직종도 퍽 난감했다.
텔로아 후작이 사생아의 생모로 지목한 여자는 16년 전까지만 해도 사제로 일하다가 스스로 교회를 나온 사람이었다.
텔로아 후작을 비롯한 친(親)황후 세력은 예로부터 교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개개인의 신앙을 걸고넘어질 마음은 없었으나, 보수적인 종교 세력이 정치권과 결탁할 때 얼마나 많은 폐해가 일어날 수 있는지 그들은 거듭 되새기며 살았다.
친황후파, 즉 친황녀파 세력은 오히려 마탑주를 위시한 마법사 세력과 긴밀했다. 친황자파는 교회와 친했다.
그런 사실을 뻔히 아는 그의 아비가, 심지어 그 치열한 정쟁 한복판에 늘 있는 그의 아비가, 한때 교회에 몸담았던 여인과 그릇된 관계를 맺다니.
모리안이 경악할 만했다. 경악보다 더 끔찍한 건, 지독한 실망이었다.
사랑. 모든 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후작 부인이 최근 병증에 가까울 만큼 신경이 과민해진 것도 전부 사랑 때문이었다.
감정이 아닌 오직 계산으로 이루어진 정략결혼이지만, 오랜 세월 함께 부부로 지내며 텔로아 후작 부인은 진심으로 남편을 연모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저 정치적 동반자로만 자신을 바라본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감내할 수 있었다. 그의 옆에 선 유일한 여자는 자기 자신이니까.
그런데, 그런 줄 알았는데.
후작이 평민의 피가 섞인 작은아들을 처음에는 지방 영지에, 나중에는 수도 저택에 들이겠다고 통보한 뒤로 후작 부인은 기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랑은, 무슨.’
그 모든 원흉이 사랑이라니. 엉망진창이 된 자신의 집안 상황을 곱씹으며 모리안은 냉소적인 불쾌감을 한 모금 삼켰다.
만약 그딴 게 사랑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낫다. 감정이라든지 욕구라든지, 그런 건 결국 다 불완전하고 때로는 불결한 요소 아닌가.
그래서 모리안은 자신을 향한 황녀의 온유하고도 애틋한 시선이 번번이 거슬렸다.
황녀가 제게 오랫동안 호감 이상의 마음을 품어 왔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참, 번거롭게도.
‘결혼과 감정은 별개야.’
현재 텔레스 황녀의 가장 유력한 약혼자 후보가 모리안 텔로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모리안 본인도 황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의 가문은 황녀를 지지했고, 모리안은 훗날 황녀가 필시 성군이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리안은 이상적인 부마, 더 나아가 이상적인 국서가 될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황녀 전하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리라.
그러나 그는 정치적 반려의 역할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다.
군주의 결혼에 사적인 감정 따위가 섞여서는 절대 안 된다. 절대.
그러니까, 모리안은 텔레스가 불편했다.
그녀가 저를 보며 웃는 것도. 제 앞에서 유독 허물없이 구는 것도. 자꾸만 정치적 동지애 이상의 다정함을 드러내는 것도. 전부 싫었다.
그 모든 게 너무, 끔찍하게 두려웠다.
소년은 마차에서 내렸다. 궁전 같은 저택을 올려다보는 예쁜 보랏빛 눈에는 우울함이 가득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다시 목을 매만졌다.
“어서 오십시오, 둘째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 앞에는 정중한 노인이 한 명 있었다. 소년은 목에서 손을 내렸다. 옷깃 아래 금색 사슬이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소년은 예바르게, 그러나 역시 침울하게 대답했다. 위축된 어깨에는 소심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소년의 움츠러든 자태는 평소 그의 명랑한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최근 몇 달간 소년은 내리 이 상태였다.
어머니를 하루아침에 잃은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난 웬 높으신 분이 그를 아들이라 칭하며 앞으로 책임지겠다고 하니, 이미 소년이 감당할 만한 범위 밖이었다.
소년, 열다섯 살 데아론은 평생 나고 자란 익숙한 고향을 떠나 제 ‘아버지’가 사는 수도 저택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데아론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에서 절대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쯤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 그를 책임져 줄 부모가 한 명도 남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아비라는 작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고마울 게 뭐가 있을까. 이제라도 나타나 줘서? 나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아 줘서? 지난 15년간 잘만 방치했잖아?
애초에 내가 누구 때문에 태어났는데.
‘나를 낳지 말았어야지.’
데아론은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도 원망했다.
그는 늘 자신의 아버지가 모종의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할 수 없어서 진즉 떠났다고만 생각했을 뿐, 설마하니 자신이 불륜의 결과로 태어났을 거라고 상상한 적 없었다.
뒤늦게 알아낸 진실은 잔인했다.
안 그래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였다. 이제 막 자아가 단단히 굳어 가는 사춘기에, 지저분한 출생의 비밀은 소년의 마음을 흉하게 낙인찍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둘째 도련님을 마중 나온 집사의 태도는 깍듯했다. 데아론은 저 깍듯함을 믿지 않았다. 속으로는 나를 얼마나 경멸할까.
그는 집사가 제게 소리라도 지른 것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집사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데아론은 마침내 느린 걸음을 뗐다.
소년은 노인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도 외형만큼이나 화려하고 광활해서 소년은 더더욱 어색함을 느꼈다.
집사를 따라 묵묵히 계단을 오르던 소년은 바로 앞에서 집사가 멈칫하자 덩달아 주춤했다.
“마님.”
집사는 목이 졸린 것처럼 탁하게 불렀다. 마님? 데아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아이가 그 아이인가?”
금속성이 잔뜩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후작 부인의 음성이 평소에는 저렇게 거칠지도, 차갑지도 않다는 사실을 데아론은 알 길이 없었다.
“이리 데려와 봐, 집사. 좀 더 가까이.”
“마님.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는 둘째 도련님을 바로 방으로—”
“집사.”
집사의 다급한 변명이 뚝 끊겼다. 데아론은 이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외람된 걸 알면 말하지 마.”
집사는 이제 잠잠했다. 귀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데아론의 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