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앰벌리는 블레논의 사람인 척하는 텔레스의 사람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첼루나의 아군이었다.
전생에 앰벌리가 정확히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황자를 배신하고 황녀를 찾아갔는지 첼루나는 몰랐다.
그러나 이번 생에도 그가 똑같은 절차를 밟는다면, 좋든 싫든 자신과 그는 끝내 한배를 타게 될 것이다.
“제 이름을 아시는군요.”
앰벌리가 단조롭게 덧붙였다. 첼루나는 그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기우일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은 다시 한결같이 정중했으므로.
“물론이지. 그대는 이미 황궁에서 유명한걸.”
첼루나는 상냥하게 말을 이으며 빙그레 웃었다. 본인의 꺼림칙한 심정과 별개로 일단 할 일은 해야 했다.
앰벌리가 이미 황궁에서 유명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고작 평민 남자애가 공작의 인정을 받아 황자의 수습 기사가 됐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시기하는 자들도 많았다. 귀족 출신 수습 기사들은 웬 미천한 놈이 저들과 같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에 심술이 나서 그를 은근히 괴롭히곤 했다.
그러나 대련을 핑계로 앰벌리와 직접 검을 섞어 본 후, 그들은 전부 패배를 깔끔히 인정하고 앰벌리의 실력을 받아들였다.
궁의 시녀들과 하녀들은 다른 의미로 앰벌리를 주목했다. 왜냐하면, 잘생겼으니까. 그는 객관적으로 미남이었다.
앰벌리를 향해 불편한 감정을 품은 첼루나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인정했다. 물론 그녀의 눈에는 데아론이 최고의 미남이었지만.
“그대에 관한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 내 외조부께서 그대를 직접 거두셨다고 했지. 늘 얘기만 듣고 서로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네.”
첼루나는 계속 순진한 소녀처럼 온순하게 말하며 앰벌리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녀는 외조부, 라는 단어를 지그시 강조했다.
‘라토르 공작에겐 외손자만 있는 게 아니야. 외손녀인 나도 있어.’
자신이 이렇게 에둘러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원했다.
앰벌리가 결과적으로는 황녀의 충신이더라도, 공식적으로 라토르 공작은 앰벌리를 거둔 그의 은사였다.
바로 그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며 그대는 블레논 오빠뿐만 아니라 나와도 접점이 있다고, 그렇게 앰벌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들리길 원했다.
내가 그대와 친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거라고 오해해 줘. 그래서 나와 서먹한 외조부를 들먹이면서까지 그대에게 다가왔다고 생각해 줘.
보통 황족이 제게 호의를 표하면, 상대방이 웬만큼 해로운 대상이 아닌 이상 고분고분 응하는 게 의례적이었다.
과거의 외톨이 공주라면 모를까, 첼루나는 이제 궁에서 꽤 사랑받는 위치였다.
물론 그 사랑이란 게 아랫사람들의 얄팍한 호감이긴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시절보다는 나았다.
하물며 앰벌리 라크문, 그는 평민이었다. 그도 여태 내심 쌓인 게 많을 터. 어쩌면 거대한 권력욕을 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방금 황제의 딸이 손 내밀었다. 상냥하고 순진무구한 낯으로 그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살랑살랑 접근한 상황이었다.
첼루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 앰벌리가 제게 긍정적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했다.
진정 살갑지는 않더라도 형식적으로나마 아부하며 손을 마주 뻗기를 기다렸다.
그런 그녀에게 앰벌리 라크문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담백하다 못해 건조한 반문이었다.
“영광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냉기마저 느껴지는 종결이었다. 첼루나는 당황하여 앰벌리를 쳐다보았다.
“으응, 그래.”
그녀는 간신히 답변을 쥐어짰다.
그녀는 거짓 백치미가 싹 사라진 얼굴로 앰벌리를 심각하게 살폈다. 앰벌리는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그녀를 보기를 거부했다.
‘뭐야, 이 사람?’
불쾌감보다 혼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방금 앰벌리가 보인 반응은 그녀의 기억과 너무 달랐다.
‘왜 이렇게…….’
무뚝뚝하지? 절대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전생의 그는 너무나 완벽하게 온화하고 정중해서 그를 떠올리면 첼루나는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전생에 앰벌리는 첼루나에게도 정중했다. 절대 친절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천대받는 공주를 대놓고 비웃거나 괴롭히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래?’
오히려 첼루나의 평판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지금, 더는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것도 일개 평민이 황족을 상대로.
첫 시도부터 무참하게 거절당한 첼루나는 잠시 얼었다. 그러다 곧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작전상 후퇴다.’
이토록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질척질척 매달렸다간 괜히 역효과만 낼지도 모른다. 첼루나는 다시금 표정을 싹 고쳤고 이번에는 빵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수고해, 라크문 경.”
허무할 정도로 빠른 포기였다. 하지만 일단은 이게 최선이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앰벌리는 끝까지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심지어 첼루나보다 먼저 돌아섰다. 첼루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와, 쟤 진짜 왜 저래?’
너 전생에는 안 이랬잖아. 그나마 네 태도가 가장 견딜 만했다고.
딱히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잔인하지도 않았던 너. 그저 한결같이 깍듯하고 담담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긴 하지만 전생에 천대받는 공주에게마저 예의를 갖췄던 만큼 우호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거늘.
어렵지 않기는 개뿔. 첼루나는 전생보다 훨씬 상냥한 태도로 다가갔음에도 단칼에 거절당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예전처럼 성격이 더러웠으면 또 몰라.
‘하여튼 저놈 머릿속은 알 수가 없어.’
까칠하고 쌀쌀맞은 전생의 나에겐 그럭저럭 예를 갖췄으면서, 이번 생의 내 유순한 접근에는 왜 그토록 진저리쳤는지.
전생에서 왜, 그리고 언제부터 블레논을 배신하고 텔레스 언니에게 충성했는지.
그를 붙들고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의 질문은 전부 무용했다.
결국 궁금증을 삼키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등진 앰벌리의 눈빛은 차가웠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청색 눈에는 반감이 넘실댔다.
‘지긋지긋해.’
그 반감의 실체는 어쩌면 실망이었다. 자격 없는 실망감일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랬다.
제멋대로 관찰하고, 제멋대로 기대하고, 제멋대로 동질감을 느꼈다가, 제멋대로 배신당해 시키지도 않았는데 화내는 꼴이었다.
앰벌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이건 공주 본인보다는 자신의 잘못이었다. 멋대로 자신이 상상한 틀에 공주를 맞추고자 했던 잘못.
그 상상이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마음도 차게 식었다.
아직은 불씨가 되살아날 계기가 없어 보였다.
첼루나는 이제 두 번째로 열다섯 살이었다. 그간 많은 진전이 있었다. 예컨대, 아델라 프란체스는 이제 첼루나 공주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첼루나를 향한 블레논의 태도 변화도 획기적이었다.
황자가 동생에게 결코 부드러워졌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예전보다 덜 거칠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동복동생을 향한 블레논의 멸시와 혐오는 동생이 ‘어머니의 이름에 먹칠한다’는 굳센 믿음에서 나왔다.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으니 평생 속죄하며 살아도 모자랄 텐데, 주제도 모르고 천박하게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정상적인 가족답게 동생을 사랑으로 감싸 줬다면 그녀가 그토록 ‘천박하게’ 크지 않았으리라는 생각 따위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지난 2년간, 첼루나는 훨씬 온화하고 품위 있어졌다. 그러면서도 가련하고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 모든 건 회귀 때문이었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블레논은 단지 동생이 드디어 철들었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스스로 굉장히 자애로우며 합리적이라고 믿는 오라비답게, 동생을 데려다가 훈육하는 일을 더는 하지 않았다.
첼루나는 그 모든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쁨이 결코 완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때는 그녀의 삶에서 몹시 슬픈 해였다.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는 해, 즉 데아론이 열다섯 살이 되는 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직 봄이 되기 전, 텔로아 후작이 집에 사생아를 들였다는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졌다.
텔로아 후작의 맏아들 모리안 텔로아는 그날도 어김없이 황녀와 함께 있었다.
“모리안, 집에 일찍 안 들어가 봐도 돼? 오늘 같은 날에.”
모리안은 텔레스 황녀의 가장 유력한 약혼 후보였고, 오랜 친우였으며, 현재는 검술 대련 상대였다.
두 사람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황녀궁에 딸린 연무장에서 서로 마주했다.
“오늘 같은 날이 무슨 날입니까?”
모리안은 뚝뚝하게 되물었다. 평소에도 표정이 별로 없는 그의 반듯한 얼굴은 오늘따라 유독 황량했다.
텔레스는 남자의 사막 같은 눈을 보며 내적으로 혀를 찼다. 홍채의 색깔만 보면 사막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눈이었다.
오히려 신비한 숲속의 호수처럼 맑고 따스한 녹색으로 반짝이는 눈은, 폭신폭신한 흑발과 더불어 그의 아비가 물려준 것이었다.
‘내 취향도 참, 고약하단 말이야.’
텔레스는 어김없이 인정해야 했다. 왜 나는 사내 보는 눈이 이렇게 형편없을까? 저런 사람을 보고 좋다고 생각하다니.
물론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모리안 텔로아는 매우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저 얼굴만 해도 국보급이라고 남녀노소 입을 모아 동의하리라.
다만, 저 눈이. 저 사막처럼 메마른 눈이.
텔레스의 시녀들은 바로 저런 소위 냉미남다운 모습이 모리안 님의 매력이라고 꺅꺅대곤 했지만, 글쎄. 텔레스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사람이 얼음 같으면 어떡해? 사람 같아야지.’
아무리 잘생기고 유능해도 사람이 아니라 얼음이라면 딱히 기대할 만한 게 없었다.
정치적으로야 굉장히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텔레스의 마음을 충족할 수 없었다.
어차피 예쁘고 유능한 건 그녀 혼자서도 잘만 하고 있으니, 그녀의 미래 남편이 예쁘고 유능하다 해도 그녀의 결핍을 채워 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온기였다. 미소 하나에도 꾸밈없이 묻어 나오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운 설탕물을 삼킨 느낌이 들게 해 주는, 그런 온기.
“네 동생이 오는 날이잖아.”
모리안의 반문에 텔레스가 대답했다. 남자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었다. 여자는 느긋한 동작으로 목검을 준비하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가서 반겨 주고 집 안내라도 해 주든, 어떻게 생긴 낯짝인지 구경이라도 하든, 어떤 식으로라도 반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무작정 피할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