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4)

데아론은 연인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짐작했다. 사실 그 혼자였으면 최소 몇 시간은 더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으나, 그는 첼루나를 최우선으로 배려했다.

애초에 이 도주 자체가 첼루나를 위한 거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래, 이 모든 건 첼루나를 위해서였다. 아무리 이로써 자신이 가족을, 주군을, 제가 받을 윤택한 미래를 전부 저버릴지라도.

데아론은 첼루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건 엄연히, 온전히 자기 자신의 선택이니.

첼루나가 죽든 말든 그냥 이 악물고 외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그러기 싫어서, 데아론은 순전한 자기 의지로 지금 이곳에 나아왔다.

“그래, 그럼. 조금만 쉬자.”

첼루나는 간신히 중얼거렸다. 예정된 휴식 앞에서 몸의 긴장이 풀리며 묵직한 졸음이 밀려왔다.

아직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자각이 무색하도록, 한계에 다다른 인간의 몸은 기어코 픽 스러졌다.

첼루나의 몸이 풀썩 꺾였다. 데아론은 그녀가 땅에 닿기도 전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으로 받았다.

“푹 쉬세요, 공주님.”

데아론은 어차피 듣지 못하는 첼루나의 귀에 애달프게 소곤댔다.

이후, 그녀의 어깨와 다리를 소중히 감싼 채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은 아침으로 변했고, 점점 햇볕은 짙어졌다.

첼루나의 무의식은 악몽으로 가득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얼음보다 차가운 경멸, 오빠의 참패, 그녀를 죽이고자 하는 언니, 그리고 데아론, 데아론, 데아론.

악몽 속에서 첼루나는 데아론의 시체를 봤다. 그가, 자기 품에서, 죽어 가고 있었다.

첼루나는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피를 다시 주워 담으려 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공주님. 공주님!”

“데안, 으으, 안 돼…….”

“루나, 일어나, 어서!”

“으윽, 데안……?”

꿈과 현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첼루나는 헐떡이며 눈을 홉떴다.

“일어나, 어서.”

데아론의 음성은 긴박했다. 악몽에 시달리는 연인을 달래 주는 다정한 말투가 아니었다. 바로 그 말투 때문에 첼루나는 직감했다. 아, 뭔가 끔찍하게 잘못됐구나.

“당장 가야 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

자상하고 섬세하여 항상 첼루나가 제게 과분하다고 여기던 남자는, 악몽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는 애인을 이토록 급박하게 다그칠 사람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끌어안고 토닥여 주지는 못할망정 빨리 일어나라고 채근하다니, 전혀 평소 데아론답지 않았다.

첼루나는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벌떡 일어나려고 했는데 운동 신경이 딱히 뛰어나지 않은 터라 넘어질 뻔했다.

데아론은 연인의 버벅대는 동작에 굴하지 않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데아론은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기서는 말이 불안하게 투레질 중이었다.

“타.”

데아론이 간청했다. 첼루나는 말없이 승마했다. 단숨에 그녀 뒤에 따라붙은 데아론은 어젯밤처럼 고삐를 움켜쥐며 박차를 가했다.

“이랴! 하!”

말은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 주인이 질주를 재촉해서만이 아니라, 아마 짐승의 예리한 감각이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첼루나는 말의 목과 연인의 가슴 사이에 파묻힌 채 숨을 참았다. 이제는 그녀도 확실히 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말발굽의 진동. 추격자가 따라붙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더 주의 깊게 망을 봤어야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따라붙을 줄 모르고—”

“괜찮으니까 그냥 집중해.”

데아론이 처절하게 한탄하자 첼루나는 이를 악물고 받아쳤다.

이제 와서 데아론이 제대로 망을 보지 않았다고 질책할 마음은 전혀 없었거니와, 그럴 시간도 없어 보였다.

데아론은 연인의 종용에 따랐다. 그는 입을 다물고 오로지 속도를 내는 데 집중했다.

기수의 맹렬한 재촉에 따라 기마도 바람처럼 움직였다. 그러다가—

“악!”

첼루나가 작은 비명을 토했다. 실제로 다친 건 아니었다. 다만, 화살 하나가 섬뜩하게 그녀의 귓가를 스치면서 심장이 덜컥 흔들렸다.

데아론은 욕설하며 고삐를 당겼다. 첼루나는 늘 다정하고 점잖기만 한 애인이 비속어를 내뱉는 참신한 상황을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말에서 내려.”

“뭐?”

“내려야 해. 이렇게 계속 달리다가 말이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우리 둘 다 즉사야. 어서!”

긴박한 상황에 맞춰 반말로 돌아온 데아론이 속사포로 지시했다. 첼루나는 알아듣고 곧장 뛰어내리다시피 했다. 그녀의 본능과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당연한 본능은 말에게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멀리,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하거늘, 추격자가 코앞까지 다다른 마당에 말에서 내리라니?

하지만 데아론의 분석은 정확했다. 전속으로 뛰는 와중에 말이 화살에 맞는다면 그와 첼루나는 낙마할 수밖에 없었고, 이 속도에서 땅에 떨어지는 순간,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

차라리 지금은 말에서 내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기는 게 안전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 했다.

“이쪽으로.”

데아론이 첼루나의 손을 낚아챘다. 첼루나는 맹목적으로 맞잡았다.

두 사람은 은폐물을 찾아 정신없이 달렸다. 결과는 꽤 절망스러웠다. 초겨울의 숲속은 퍽 삭막해서, 그들을 숨겨 줄 만한 무성한 수풀과 울창한 녹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늠름하게 자리한 거대한 고목은 뱀처럼 뒤엉킨 굵은 뿌리 사이에 사람 둘이 쏙 들어갈 만한 공간쯤은 마련했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손을 잡은 채 뿌리 사이 적당한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첼루나도 그를 뒤따랐다. 흙과 낙엽, 축축한 겨울비 냄새가 났다.

“첼루나.”

데아론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본능적인 공포로 숨이 콱, 막혔다.

“나는 나가서 싸울게.”

“안 돼!”

“쉬이, 소리 지르지 말고. 여기서 저놈들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끝까지 쫓아올 거야. 도망치려면 맞서는 수밖에 없어.”

“말 똑바로 해. 누가 도망치는 걸 말하는 거야? 우리 둘이 같이? 아니면 나 혼자?”

아, 그녀는 그를 너무 잘 알았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더 평안했을까. 첼루나가 윽박지르자 데아론은 입술을 꾹 물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다.

“차라리 그냥 같이 죽어.”

첼루나는 고집했다. 내가 너 없이 왜 살아, 어떻게 살아. 평생 혼자, 외롭게, 항상 쫓기며, 도망친 반역자 공주이기에 어디 편히 정착도 못 하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제는 데아론도 화를 냈다. 그는 보랏빛 눈으로 연인의 금빛 눈을 노려보며 그녀의 손을 한결 세게 잡았다. 첼루나도 마주 쏘아보았다.

“네가 내 상황이었다면, 지금 네가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똑같이 했을 거잖아.”

나라도 혼자 남아 시간을 끄는 동안, 네가 멀리멀리 도망치기를 바랐을 거야. 네가 무사하기를 바랐을 거야. 설령 그것을 위해 내 목숨을 버려야 할지라도.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네가 내 상황이었으면.”

첼루나는 나직이 절규했다. 그제야 데아론의 눈이 흔들렸다. 아, 그가 그녀와 같듯 그녀도 그와 같았다. 그들은 서로 너무 잘 알았다.

“차라리 같이 죽어, 데아론. 너 혼자 장렬하게 희생하고 나는 평생 죄책감 속에서 괴롭게 살아가게 두느니.”

연인을 위해 자기 자신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으면서도, 막상 자기가 연인의 희생을 딛고 살아남아야 한다면 극렬히 거부하는 모순적인 마음.

그 마음이 두 사람의 완벽한 진심이었다.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을게. 하지만, 너 혼자 죽느니 차라리 같이 죽어.

“아니면 나만 나갈게. 넌 그냥 돌아가, 데안. 저놈들이 원하는 건 나잖아. 나만 죽으면 넌 처벌받을 일 없어.”

“안 돼, 안 된다고!”

데아론이 씩씩댔다.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연인의 뜨거운 품속에서 첼루나는 시야가 급격히 뿌예지는 걸 느꼈다.

이 상황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별수 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루나, 제발, 제발…….”

그가 애원했다. 아아, 이걸 어떻게 이겨. 이토록 절절하게, 이토록 지순하게 네가 비는데.

내가 네 뜻대로 해 주지 않으면 당장 죽어 버릴 것 같은 태도로 내게 매달리는데.

“제발, 살아남아.”

나를 위해 대신 죽겠다고 애걸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서 평생 나를 기억해 줘. 내 희생이 헛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야.”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그때 어떻게 두고 떠났을까.

“부탁해.”

그딴 걸 부탁이랍시고 지껄이는 너를.

눈물과 키스, 그리고 쓰라린 작별 인사. 그걸 끝으로, 첼루나는 돌아섰다.

끊임없이 흐느끼는 탓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첼루나는 용케 말 위에 올랐다.

그녀는 능숙한 기수답게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녀는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오직 혼자서. 그렇게 평생 외로울 예정이었다.

날이 핏빛으로 저물 때까지, 공주는 혼자 달렸다.

* * *

혼자 도망치던 첼루나는 드디어 말을 멈췄다.

“……미쳤어.”

어떻게,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고 혼자 떠났을까.

첼루나는 도중에 마음을 바꿨다. 혼자 사느니 같이 죽는 게 낫다. 설령 그게 데아론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일지라도.

아니, 자신이 지금 돌아가면 데아론이 희생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죄인인 쪽은 자기니까, 자기 혼자 순순히 붙잡히면 그만이다.

첼루나는 말 머리를 돌렸다. 그녀는 검붉게 물든 하늘을 등지고 절박하게 말을 몰았다.

“데아론!”

그런데, 너는 기어코.

데아론은 본인이 치명상을 입은 채로 마지막 추격자를 처단했다. 이어, 첼루나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다.

“데아론!”

“첼루나.”

안 돼. 제발, 안 돼.

“루나……. 여기. 이거. 네가 가져.”

아아, 안 돼. 제발, 제발…….

“너라도,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잘 쓰면,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데.”

너 없이 나 혼자, 어떻게.

“네가 써. 갖고 있든가, 팔아도 되고. 이거 금이니까 돈이 꽤 될 텐데……. 사실, 모르겠다.”

“데안, 제발, 제발……. 어서, 가자. 가서 치료받자. 내가 의사 불러올게. 제발, 응, 어서…….”

“첼루나.”

비극이었다.

“사랑해.”

공주의 연인은 그렇게 숨이 멎었다.

“안 돼.”

첼루나는 혼자 나락에 떨어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잔인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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