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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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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이어진 끝에 문이 열렸다. 첼루나는 찬바람을 느꼈다.

팔을 억누르던 악력이 사라졌고, 누군가 다급히 눈가리개를 벗겼다. 첼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공주님.”

아. 첼루나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미련이, 그녀를 간절한 보랏빛 눈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첼루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간수는 어느새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첼루나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데아론 텔로아, 자신의 연인을 쳐다보았다.

“데안, 네가 여기서 뭐 해?”

“공주님,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말에 오르세요.”

“데안, 정신 차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날 빼돌리려고? 장난해? 나 지금 사형수인 거 몰라?”

“공주님, 잔소리할 때가 아닙니다.”

“잔소리? 잔소리?! 지금 내가 쓸데없이 떠드는 걸로 보여?”

첼루나는 이성을 잃고 씹어 뱉듯 절규하며 데아론의 옷깃을 콱 잡았다. 남자는 여자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이끌렸다. 곧, 그들은 거의 서로 콧등이 스쳤다.

“정신 차려, 데아론 텔로아. 우린 이제 끝이야. 난 내 빌어먹을 오빠가 멍청하게 패하는 바람에 덩달아 죽게 생겼어. 그리고 너는, 너는 이제 공신이잖아.”

첼루나는 블레논 황자의 동복이자 도구. 그리고 데아론은 텔레스 황녀의 인척이자 기사였다.

데아론의 형, 모리안 텔로아는 텔레스 황녀의 남편이자 참모였다. 데아론 본인은 황녀 전속 기사가 되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한 지 오래였다.

그런 그가 주군의 원수인 블레논 황자의 동복동생과 속절없이 사랑에 빠진 건 참으로 비극이었다.

“앞으로 잘 먹고 잘살아. 넌 그럴 일만 남았어. 이제 와서 날 살려 봤자 뭐 어쩌려고? 나더러 평생 숨어 살라는 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루나!”

데아론은 왈칵 성냈다. 그는 공주라는 호칭을 내팽개치고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그녀의 애칭을 짓씹었다.

데아론은 후작의 사생아, 첼루나는 황제의 딸. 표면만 보면 그들 사이에 신분의 간격은 아득했고, 데아론은 감히 고귀한 황녀님의 발끝에도 못 미칠 존재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동등했다. 단지 첼루나의 처지가 황족치고는 너무 초라하여 후작의 아들과 비등비등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연인이었고, 가족이었고,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한쪽은 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천덕꾸러기, 한쪽은 평민의 피가 섞인 사생아.

다른 사람들에게 냉대받고 외면받는 그들은,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온기를 찾았다. 외톨이는 외톨이끼리 구원하고 구원했다.

왜 너는, 하필 텔레스 언니의 신하여야 했을까. 왜 당신은, 블레논 놈의 동복이어야 했을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그딴 말은 하지 마.”

데아론은 사납게 애원했다.

감히 황족에게 반말을 지껄이다니, 세상이 조금만 더 평범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첼루나도, 데아론도 평범한 게 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넌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야 해. 그러니까 어서 말에 타, 어서. 지금 도망쳐야 해.”

데아론은 텔레스를 따르는 가문을 배신할 수 없어서, 이미 한 번 바친 충성의 맹세를 저버릴 수 없어서, 끝까지 황녀를 섬겼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첼루나를 버릴 수도 없었다.

그의 주군과 가문이 승리한 지금, 그는 몰래 황궁 간수를 매수했다. 첼루나를 무사히 빼돌려, 함께 떠나기 위해.

“너…….”

첼루나는 짓눌린 듯 신음했다. 데아론이 종용하는 도주가 단지 그녀만의 일이 아님을 첼루나는 직감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안 돼, 데안, 제발……. 너까지 이렇게 망가질 필요 없어.”

데아론은 이제 승리했다. 그의 주군은 황제가 되었고, 그의 가문은 공신으로 승격됐다.

약속된 영예를 누릴 일만 남은 너는 어찌 내게 돌아왔는가.

풍족한 앞날과 찬란한 보상을 전부 버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보잘것없어진 내게 다시금 손을 내민다.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망가지는 거 아니야.”

데아론은 단숨에 부정했다. 이어, 첼루나를 품에 안고 그녀의 입술을 짧고 짙게 삼켰다. 첼루나는 서글프게 화합했다.

“이래야만 내가 온전해질 수 있어.”

절박한 키스 끝에 데아론이 속삭였다. 첼루나는 그의 제비꽃색 눈을 직시했고, 사로잡혔다.

“그리고 네 곁이라면, 설령 망가져도 괜찮아.”

바보, 바보 데아론. 참 슬프고 소중한 데아론. 첼루나는 잠깐 우는 듯 웃었다. 그녀는 괴롭게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어서 가자.”

첼루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여기서 더 실랑이할 시간은 없었다.

도망치지 않겠다고 계속 버티고 있으면 그만큼 발각될 확률도 늘어날 테고, 그러면 데아론도 덩달아 위험해진다.

첼루나는 여전히 데아론의 결정이 싫었다. 그가 이제 자신을 단념하고 새 황제의 공신으로서 눈부시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정녕 네 뜻이라면. 정녕 오만 가지 역경을 무릅쓰고 나와 끝까지 함께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첼루나는 기꺼이 그가 내민 손을 잡으리라. 나를 위해 죽음이라도 불사할 너를 위해, 나 또한 내 목숨을 바칠 것을 약속하며.

결정을 마친 첼루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데아론이 데리고 온 말에 날렵하게 올라탔다.

데아론도 그녀를 따라 승마했고, 그녀를 뒤에서부터 감싸며 말고삐를 잡았다.

“이랴!”

데아론이 짐승을 재촉했다. 말은 즉시 질주를 시작했다. 첼루나는 채찍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맞서 눈을 꼭 감았다.

초겨울의 쌀쌀한 밤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 * *

포렌타인 제국의 황제는 호색한이었다.

비록 호색한일지언정 군주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어서, 자신의 경박스러운 아랫도리 때문에 후계 구도가 꼬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 건 사실이다.

하여, 실제로 황제는 오랫동안 오직 황후와만 잠자리를 가졌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리 애써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게 첫 번째 비극의 씨앗이었다.

황제는 이제 후계자를 얻겠다는 핑계로 여러 귀족 여인을 정부로 들였다. 그중 하나가 임신했고, 후궁의 일종인 황비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차라리 거기서 멈췄었다면, 적어도 훗날 그리 많은 피가 흐르지는 않았을 것을.

이미 아들까지 얻었으니 더더욱 자중해야 했을 황제는 제 방탕한 습성을 누르지 못하고 기어코 황후를 다시 건드렸다.

굳이 그를 위해 변명하자면, 이미 황후가 불임이라고 ‘판정’되었으니 그녀와 동침해 봤자 우려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 참 쉬웠다.

한데,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황후는 뒤늦게 임신했다. 그리고 딸을 낳았다.

이제 제국은 둘로 갈라졌다.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일까? 먼저 태어난 아들? 둘째로 태어났지만 황후의 자식인 딸?

“당연히 황자께서 황제가 되어야지. 맏이시잖아?”

“그리고 아들이고.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어디 여인이 왕좌에…….”

블레논 황자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그를 미는 귀족들과, 황자의 외가인 황비의 가문과 사이가 밀접한 이들.

“중혼에 축첩이라니, 제국의 신성한 역사에 있을 수 없는 일들이지. 황비의 존재는 애초부터 불경한 일이었어. 당연히 황후 전하의 소생이 황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그럼. 게다가 듣자 하니 황녀께서 어린 나이부터 그렇게 총명하시다고…….”

텔레스 황녀가 정통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미는 신하들과, 황녀의 외가인 황후의 가문과 가까운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은 오랫동안 각양각색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내전까지 불렀다가, 숱한 죽음과 상처와 배신 끝에 텔레스 황녀가 왕위에 오르면서 간신히 종막을 알렸다.

그런데, 과연 그게 정말 종막이었을까.

긴긴 서사가 마침내 막을 내리는 듯한 그때, 누군가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데아론은 밤새도록 말을 몰았다. 그가 연인과 함께 수도 외곽의 한적한 숲에 도착했을 즈음, 하늘에는 이미 묽은 새벽이 번지고 있었다.

“공주님,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습니다.”

다시 존대로 돌아온 사내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첼루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데아론은 먼저 말에서 내려 당연한 동작으로 연인에게 손을 뻗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괜찮으십니까?”

공주가 살짝 휘청대자 데아론은 걱정스레 물었다. 첼루나는 참담한 표정으로 연인의 선한 낯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긴장과 피로가 덕지덕지 눌어붙은 준수한 얼굴, 들꽃을 닮은 보랏빛 눈. 그 청명한 자색에는 오직 상대방을 향한 애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첼루나는 울컥했다. 그녀는 데아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데아론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마주 안았다.

“데아론.”

“네?”

“미안해.”

첼루나는 탁하게 속삭였다. 많은 것에 대한 사죄였다.

그가 공신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계기가 된 것. 그를 역적의 연인으로 전락시킨 것.

애초에 그를 사랑한 것. 그의 사랑을 받은 것.

“사과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자상하게 다독였다. 첼루나는 그 한결같은 상냥함에 목이 메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데아론과 입술을 포갰다. 그는 기쁘게, 역시나 다정하게 받아들였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실래요? 제가 불을 지피겠습니다.”

데아론이 제안했다. 그는 마침 근처에 자리한 작은 동굴을 가리켰다.

“그래도 돼? 계속 이동해야 하는 거 아니야?”

첼루나가 초조하게 물었다. 제 오라비의 잔당으로 처형대에서 얌전히 죽었어야 할 공주가 사라졌으니, 지금쯤 그녀를 찾느라 병사들이 출발했을 텐데.

“이 정도면 충분히 멀리 왔습니다. 그리고 효율적인 도주를 위해서는 중간에 잠깐 쉬어야 합니다. 계속 가기만 했다간 말도, 우리도 지쳐 쓰러질 겁니다.”

논리적인 설득이었다. 첼루나는 연인의 의견에 굴복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말로 너무 피곤해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데아론이야 몸이 탄탄하게 단련된 기사지만, 첼루나는 살면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딱히 뭔가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열악한 감옥에서 보낸 지난 며칠은 그녀의 몸에 큰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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