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4)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노크에 이어 공주의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블레논은 심술궂게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

첼루나가 들어왔다. 시종은 뒤따르지 않았으므로 방 안에는 남매만 단둘이 남았다.

“이 생각 없는 년!”

블레논은 씩씩대며 공주에게 다가갔다. 짝! 오빠가 동생을 폭행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밤중에는 왜 돌아다니는데? 유령 놀이라도 하고 있었냐? 그리고 갑자기 연도는 왜 물어봐? 저능아야?”

구구절절 화풀이가 이어졌다. 첼루나는 묵묵히 경청했다.

평소보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블레논이 미처 의아해하기 전이었다. 첼루나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블레논은 스스로 뚝, 그쳤다. 그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어, 어?”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제가 잘못했어요. 전하의 이름에 누를 끼친 걸 용서해 주세요.”

“아아, 어, 응. 그래.”

전례 없는 흐름에 블레논은 말을 더듬었다. 그는 낯선 사람 보듯 동생을 쳐다보았고, 어린 공주는 가련한 눈망울로 고개를 시무룩하게 숙였다.

‘얘 왜 이래?’

블레논은 심각하게 경악했다. 얘 미쳤나? 알고 보니 정말 이상해진 거 아냐? 그래서 오늘 새벽에 복도에서도 그 난리를 쳤고?

첼루나는 원래 절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권위도 권력도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는 자존심만 남아 항상 바락바락 대들었다.

오빠에게 불려 와 뺨을 맞고 근거 없는 비난을 줄줄이 듣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첼루나가 격분하며 꼬박꼬박 말대꾸하다가 몇 대 더 맞는 것도 일상적이었다.

얌전히 폭언을 듣고 있다가 우수에 찬 눈으로 사과하는 첼루나라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블레논은 혼란 속에서 자신의 낯선 동생을 마주했다.

“뭐, 음, 알면 됐어. 앞으로 그딴 짓은 벌이지 마. 내 이름에도 먹칠하는 일이라고.”

“네,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그래, 그래야지. 어, 이제 나가 봐.”

블레논은 얼떨결에 그녀에게 퇴장을 명했다. 이례적으로 짧은 화풀이였다.

보통은 동생이 대들고, 오빠는 더 화내고, 동생이 피 터지게 얻어맞고 나서야 폭풍이 끝나는데, 한쪽이 풀이 죽자 상대편의 흥분이 픽 식으면서 더는 싸울 이유가 없어졌다.

“네, 황자 전하.”

첼루나는 우울하게 속삭였다. 블레논은 저 호칭도 생경했다.

맨날 나한테 야, 너, 블레논, 거리면서 죽어도 예를 갖추지 않던 건방진 계집은 어디 갔어?

‘뭐야, 얘. 진짜 돌아 버린 건가?’

블레논은 내리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첼루나는 그에게 다소곳이 인사한 뒤 살그머니 퇴장했다.

황자의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과 시종들은 첼루나가 벌써 나온 걸 보고 어리둥절했다. 뭐야, 오늘은 왜 이렇게 빨리 끝났지? 하며.

시녀 없이 여기까지 온 첼루나는 돌아갈 때도 시녀 없이 걸었다.

첼루나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얼굴을 확 찡그렸다. 그제야 평소의 표정이 나왔다.

‘아오, 블레논 새끼. 이때도 이렇게 손이 매웠구나.’

10년의 세월이 흐르며 기억도 흐려졌다.

스물여덟 살 블레논의 난폭한 모습은 생생히 기억났지만, 열여덟 살 블레논의 폭행은 오랜만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첼루나는 근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뚱하게 노려보았다. 검푸른 손자국이 한쪽 뺨을 뒤덮었다. 소녀의 금빛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지금 너는 툭하면 내게 손찌검하며 나와 텔레스 언니에게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길길이 날뛰지만.

과거, 또는 미래에 오라비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똑똑히 보고 온 첼루나는 다시 마주한 그가 그저 우습기 짝이 없었다.

‘길어 봤자 10년이야.’

네가 그토록 무시하던 ‘한낱 계집’에게 너는 무릎을 꿇었어. 우리 아비의 총애도, 네 잘난 외가도 너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어. 너는 패배자였어.

이번 생에도 반드시, 너는 치욕을 당하리라.

표정을 갈무리한 첼루나는 짧게 심호흡한 뒤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방으로 돌아갔다.

침실에 도착한 첼루나는 곧장 시녀를 불렀다. 시녀는 퍽 불손한 태도로 소환에 응했다.

“엘리나, 가서 의사를 불러 주겠니?”

“네, 네?”

엘리나라는 이름의 시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충격받은 눈으로 첼루나를 쳐다보았다. 첼루나는 구슬픈 태도로 가냘프게 말을 이었다.

“얼굴이 너무 아파서……. 부디, 남들에겐 알리지 말고 의사만 조용히 불러 주렴.”

시녀는 여전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공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며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네, 공주님.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시녀는 후다닥 퇴장했다. 다시 방에 혼자 남은 첼루나는 옅은 비소를 흘렸다.

‘그래, 확실히 놀랄 만하지.’

전생에 첼루나는 시녀들의 이름 따위 불러 주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그녀를 무시했듯, 그녀도 아랫사람들을 무시했다.

권력도 권위도 없으면서 초라한 자존심만 남은 첼루나는 시녀들과 시종들에게도 한결같이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겹겹의 까칠함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남들에게 상처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었다.

설령 그 대가로 자신이 더욱 미움받더라도, 만만하게 보이느니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그토록 사납게 살아왔다.

이제 첼루나는 전략을 바꾸었다. 만만하게 보이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유약하진 않으면서 온화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아마 난생처음으로, 그녀는 데아론이 아닌 타인에게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과거랑 똑같이 굴어서는 데안에게 도움이 될 수 없어.’

고귀하게 태어났음에도 모두에게 천대받고 외면받는 황녀. 그녀는 권력도 권위도 없었고, 아군이라 부를 자도 데아론 빼고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분명 그녀에게도 다른 길이 있었을 것이다.

정신 나간 황제야 그렇다 쳐도, 죄 없는 갓난아기를 보고 저년이 황비 전하의 죽음을 불렀다며 손가락질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분명, 첼루나도 동정받을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직 비교적 어릴 때, 백지 상태의 어린아이였을 때.

하지만 첼루나 본인이 그 여지를 튕겨 냈다.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남들의 얄팍한 호의가 가증스러웠다.

외롭게 큰 첼루나는 참으로 냉소적이고 삐딱해서,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제게 잘해 주려는 사람들마저 튕겨 냈다.

결국 그녀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녀가 열세 살일 때쯤 그녀의 아비와 오라비뿐만 아니라 그녀를 모시는 궁인들마저 그녀에게 차가웠다.

첼루나는 과거의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괴로웠고, 외로웠으니까.

괴롭고 외롭다고 무조건 삐뚤어지는 건 아니지만, 만약 실제로 삐뚤어졌다면 이유야 충분했다.

이제 첼루나는 달라졌다. 상처받은 만큼 상처 주는 대신, 가식을 떨고 아양을 부려서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말리라.

황제의 태도까지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황궁에 수족 하나 두지 못한 신세보다는 나을 것이다.

“공주님, 모셔 왔습니다.”

시녀 엘리나가 곧 돌아왔다. 엘리나와 마찬가지로 궁정 의사도 퍽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첼루나 공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게. 와 줘서 고마워.”

의사의 어색한 인사말에 첼루나는 정중하게 화답한 뒤 사뭇 처량하게 웃었다.

세상에. 시녀와 의사는 아까 블레논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첼루나는 저 넋이 나간 표정에 키득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저기, 음. 공주님께서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아. 사실, 얼굴이 너무 아파서. 지금까지는 내가 대충 알아서 치료했는데,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살면서 첼루나는 자신이 학대받은 흔적을 남한테 대놓고 보인 적이 없었다.

학대한 쪽에서 딱히 숨기지 않았으니 첼루나도 굳이 은폐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부질없는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늘 침묵했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호소하지 않았고, 도움을 구한 적 없었으며, 의사를 불러 학대 사실에 쐐기를 박지도 않았다.

오직 데아론에게만 그녀는 모든 것을 보였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데아론은 연인 편에서 황제를 욕하고 황자를 저주하며 불같이 화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는 그도 무력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아, 네, 그렇습니까. 그럼 상처를 잠시 살피겠습니다.”

“부탁하네.”

의사는 조심스레 다가왔고, 공주는 얌전히 대꾸했다. 이어, 의사는 침착한 전문가의 모습으로 환자의 상처를 닦고 연고를 덧발랐다.

따가운 약품이 아팠지만, 첼루나는 엄숙히 부동을 유지했다. 어차피 신체적 통증쯤이야 익숙한 탓에 쉽게 견딜 수 있었다.

첼루나가 미간을 좁히거나 입술을 살짝 깨문 건 정말로 치료가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었다.

환심을 얻고 연민을 산다. 이게 첼루나의 주된 전략이었다. 그러려면 너무 잘 참아도 효과가 없었다.

적당히 가련하게, 적당히 연약하게, 불쌍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다 됐습니다, 공주님.”

“고맙네, 경.”

의사가 아뢰자 공주는 침울하게 속삭였다. 의사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에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공주님.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이때쯤 첼루나 황녀는 이미 성질 더럽고 싸가지 없는 계집애로 온 황궁에 소문이 자자했다.

어미를 잃고 아비에게 미움받는 그녀를 동정할 만도 했건만, 짓밟힐수록 오기를 부리는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도리어 반감을 불렀다.

그녀의 상처를 진지하게 감싸 주려는 이는 없었다. 얄팍한 연민으로 다가왔던 이들은 쉽게 튕겨 나갔고, 아무도 그녀를 더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오늘 첼루나를 방문한 궁정 의사도 막내 황녀를 향해 잔뜩 꼬인 생각만 품고 있던 자였다.

황제와 황자가 그녀를 학대한다고는 하지만, 첼루나가 매번 자존심 때문에 의사를 부르지 않았으므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자는 별로 없었다.

학대라니, 그냥 공주가 엄살을 부리느라 부풀려서 전해진 얘기겠지. 의사는 그토록 매정하게 생각했었다.

오늘 처음으로 공주를 가까이서 마주한 그는 과거 자신의 쓰레기 같은 모습을 반성하며 공주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싶어졌다.

엄살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실제로 이 손자국은 세게 얻어맞은 흔적이었다.

게다가 까칠하고 쌀쌀맞기로 소문난 공주는 막상 오늘 만나 보니 유순하고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음침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방금 뺨을 맞고 돌아온 아이에게 발랄한 모습을 기대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이, 그래, 아이였다. 올해 공주의 나이가 고작 열세 살이었다.

의사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앞으로는 절대 공주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