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14)

회귀 초반부터 첼루나는 전략을 명확하게 정했다. 나는, 당차고 영민한 이미지를 밀어붙여서는 아니 된다.

황실에는 이미 총명하고 저돌적인 인물이 둘이나 있었다. 바로 블레논 황자와 텔레스 황녀.

황제의 셋째가 뒤늦게 어설픈 모방을 시도한다 한들, 쓸데없는 의심만 살 것이다.

설마 막내 황녀마저 황족 남매의 치열한 궁중 암투에 끼어들려 하는 것인가? 하는.

첼루나가 노리는 건 주인공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조력자로, 즉 텔레스 언니의 도우미로 남는 거였다.

무해하고 연약한 척, 모두가 방심하는 사이 정보를 캐내고 소문을 흘리고 미묘하게 사람들을 조종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냘프고 맹한 공주 놀이가 최적이었다. 이제 와서 오빠나 언니의 경쟁자로 인식돼서는 안 된다. 첼루나는 가련한 토끼인 척, 여우처럼 머리를 굴렸다.

“아, 그게……. 미안해. 내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서, 혹시 여기 어딘가 있나 하고. 미안. 지금 나갈게.”

첼루나는 소심한 척 머뭇머뭇 물러났다. 그러자 그녀가 바란 대로 아델라가 급히 다가왔다.

“어머, 아닙니다, 공주님! 가실 필요 없어요. 무엇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첼루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그녀는 침울하게 실토했다.

“그게, 그냥 손수건이야. 내가 수놓던 건데 갑자기 사라졌어.”

“세상에.”

꾸며낸 사연을 듣고 아델라는 탄식했다. 곧이어, 첼루나가 기억하는 영리한 소녀답게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잠깐만. 공주님이 손수건을 잃어버렸는데, 공주궁이 아니라 황자궁에서 찾는다는 건…….’

공주님이 단순히 물건을 잃어버리신 게 아니라, 황자궁의 누군가 물건을 갈취해 갔다는 거다. 그게 황자 본인이든, 황자의 궁인이든 간에.

똑똑한 아델라는 여기까지 추리했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첼루나가 의도한 대로였다.

추리 후, 아델라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눈앞의 가여운 공주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쯧, 황족이면 뭐 해? 이렇게 무시당하는데. 뺏긴 손수건 당당하게 돌려 달라고 하지도 못하고, 혼자 남의 처소 후원이나 뒤지고 있잖아.’

한동안 극악한 성질머리로 유명했던 공주는 지난 1년간 기가 꺾인 건지, 철이 든 건지 성격이 많이 유해졌다.

그럴수록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업신여기는 세력은 많았다.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황자궁 사람들과, 황비 소생 남매를 한결같이 미워하는 황후궁 사람들.

하긴, 13년간 차곡차곡 쌓여 온 멸시를 고작 1년 만에 전부 와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기어코 공주의 손수건을 갈취해 아무렇게나 내버리는 불손한 인물이 나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인물은 없었다. 첼루나는 손수건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럴싸한 각본이었고 아델라는 완벽하게 넘어갔다.

“공주님, 황송하지만 제가 공주님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손수건 찾는 일 말이에요.”

아델라는 친절하게 권했다. 다른 인간적인 흠은 많을지 몰라도 결코 냉혈한은 아닌 아델라는 눈앞의 이 처량한 공주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델라는 이 와중에도 자기 아빠처럼 권력 지향적으로 계산했다.

눈앞의 이분은 어쨌든 황족이다. 물론 힘없고 무시당하는 황족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피를 가졌다.

이참에 이분께 점수를 따 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나중에 이분이 엄청나게 잘나가는 황녀님이 될지 어떻게 알아?

겸사겸사 눈도장도 받고 선행도 하고. 완벽해. 아델라는 흡족하게 결론지었다.

“정말? 정말 도와줄 거야?”

첼루나는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델라를 감격 속에 바라보았다. 아델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와, 씨, 저 얼굴 좀 봐. 내가 봐도 반하겠네.

“네, 공주님, 물론이죠.”

잠시 딴 길로 샌 정신을 곧장 다잡으며 아델라는 공손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기뻐서 활짝 웃었다. 와, 씨. 아델라는 다시 속으로 욕했다.

“그럼 넌 이쪽을 좀 둘러봐 줄래? 난 저쪽부터 찾아볼게. 손수건은 어떻게 생겼냐면…….”

그리하여 공주와 시녀는 한동안 같이 황자궁 후원을 샅샅이 뒤졌다.

첼루나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아델라가 지치기 전, 그래서 따분함과 짜증을 느끼기 전에 상황을 매듭짓고 싶었다.

“앗, 이것 봐, 내가 찾았어!”

“다행입니다, 공주님.”

첼루나는 애초에 잃어버린 적도 없던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잽싸게 꺼내 손에 쥐며 좋아했고, 아델라는 순수하게 기뻐하며 그녀를 축하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나중에 내가 꼭 보답할게. 혹시 이름이 뭐야?”

“저는 프란체스 백작가의 아델라라고 합니다, 공주님.”

아델라는 다소곳이 인사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족의 보답이라니, 아무리 빈말일지라도 그런 약속을 받아 냈다는 것 자체의 의미가 컸다.

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아델라는 머쓱해졌다. 황송한 마음이 깊을수록 눈앞의 공주를 향한 호감도 짙어졌다.

아델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첼루나가 퍽 마음에 들었다.

“아델라 프란체스, 오늘의 호의는 내가 꼭 갚겠어.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첼루나도 아델라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계산적인 이유로 접근했을 뿐인데, 오늘 가까이서 몇 마디 나누고 보니 쾌활하고 직설적인 성격이 호감을 불렀다.

사실 첼루나는 외로웠다. 항상 외로웠다.

전생에 그녀에겐 데아론이 있었지만, 그 아이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 할 때마다 지독한 결핍이 그녀를 잠식했다.

데아론은 그녀의 연인이자 가족이자 친구였으나, 그런 그가 채워 주지 못하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예컨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이라든가. 부친의 애정. 그리고 또래 여자애끼리 흔히 나누는 발랄한 우정 등등.

첼루나는 동갑내기 아델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내가 어미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불행하고 고독하게 크지 않았더라면.

나도 너 같은 아이와 평범하게, 유쾌하게, 소녀들과 소년들이 흔히 저들끼리 가지는 말간 유대를 쌓을 수 있었을까.

“황송합니다.”

아델라는 즐겁게 답했다. 이어, 오직 선의를 담아 빙긋 웃었다.

그 투명한 호의에 첼루나는 잠시 울컥했다. 그녀는 치미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해맑게 웃으며, 준비한 대로 살갑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런데 아델라, 드레스 참 예쁘다. 특히 여기 소매에 달린 무늬. 나비 문양인가?”

“아아, 네, 나비가 맞습니다. 더 가까이서 보시겠어요?”

옷 칭찬 같은 진부한 소재로도 담소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인생에 별다른 고민 없이 유복하게 자란 열네 살 백작 영애는 아직 사고방식이 꽤 단순했다.

게다가 타고난 성격도 시원시원하여 그녀와의 대화는 막힘없이 흘렀다.

첼루나는 다시 오랜 결핍으로 인한 갈증을 느꼈다. 사람의 온기, 또래 소녀와의 평범한 대화. 전생에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

“이 손수건에도 나비 무늬가 있는데. 한번 볼래?”

“네, 공주님. 어머, 이런. 이 손수건은 꼭 빠셔야겠어요.”

“그러게. 화단에서 건졌더니 흙이 묻었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아델라는 첼루나가 ‘잃어버렸던’ 손수건의 상태를 보고 씩씩대다가,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고 공주의 눈치를 살폈다. 공주는 다시 가냘프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 아델라.”

첼루나는 우울하게 달랬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이 으레 그렇듯, 아델라는 더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공주를 향한 그녀의 호의는 연민과 맞물려 짙어졌다.

소녀들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했다. 성공적인 포섭이었다. 단순히 성공적인 것을 넘어, 심히 만족스러웠다.

첼루나의 또 다른 구체적인 목표는 앰벌리 라크문이었다.

앰벌리는 기사였다. 적어도 전생에는 확실히 기사였었고, 첼루나의 두 번째 삶에서 현재 열여섯 살인 그는 아직 수습 기사였다.

앰벌리는 또한, 평민이었다. 심지어 평민 고아.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한미한 출신은 분명 흠이라면 흠이었다.

다만 그의 검술 실력은 어릴 적부터 굉장하여 그 흠을 메꾸고도 남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라토르 공작은 그를 거두어 길렀고, 나중에 외손자 블레논에게 가신으로 바쳤다.

앰벌리가 입궁한 건 그가 열다섯 살, 첼루나가 열세 살 때였다. 약 1년이 지난 지금, 첼루나는 슬슬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저기, 앰벌리 라크문.”

사실 이번 생에서 데아론을 지키고 자신도 덜 불행한 최후를 맞기 위해 그 어떤 권모술수도 감당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다면, 첼루나는 앰벌리를 멀리했을 것이다.

“앰벌리 라크문, 맞지?”

첼루나는 앰벌리가 불편했다. 어쩌면, 그를 조금 싫어했다.

첼루나가 기억하는 앰벌리는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은 첼루나를 불안하게 했다. 본인부터가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전생에 앰벌리는 끝까지 블레논 황자의 사람이었다. 분명 그렇게 보였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텔레스 황녀가 황자 진영에 심어 둔 첩자였고 막판에 황자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치며 새 황제의 공신이 되었다.

본인도 황자에게 절절하게 충성했던 건 아니니, 주군을 팔아먹은 앰벌리의 도리 없는 행동을 첼루나가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그래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이 남들을 얼마나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지 전생에서 똑똑히 확인한 이상, 그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이 순간이 첼루나는 위태롭게 느껴졌다.

‘아델라는 사람이 편안하기라도 했지.’

속이 훤히 보이는 블레논, 비교적 다루기 쉬운 시녀들, 쾌활하고 직설적인 아델라에 이어 앰벌리를 상대하자 첼루나는 벌써 벽에 막힌 듯 갑갑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인간.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앰벌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깍듯한 태도마저 첼루나의 심중에 싸한 반감을 들이부었다.

항상 예바르고, 점잖고, 태도에 흠잡을 데 하나 없는 앰벌리 라크문.

그토록 완벽한 모습으로 블레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놓고, 끝내는 그를 배신했다.

첼루나는 지금도 자신이 과연 잘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위험한 사람과 손잡아도 되는 걸까?

나는 이 사람을 이용하고 싶어 접근했지만, 역으로 내가 이용당하면 어떡해?

하지만 첼루나는 앰벌리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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