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4)

“그래도 고맙네. 그대의 할 일을 해 준 거.”

첼루나는 쓸쓸하고도 다정하게 대꾸하더니 무척 아련하게 생긋 웃었다. 이에 의사와 시녀는 다시금 충격받았다.

퍽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공주는 참 예뻤다.

돌아가신 황비 전하가 그렇게 미인이시라던데, 막내가 어미를 빼닮았다는 이유로 황제는 그녀 앞에서 치를 떨곤 했으니까.

가엽고 가냘픈 소녀, 알고 보면 순한 공주. 심지어 얼굴까지 예뻤다.

시각적인 매력은 오히려 처연함을 더해, 마치 첼루나가 시드는 와중에도 청초한 꽃처럼 보이게 했다.

사람을 제멋대로 식물에 비교한 뒤, 시녀와 의사는 각자 속으로 엄청난 자책을 시작했다.

아, 이토록 가련하고 아름다운 분께 우리는 왜 그토록 가혹했을까!

평범하게 잔인한 그들은 금세 평범하게 상냥해졌다.

얄팍한 연민을 거쳐 얄팍한 악의를 품었다가 이제 얄팍한 호의로 돌아온 그들은 한껏 친절하게 굴었다.

“황송합니다, 공주님.”

“아니야, 황송하다니.”

공주는 수줍은 척했다. 이어, 머뭇머뭇 소심한 태도를 꾸미며 의사에게 조심스레 청했다.

“저기, 오늘 그대가 다녀간 사실은 되도록 비밀로 해 주겠어? 그대가 다녀간 이유도. 그…… 황자 전하가 알아내시면 안 될 것 같아서.”

“물론입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공주님.”

“정말 고마워.”

블레논이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까지 은근슬쩍 흘리고 난 뒤, 첼루나는 계속 처량하게 미소했다. 의사는 그 미소를 철석같이 믿었다.

의사가 물러가고 시녀는 예전과 다르게 거북한 태도로 첼루나 주변을 서성였다.

그녀가 불편해한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예전에는 주인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 후딱 나가 버리더니.

“엘리나.”

“네, 공주님.”

“좀 나가 줄래? 혼자 있고 싶어서.”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첼루나는 말투에 살짝 까칠함을 섞었다.

예전처럼 과하게 날카로운 가시가 아니라, 그저 조금 피곤하다는 걸 나타낼 정도의 뾰족함이었다.

오빠에게 얻어맞고 온 게 서럽고 수치스러워 잠시 숨고 싶은 것처럼 첼루나는 몸짓 하나하나를 꾸몄다.

실제로 첼루나는 그 자존심 때문에 누군가 자신의 멍든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신경질을 내곤 했다.

너무 갑자기 성격이 바뀌면 오히려 의심받을 테니까 조금은 날카롭게, 그러나 전보다는 살짝 뭉툭하게.

첼루나는 섬세하게 말투를 조절했고 효과는 훌륭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공주님.”

엘리나는 괜히 인사말을 덧붙인 뒤, 모처럼 치맛자락을 살짝 쥐고 예까지 갖췄다.

첼루나는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렸다. 원래 공주는 시녀들의 인사 따위 받아 주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첼루나는 시녀를 등진 채 나직이 떨리는 숨을 뱉었다. 마치 치미는 흐느낌을 참는 것처럼.

엘리나는 눈을 홉떴다. 첼루나는 계속해서 가녀린 소리를 흘리며 창문에 비친 엘리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 확실히 안절부절못하는구나.

“내가 나가라고 했을 텐데?”

첼루나는 돌아보지 않으며 톡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조차 억눌린 울음 때문에 처량하게 들렸다. 적어도, 엘리나는 그렇게 여겼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엘리나는 허둥지둥 중얼댄 뒤 후다닥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첼루나는 훌쩍임을 뚝 그쳤다.

혼자 남은 첼루나는 피로감을 그득 담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데아론이 보고 싶었다.

사람들을 속이고 평판을 쌓아 가는 건 쉬웠다.

회귀 시점이 조금만 늦었다면 다소 아슬아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열세 살 어린애였고, 이는 상황을 좀 더 쉽게 만들었다.

어리다는 핑계는 많은 결점을 덮어 준다. 게다가 그녀는 핑곗거리 삼을 만한 것들이 수두룩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었고, 그녀의 아비는 그녀를 미워했으며, 오빠는 그녀를 폭행했고, 이복 언니와는 서먹했다.

불우한 과거를 지녔다고 해서 전부 괴물이 되지는 않으나, 사랑받고 크지 못한다면 망가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회귀 전의 첼루나는 그런 변명거리를 써먹을 의향이 없었다. 굳이 남들에게 살랑살랑 아양을 떨어 가면서까지 호의를 받아 내고 싶지 않았다.

오직 데아론의 사랑으로 충분했다. 그가 자신의 빛이고 온기고 삶의 의미였으므로, 가증스러운 타인의 애정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

이제 첼루나는 바로 그 데아론을 위해 열성적으로 이미지를 쇄신했다.

자신이 사랑받는 황녀가 되어 권력과 권위를 거머쥐고 그 모든 것을 데아론을 위해 써먹을 수 있도록.

그리고 대체로,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공주님이 있잖아, 요즘 내게 인사를 다 하더라니까. 나 깜짝 놀랐어.”

“얘, 말도 마. 난 그분이 최근에 나한테 웃는 것도 봤어. 정말이지 소름 끼쳐.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면 무섭다고.”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달라져서 다행이지. 계속 옛날 그 성질머리로 있었다고 생각해 봐. 그렇게 되면 고생하는 건 우리라고.”

“맞아, 맞아. 난 지금 공주님이 훨씬 좋아. 예전엔 진짜 장난 아니었잖아? 알고 보니 사춘기가 일찍 왔다가 지나가기라도 했나 봐. 열세 살에 철들었나 보지, 뭐.”

“사실…… 나 요즘 너무 양심에 찔려. 내가 그분한테 여태 너무 못되게 굴었던 거. 어떻게 보면 되게 불쌍하신 분인데…….”

“불쌍하긴, 무슨. 예전에 그분이 우리한테 어땠는지 기억 안 나? 공기 취급하고, 막상 말이라도 걸 때는 완전히 깔보듯 얘기하고. 재수 없어.”

“우리도 그분 공기 취급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그분은 황족이잖아. 인정하려니 짜증 나긴 하지만, 충분히 거만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잖아? 폐하의 딸인데.”

“그, 그것도 그렇지…….”

“야, 그런데,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황제 폐하의 따님께 그딴 식으로 군 거잖아?”

“음…….”

“괘, 괜찮겠지?”

괜찮을 리가 있나. 궁인들은 뒤늦게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적당량의 공포가 섞인 호의는, 첼루나의 위치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첼루나는 이제 자신을 모시는 시녀들과 시종들, 그리고 예전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호위대를 어느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족은 어려웠다. 황제는 여전히 막내딸을 부르기를 거부했고, 블레논은 동복동생의 달라진 태도에 대놓고 식겁했다.

“너 요즘 뭐 잘못 먹었니?”

복도나 후원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중얼대기 일쑤였다.

첼루나는 매번 어색한 웃음으로 응대했고, 블레논은 그 백치미 가득한 미소에 더더욱 질색하며 께름칙한 표정으로 물러서곤 했다.

아비와 오빠에 대한 기대감은 시작부터 원체 낮았으니 첼루나는 별로 상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논의 경우, 이 정도면 관계의 대단한 발전이었다.

예전에는 툭하면 동생에게 손을 올리던 그는 요즘은 그저 첼루나의 행동을 괴이쩍게 여길 뿐, 물리적 폭행은커녕 단순한 접촉조차 꺼렸다.

오빠에게 심심풀이로 얻어맞는 것보다는 정신 상태를 의심받는 게 훨씬 나았다. 첼루나는 일단 만족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그녀의 목표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혈육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궁에서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한결같이 무심한 태도로 그녀를 지나쳤다.

텔레스 포렌타인, 황후의 외동딸. 블레논의 이복동생이자 첼루나의 이복 언니.

회귀 전에나 후에나 늘 그래 왔듯, 그녀는 악의도 호의도 없는 눈빛으로 첼루나를 지나며, 담담한 고갯짓으로 동생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아직 두 자매는 그렇게 평행으로 흘러갔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회귀한 지도 1년째, 첼루나는 두 번째로 열네 살이었다.

그간 자기 아랫사람들의 호감을 성공적으로 획득한 첼루나는 슬슬 블레논의 사람들에게도 눈길을 돌렸다.

나중에 그녀가 텔레스 언니의 첩자로 일할 때, 친하게 지내 두면 정보를 빼낼 때 도움이 될 자들. 또는, 어쩌면 이번 생에는 텔레스 편으로 돌릴 수도 있을 자들.

예컨대, 아델라 프란체스. 첼루나는 프란체스 백작가를 기억했다.

백작의 딸 아델라는 첼루나와 동갑으로, 어릴 때부터 황자궁의 시녀로 일했다.

백작 본인은 블레논의 외조부 라토르 공작의 먼 방계 친척으로, 어떻게든 황자 편에 붙어 출세하고자 했던 권력 지향적 인물이었다.

그자의 말로가 어땠더라. 절대 유쾌하지는 못했다.

프란체스 백작은 비굴할 정도로 황자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정작 황자 본인은 프란체스가를 그리 귀중한 패로 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황자 측이 궁지에 몰려 하나둘씩 꼬리를 자르기 시작할 때, 프란체스가도 끝내 잘려 나갔다. 하여, 그 가문의 결말은 몰락뿐이었다.

본인의 불행에 정신이 팔려 남의 비운 따위야 연민할 틈도 없던 첼루나지만, 그런 식으로 버려진 과거 황자의 충신들을 생각하면 살짝 한심하면서도 안쓰러운 건 사실이었다.

특히 아델라 프란체스, 첼루나는 그녀에게 어렴풋이나마 마음이 쓰였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아델라는 백작이 되고 싶어 했다.

여자가 작위를 물려받는 게 드물긴 해도 불가하지는 않았으니, 아델라는 맏이라는 점을 내세워 동생 로날드 대신 백작위를 물려받는 날을 꿈꿨다.

그녀의 동생이 남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녀의 야심을 냉혹하게 짓밟았다.

아델라는 마음에도 없는 어느 사내에게 팔려 가듯 시집가야 했고, 훗날 그녀의 친정이 몰락할 때 본인도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야망은 컸지만 현실이 받쳐 주지 않았던 불우한 소녀 아델라.

첼루나는 그런 아델라가 내심 부러웠다. 그녀의 파멸이 아니라, 그녀의 열망이.

나는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그렇게 원해 본 적 있던가? 결국 부질없이 짓밟힌 꿈이었지만 아델라는 적어도 야심이 있었다.

핍박받는 데 익숙해진 첼루나는 데아론의 사랑으로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하며 그 무엇도 간절히 바라지 않았다. 꿈꾸지 않았다. 꿈을 위해 발버둥 친 적 없었다.

내가 전생에 조금이라도 더 능동적으로 나섰다면, 데아론의 결말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어머, 공주님?”

열네 살 수습 시녀 아델라는 잠시 휴식을 얻어 황자궁 후원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바스락대는 소리를 들었고, 의아하여 돌아본 결과 공주를 발견했다.

“아, 으응, 안녕.”

황자궁 후원을 은밀한 척 돌아다니던 첼루나는 아델라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웃었다. 매우 의도적으로 처연한 미소였다. 효과는 대단했다.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델라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호의를 그득 담고 첼루나를 응시했다.

청초한 외모에 연약한 미소, 만들어진 백치미로 중무장한 첼루나는 보는 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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