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4)

온 세상이 붉었다. 피처럼 붉은 황혼이었다. 첼루나의 손도, 옷도, 연인의 피 묻은 손이 닿았던 얼굴도. 온통 새빨갰다.

첼루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덧없이 가라앉은 금색 눈으로 사내의 시신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마침내, 천천히 돌아섰다. 빛이 아닌, 어둠을 향해.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데아론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서 말을 타고 다시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어디로 도망치지?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더는 없는 내가?

빈털터리, 외톨이, 고아인 내가. 돈도 없고 먹고살 길도 없는, 내가.

그냥 차라리, 나도 죽을까.

“……안 돼.”

그나마 한마디 반론쯤 중얼거릴 힘은 남았다. 그녀는 천천히 계속 걸었다. 유령처럼, 시체처럼.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죽은 것처럼.

“살아야 해…….”

그게 데아론의 유언이니까. 그가 나를 위해 죽었으니까. 그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도망쳐야 하니까.

그런데, 대체 어디로?

첼루나는 계속 걸었다. 동굴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 나랑 데아론이 사용한 동굴인가? 모르겠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첼루나는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불을 지핀 흔적이 없었다. 다른 동굴이구나. 첼루나는 멍하니 수긍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동사하기 딱 좋은 날씨임을 알면서도, 첼루나는 도저히 땔감을 모아 모닥불을 지필 의지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불을 지피는 법을 몰랐다. 아무리 천덕꾸러기로 컸다 한들, 명색이 황족인 그녀가 대체 언제 숲속에서 불을 지필 일이 있었을까.

아침에 데아론은 첼루나를 위해 나무를 모으고 부싯돌을 이용해 모닥불을 지폈다. 과거 마수 토벌 시절, 야영이 잦았던 그때 익힌 기술이라고 했다.

이제 그녀를 위해 불을 지펴 줄 연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첼루나는 그 상실을 멍하니 직시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통증, 통증, 통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데아론의 손이 닿았던 뺨, 더는 제대로 뛰는 것 같지 않은 심장, 제멋대로 찌그러져 비명을 지르는 폐.

물리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가슴이 아프다, 숨이 막힌다, 이런 표현은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었다. 정말로 명치에 구멍이 뚫린 듯했고, 손가락 끝까지 욱신댔다.

데아론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의 유언을 지켜야 하는데. 이러다간 심장통과 호흡 곤란으로 요절할 것 같았다.

첼루나는 스르르 무너졌다. 잠들려는 건지 기절하려는 건지, 점차 시야가 흐릿해졌다.

차가운 돌바닥에 몸을 누인 채 첼루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뺨에 눌어붙은 눈물이 축축했다.

그녀는 그렇게 스르르 기절했다. 모든 의지를 잃은 채.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꿈꾸듯, 또는 기도하듯, 첼루나는 조용히 울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반드시 너부터 살릴 거야.’

이후, 의식이 침잠했다.

그녀의 손안에서 목걸이의 보석은 영롱하게 빛났다.

* * *

긴긴 악몽을 헤맸던 것 같다. 악몽이 아니라고 우기기엔 대체로 너무 비참한데, 군데군데 기쁘고 달콤한 부분도 몇 개 있었다.

첼루나는 침대에서 뒤척였다. 침대. 침대? 돌바닥은 어디 가고? 첼루나의 눈꺼풀이 가냘프게 떨렸다. 직후, 퍼뜩 열렸다.

첼루나는 공주 시절의 익숙한 천장을 정신없이 쳐다보았다.

“……뭐야?”

다른 어떤 구체적인 감상이 떠오르기도 전에 그저 얼떨떨해서, 첼루나는 계속 천장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이상하게 앳되다.

첼루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밤중이었다. 아니, 방 안에 살짝 빛이 감도는 걸 보니 슬슬 새벽녘이 다가오는 듯했다.

첼루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푹신한 깔개를 밟았다. 발깔개라니. 음침한 동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었다.

첼루나는 방을 가로질러 거울 앞에 섰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비추는 긴 거울이었다.

그 안에는 소녀가, 기껏해야 열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소녀가, 석양 같은 머리칼과 황금 같은 눈을 지닌 어린애가, 첼루나를 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탄식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쥐어짠 신음마저 본인의 귀에 앳되게 들렸다. 기묘하다 못해 기괴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데.>

아니야. 설마. 그런 게 진짜로 가능할 리가 없잖아.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아무리, 내가 그렇게 빌었어도.

<그러면 반드시 너부터 살릴 거야.>

데아론, 너를 위해 그렇게 빌었어도.

“……데아론.”

앳된 목소리가 중얼댔다. 데아론. 첼루나의 심장이 난폭하게 흔들렸다.

거울 속에서 저를 쳐다보는 익숙한 듯 낯선 소녀도, 자신이 기묘하다 못해 기괴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도 순간 하찮아졌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이게 꿈이 아니라면?

첼루나는 휙 뒤돌았다. 그녀는 단숨에 뛰어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쾅!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그러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첼루나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녀가 어릴 때, 사실은 평생, 그녀가 받았던 취급은 늘 이랬다.

황녀의 처소 앞에 당직을 서는 시녀가 한 명도 없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마저 무시당하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탄식할 때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딴 게 무슨 상관일까.

첼루나는 아무도 없는 냉한 복도를 정신없이 뛰었다. 역시, 황녀의 처소치고는 너무 춥고 어둡고 한적했다.

천덕꾸러기 황녀는 자신이 받는 비참한 대우에 울분을 삼키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단 하나가 중요했다.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거기, 너!”

마침내 첼루나는 사람을 발견했다. 황궁 복도를 순찰하는 경비병이었다.

첼루나가 빽 외치자 병사는 놀라서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익숙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네, 공주님. 이 밤에 여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 저 비꼬는 목소리. 모욕적인 호칭. 전부 첼루나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일개 경비병의 불손한 태도에 화내는 대신, 어려진 첼루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오늘이 언제야. 올해가 몇 년도야? 빨리 대답해!”

경비병은 첼루나가 미친 것처럼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급하게 답변을 기다렸다.

“제국력 308년 6월 17일입니다.”

경비병은 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는 눈앞의 어린 공주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 관찰했다. 그 같잖은 시선은 안중에도 없이, 첼루나는 멍하니 계산했다.

제국력 308년. 올해 그녀 나이 열세 살. 그녀는 10년 전으로 돌아왔다.

“……아.”

꿈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오다니, 말도 안 돼.

“아하하, 하, 하하…….”

하지만 만약에, 꿈이 아니라면. 정말 그녀가 10년의 세월을 거슬러 지금 이곳에 왔다면.

“하하, 하. 아아.”

그렇다면, 데아론은 살아 있다.

첼루나가 열세 살이 됐으니 데아론도 열세 살이 됐다. 그리고 나이 열셋에, 데아론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경비병은 밤중에 다짜고짜 뛰쳐나온 공주가 제게 올해 연도를 묻더니 실성한 듯 깔깔대는 모습을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첼루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모두에게 무시당하는 우스운 계집 따위, 한 번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그리고 어차피, 첼루나는 냉정하게 그런 것까지 계산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이 꿈이 아닌 생시인 이상, 그녀의 갈망은 오직 하나.

<그러면 반드시 너부터 살릴 거야.>

데아론을 지키는 거였다.

첼루나는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힐끔대는 병사에게 한마디 설명도 없이, 그대로 뒤돌았다.

애초에 그녀가 남에게 상황을 설명할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 내가 사실은 미래에서 왔으며, 내 품에서 죽었던 연인이 되살아난 게 너무 기뻐서 광인처럼 웃었다고?

어차피 첼루나는 주변 사람에게 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상냥함과 섬세함은 오직 데아론을 위함이었다.

나를 경멸하고 냉대하는 자들에게 내가 친절할 이유가 무엇일까. 오직 데아론이 내게 사랑을 보였으므로 나 역시 그에게 사랑을 바쳤다.

경비병이 그녀의 행동에 혼란을 품든 말든, 아랫사람이 그녀를 이상하게 여기든 말든 개의치 않고, 그녀는 뻔뻔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나, 과거로 돌아왔어.’

침대에 털썩 걸터앉은 첼루나는 아직도 살짝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찬찬히 궁리했다.

‘열세 살 때로 회귀했어.’

첼루나는 다시 거울을 흘깃했다. 빨간 머리, 금색 눈, 몹시 예쁜 얼굴. 전부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였으나, 다만 딱 10년을 어려진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가 죽은 황비의 판박이라고 쑥덕거렸다. 색깔도 비율도 전부 어미를 닮아서, 그래서 황제가 그녀를 더욱 싫어하는 거라고.

네 모친을 죽인 주제에 그 모친과 똑같이 생겨서는 망령처럼 눈앞에 알짱댄다고 어찌나 화를 내던지.

자신의 불쾌한 아비를 곱씹던 중, 첼루나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살아 있겠네.’

10년 전으로 돌아와 데아론을 되살린 일은 참 기뻤다. 그런데, 그녀가 열세 살이라면 자신의 아비도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과 블레논, 텔레스의 아비. 첼루나는 오라비와 이복 언니를 차례로 떠올리며 10년 전, 그러니까 현재, 그들의 상황이 어땠는지 곰곰이 회고했다.

‘블레논은 열여덟, 황녀 전하는 열일곱 살.’

블레논과 황녀 전하. 첼루나가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호칭은 각 피붙이를 향한 그녀의 심정을 대변했다.

첼루나는 오라비를 싫어했지만, 그가 두렵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때때로 손을 올릴 때마다, 그를 향한 증오가 너무 커서 다른 감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텔레스는 달랐다. 황후의 소생인 그녀는 첼루나에게 조금 먼 존재였고, 거리감이 느껴질수록 그녀는 더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애초에 자매가 서로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게 서먹함의 주된 이유였다.

한쪽은 황후 소생이고 한쪽은 황비의 딸이라는 뻔한 이유는 둘째 치고, 차기 황제 후보로 거론되는 고귀한 황녀는 천대받는 막내와 다른 세계에 살았다.

같은 황녀였으나, 결코 같을 수 없었다. 밑바닥에 자리한 동생은 꼭대기에 있는 언니를 바라보며 부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텔레스가 굳이 이복동생을 찾아와 시비 거는 일에 힘을 낭비했다면, 첼루나는 오빠에게 그러했듯 언니에게도 날을 세우며 유대 아닌 유대를 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텔레스는 첼루나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괴롭히는 것도 아니면서, 감싸 준 적도 없었다.

첼루나는 그런 언니를 미워한 적 없었다. 차라리 깔끔한 무시가 더 고마웠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지만, 글쎄. 첼루나는 무관심보다 미움이 더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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