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가 차라리 텔레스 언니처럼 나를 무시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구태여 매번 나를 찾아와 희롱하고, 품평하고, 이용하고, 경멸하고. 내 아버지와 오라비와 시녀들이 그랬듯,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 세상에서 첼루나가 바란 건 오직 데아론의 관심이었다. 그 애가 자신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봐 준다면, 다른 모두가 자신을 공기 취급해도 기쁠 것 같았다.
데아론. 죽은 연인을 떠올리자 다시 숨통이 콱 조였다.
‘아니야. 죽지 않았어. 아직은 아니야.’
이제는 아니야. 첼루나는 세차게 도리질하며 심호흡했다.
데아론은 이제 다시 열세 살이었다. 데아론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었다.
앞으로도 그는 계속 살리라. 기적처럼 찾아온 두 번째 생에서 그가 스물세 살 꽃다운 나이에 요절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오래오래 살아남아 자연스레 늙을 것이고, 다정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곁에서 느긋하게 노후를 계획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내는, 내가 될 수 없겠지.
‘……이번에는 내가 너를 지킬게.’
상상만으로도 비참한 미래지만, 모든 비참함은 나의 몫이요, 너는 오로지 행복할 테니.
회귀 이전, 데아론이 첼루나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타인의 칼에 너무도 일찍 목숨을 잃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 생에, 첼루나는 데아론을 멀리할 작정이었다.
그를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는 일은 심장을 뜯어내는 것처럼 고통스럽겠지만, 그로써 데아론을 살릴 수만 있다면 첼루나는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번에도 텔레스가 승리해야 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간이 엄청나게 달라지지 않는 한, 데아론의 가문은 텔레스를 따를 테고, 황녀가 승리해야 그들도 건재할 테니.
‘지난 생처럼 황녀 전하가 승리하고, 데아론은 계속해서 그분을 섬기고, 내가 그 애랑 연인이 아닌 상태에서 블레논이 몰락하면…….’
그러면, 완벽하게 동화 같은 결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발랄하게 낭송한 뒤 책을 닫으면 그만일까.
아니, 그렇다기엔 찜찜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번 생에는 데아론을 멀리할 각오에 심장이 뜯겨 나갈 듯 아픈 것만이 유일한 문제가 아니었다.
각오한 대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그깟 고통쯤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감내하리라. 하지만, 과연 각오한 대로 이룰 수 있을까.
‘애초에 내가 미래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 거지?’
미래인지 과거인지, 시간을 정의하기조차 까다로웠다.
현재 첼루나는 열세 살로 돌아왔으니 그녀가 스물셋에 겪은 일들은 미래에 속하겠으나, 그 미래를 뒤로하고 시간을 거슬렀다는 걸 생각하면 지금은 그녀의 과거였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불명확했다. 정확히 회귀라는 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 건지도 첼루나는 알 수 없었다. 배운 적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사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긴가민가하다고.’
자신이 정녕 과거로 돌아왔다는 엄청난 사실을 신속하게 받아들인 지금도 문득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원래 저승이란 건 전부 망자의 과거로 이뤄진 허구의 공간일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리 이게 현실이라도, 만약 내가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에는 운명론이라는 게 있다. 첼루나의 신념과는 거리가 먼 인생관이었으나, 그게 무조건 틀렸다고 우길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정말 이 세상에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고, 모든 게 미리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이라면, 내가 과거로 돌아와 봤자 무슨 소용이 있지?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지난 생의 스물세 살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한다면.
“안 돼.”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사납게 씹어 뱉었다.
그 음성조차 너무 앳되어, 그녀는 자신이 열세 살 소녀 때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첼루나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지난 생과 똑같은 최후라니, 아니 된다. 절대 안 된다.
데아론이 그때처럼 또 비참하게 죽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운명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 첼루나가 당장 증명할 길은 없었다. 어쩌면 그런 길은 당장뿐만 아니라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조차 없는 운명 때문에, 고작 운명 때문에 데아론을 지키려고 제대로 노력해 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 없었다.
그깟 운명, 어디 한번 신나게 날뛰어 보라지.
만약 그런 게 있다면, 그리고 고작 그딴 게 데아론을 죽음으로 몰아가려 한다면, 나는 운명과 싸울 거야.
‘이번에도 황녀 전하가 반드시 이겨야 해.’
첼루나는 단호하게 갈망했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지난 생과 달라지지 말아야 했다.
데아론을 위해서인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첼루나는 차라리 텔레스의 승리를 바랐다. 재수 없는 오빠 새끼가 권좌에 앉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나는…….’
그리고 이번 생에, 나는?
나는 또, 지난 생과 마찬가지로 꼴사나운 오라비의 장기짝으로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삶을 마감해야 하나?
아니면, 어쩌면. 이 또한 달라질 수 있을까.
‘이번 생에는, 어쩌면, 나도.’
내가, 블레논이 아닌 텔레스 언니를 선택한다면.
첼루나는 골똘히 회귀 전의 삶을 돌이켰다. 동복 오빠와 이복 언니의 치열한 정쟁. 그 모든 걸 시큰둥하게 방관한 천덕꾸러기 막내.
사는 게 너무 참담하고 모두의 멸시가 지겨워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첼루나는 그 누구도 응원하지 않았다.
블레논이 이기든 텔레스가 이기든 자기는 똑같이 쓸쓸한 삶을 살 것 같았다.
세상을 향한 삐딱하고 냉소적인 감정에 가득 찬 터라, 그녀는 그토록 안일하게 생각했다.
딱히 텔레스를 적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블레논이 무언가를 시키면 억지로라도 따랐다. 참 초라하고 수동적인 삶이었다.
첼루나는 이제야 궁금해졌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의 길을 개척했다면, 뭔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데아론이 그토록 외롭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황녀 전하를 따를 방법이 있을까.’
가능할까? 나는 황비의 딸인데? 핏줄로만 따진다면 언니보다 오빠 놈한테 훨씬 가까운데.
하긴, 동복이든 이복이든 어쨌든 혈육이었다.
이복 남매끼리 서로 죽이기 위해 싸울 만큼 핏줄이 무가치하다면, 배다른 동생인 내가 텔레스 언니를 섬기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
혈연도 분명 중요한 요소였지만, 때로는 정치적 이해득실이 핏줄의 공유를 압도했다.
아무리 권력과는 거리가 먼 천덕꾸러기 황녀라도 그 정도 현실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블레논의 동복이라는 점을 이용할 수도 있어.’
첼루나는 숙고를 이어 갔다. 자신이 블레논과 어머니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첼루나를 황자 편으로 몰아갔다.
그 점을 역이용할 수는 없을까.
다들 나를 황자 편으로 오해할 때, 내가 오히려 황녀를 따른다면. 황자의 아군인 척하며 그의 정보를 몰래 빼돌려 황녀에게 바친다면.
‘해 볼 만해.’
첼루나는 결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녀는 데아론을 위해 운명과 맞설 준비를 마쳤으며, 앞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싸울 각오를 다졌다.
기적처럼 주어진 두 번째 삶은 절대 고통 속에 낭비하지 않으리라.
그녀가 마음을 다잡는 사이, 동이 텄다.
열여덟 살 블레논은 아침부터 불쾌한 보고를 들었다. 그의 모자란 동복동생, 열세 살 첼루나에 관한 보고였다.
“걔는 또 왜 그런대?”
시종을 물리고 혼자 남은 황자는 짜증스레 중얼댔다.
어젯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새벽, 뜬금없이 잠옷 차림으로 복도에 들이닥친 공주는 경비병을 붙잡고 다짜고짜 날짜를 묻더니 미친 사람처럼 폭소했다고 한다.
그년이 드디어 돌았나. 하여튼 여러모로 부끄러운 동생이었다.
어머니의 삶을 갉아먹고 태어난 주제에, 제 분수를 알고 죽은 듯이 살 것이지.
사사건건 건방지게 구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밤중에 미친년 행세를 하다니, 성마른 짜증이 왈칵왈칵 치밀었다.
블레논은 다시 시종을 불러 공주를 데려오라고 시켰다.
그는 동생이 도착하기 전부터 물건을 던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무의식중에 주먹을 움찔거렸다.
하여튼 왜 자기 동생이란 것들은 이렇게 성가신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원래 계집이란 족속은 죄다 그런 걸지도 몰랐다.
블레논은 최근 제 신경을 점점 거스르는 이복동생 때문에도 머리가 아팠다.
올해 성인이 되어 사교계에 데뷔한 열일곱 살 텔레스는 제국의 고위 귀족들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황자인 자신과 공공연히 비교되고 있었다.
블레논은 기가 막혔다. 그깟 애가 나랑 비교된다고? 나랑, 감히 나랑? 당연히 그 애가 내 발치에도 못 미칠 텐데, 비교조차 될 수 없는데?
아무리 자신은 후궁 소생이고 그년은 황후의 딸이라 해도, 아들은 그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블레논 자신이 황제 폐하의 장자였다.
맏아들인 그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마치 뭔가를 바라는 듯한 텔레스가 블레논은 늘 불쾌했다.
그 계집의 거만한 눈초리, 당당한 몸짓. 정비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제 오라비보다 낫다고 믿는 듯한 터무니없는 시선.
“건방진 년.”
내 어머니도 엄연한 명문가 여식인데, 대체 내가 왜 황후의 딸에게 밀린단 말이냐.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직 내 외가는 건재하고, 내 외조부이신 라토르 공작께서 나를 물심양면 지원하고 계시거늘.
무엇보다, 황제는 아들을 예뻐했다. 단지 장자를 향한 보수적인 애정만은 아니었다.
황제는 황비를 사랑했고, 그녀가 딸을 낳고 죽은 뒤로도 여태까지 그녀를 그리워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 호색한 황제는 황비의 죽음 이후 단 한 명의 정부도 들이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죽은 라토르 공녀를 향한 연정이 깊은 황제가 공녀의 목숨을 앗아 간 막내딸을 혐오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숙덕이곤 했다.
사실 그게 당연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첼루나를 향한 학대는 그렇게 정당화됐다.
블레논은 동복동생을 향한 학대를 그딴 식으로 정당화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어릴 적 잃어버린 엄마의 온기를 그리워했고, 그 삐뚤어진 슬픔을 전부 그러모아 죄 없는 동생에게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