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14)

그녀는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여자의 눈은 황금색이었고 머리칼은 하늘에 번진 황혼만큼이나 붉었다.

그 황혼이 어스름에 가까워질 때쯤, 여자는 우뚝 말을 멈췄다.

“……미쳤어.”

경악, 후회,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 내내 형체 없이 꿀렁대던 온갖 감정이 이제야 지독한 실체를 갖고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했다. 연인의 간절함에 마음이 약해져 잠시 이성을 잃었던 거다.

데아론을 버리고 떠나다니. 나 혼자 살겠다고 사지에 내몰린 그를 외면하다니.

그가 정녕 제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를 도망치게 했다는 걸 알면서, 그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는 사실을 알면서, 내가, 어떻게.

첼루나는 즉시 말 머리를 돌렸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누군가는 그녀의 행동이 참 어리석다고 정죄할 것이다. 연인이 너를 위해 희생하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그럴수록 더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감정에 휩쓸리지 마. 너까지 죽으면 데아론의 희생이 뭐가 돼. 전부 개죽음이 되는 거잖아? 너라도 살아야지. 너라도 도망쳐야 해.

그래, 참으로 이성적인 논리였다. 냉정하고, 합리적이고, 둘이 죽느니 하나라도 사는 게 낫다는 몹시 수학적인 계산이었다.

지금 첼루나는 고작 그런 것들에 몰두할 틈이 없었다. 데아론이 자기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성이니 냉정이니 뭐니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첼루나가 제때 도착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아마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이 죽느니, 하나라도 살리자. 내가 죽고, 데아론이 살면 돼.

추격자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도망친 공주였다. 데아론의 죄목은 그녀를 도왔다는 거였다.

처벌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여태 새 황제 편에서 기사로 활약한 것과 그의 형이 황제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목숨에 지장은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제라도 데아론이 연인을 저버린다면. 그가 공주의 죽음을 방관한다면, 그럼 괜찮을 텐데.

물론 첼루나가 아는 데아론 텔로아는 절대 그렇게 저열해질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라서, 열일곱 살 그날부터 6년째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런 남자라서, 사형수 공주를 몰래 빼돌려 혼자라도 도망치라고 등 떠밀고서는 자기는 추격자들을 막기 위해 뒤에 남았다.

그런 남자라서. 그토록 미련한 놈이라서.

“데아론!”

그런 놈이라서, 지금 내 눈앞에서 칼에 몸이 꿰뚫린 거야.

너무 늦었다. 간발의 차이로, 너무 늦어 버렸다.

단 1분, 아니, 30초, 그래, 딱 30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지금 데아론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는 기사 앞에 몸을 날려, 그 대신 목숨을 잃고 그의 결백을 호소했을 텐데.

그런데, 첼루나는 너무 늦어 버렸다.

데아론은 다른 모든 추격자를 이미 해치웠다. 이제 딱 한 명만 남았는데, 그 한 명이 그에게 먼저 치명타를 날렸다.

문자 그대로 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극통 속에서도 데아론은 어금니를 악물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는 제 가슴에 박힌 칼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손바닥이 베이며 피가 흘렀지만, 이미 흉부에 거대한 구멍이 난 마당에 그딴 상처야 생채기에 불과했다.

데아론이 칼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자 무기를 움켜쥔 기사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찰나만으로 충분했다.

데아론은 반대쪽 손으로 칼을 들어, 상대방의 목을 그어 버렸다.

마지막 추격자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데아론도 허물어졌다.

“데아론!”

첼루나는 비명을 지르며 다가갔다. 그녀가 연인 옆에 꿇어앉았다.

그녀의 손에, 옷에, 얼굴에 피가 묻었다. 머리칼이 불꽃처럼 붉은 그녀는 이제 다른 곳도 온통 붉었다.

“첼루나.”

데아론은 의아하게 속삭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진즉에 멀리 도망쳤어야지. 그러나, 추궁할 힘도 더는 남지 않았다.

“루나……. 여기. 이거. 네가 가져.”

이제는 정말 최소한의 말만, 정말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했다.

데아론은 자기 옷깃 아래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금색 줄에 달린 투명한 보석을 꺼냈다.

“너라도,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 그가 애지중지하는 목걸이였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평민 엄마.

남들은 내가 천한 피가 섞인 저속한 사생아라고 내내 비웃었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 아들로 태어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

“잘 쓰면,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데.”

데아론은 힘없이 웃었다. 이 목걸이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나, 뭐라나. 그의 모친이 생전에 지나가는 말처럼 해 준 얘기였다.

동화 같은 농담이지, 뭐. 오래 잊고 있던 얘기였다.

“네가 써. 갖고 있든가, 팔아도 되고. 이거 금이니까 돈이 꽤 될 텐데……. 사실, 모르겠다.”

“데안, 제발, 제발……. 어서, 가자. 가서 치료받자. 내가 의사 불러올게. 제발, 응, 어서…….”

첼루나는 황망하게 떠들었다. 자신이 연달아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데아론이 제게 유품을 넘겨주며 횡설수설 속닥이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첼루나.”

데아론이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죽을힘을 쥐어짜는 느낌으로, 정말 죽어 가며. 이제는 가장 중요한 말을 해야 할 때였다.

“사랑해.”

가장 중요한 고백, 약속, 유언.

데아론의 손이 마지막으로 첼루나의 뺨에 닿았다. 첼루나는 그 손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직후, 손이 떨어졌다.

“안 돼.”

첼루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온 세상이 끝난 듯했다. 그녀에게 이 순간은 종말이었다. 종말, 최후, 지옥. 그녀는 이미 나락 속에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어둡고 차가운 나락 속, 그녀는 혼자였다.

빛도 온기도 사랑도 없이, 다만 혼자였다.

* * *

첼루나 포렌타인은 곧 죽을 운명이었다. 억울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딱히 원망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첼루나는 죽을죄를 지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녀의 죄목은 실질적인 잘못보다 타고난 불운에 가까웠다.

동복 오빠와 이복 언니의 치열한 황위 쟁탈전 끝에 패배한 쪽은 오라비였다.

힘없는 막내 황녀 첼루나는 한 번도 싸움에 적극 나선 적 없었으나, 폐황자 블레논과 같은 태에서 났다는 이유만으로 역도의 일원이 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다.

춥고 어둡고 절망적인 공간에서 첼루나는 음울하게 생각했다. 아, 나는 드디어 죽는구나.

인간인 이상 살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총애하던 황비가 그녀를 낳자마자 죽었다는 이유로 막내딸을 증오하며 한평생 괴롭혔던 황제 놈. 그녀를 장기짝 취급했던 비열한 오빠와 냉혹한 외조부. 수군대는 귀족들. 비웃는 시종들.

그 모든 지긋지긋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죽음도 나름 달콤한 안식 아닐까, 첼루나는 씁쓸하게 곱씹었다. 차라리 그렇게 여기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 그녀에게 단 하나, 딱 하나 남은 이승의 유일한 미련은.

“나오시오.”

차가운 목소리가 쇠창살 너머로 울렸다. 첼루나는 쌀쌀한 눈으로 간수로 노려보았다. 끼기긱, 음산하고 묵직한 마찰음에 이어 철문이 열렸다. 첼루나는 이를 악물었다.

“나오시오, 공주.”

공주. 공주님. 평생 첼루나를 따라다닌 호칭이었다.

군주의 딸을 공주라 칭하는 건 과거 이 나라가 제국이 아닌 왕국일 때의 관습이었다. 즉, ‘황녀’보다 한 단계 낮춰 부르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첼루나가 받은 취급이 이러했다.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계집. 사랑받지 못한 딸. 모두의 조롱거리.

비록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여태 23년간 살면서 그녀는 손톱만큼의 권위나 권력도 갖지 못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될 리 없는 황족 모독이 첼루나를 대상으로는 빈번히 일어났다. 그녀의 지시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보란 듯이 히죽대는 아랫사람은 오랜 일상이었다.

이제는 그런 비참한 일상도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비참한 죽음뿐. 그토록 무력한 황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쟁의 패배자와 같은 어미를 뒀으니 그녀는 제거돼야 마땅했다.

그녀를 부른 간수가 첼루나의 팔을 세게 움켜잡았다. 첼루나는 눈살을 사납게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뿌리쳤으나, 며칠 못 먹고 못 자서 허약해진 그녀는 장정의 악력을 떨쳐 내지 못했다.

첼루나는 결국 헝겊 인형처럼 끌려 나갔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 이 또한 지겹도록 익숙한 일이었다.

첼루나는 절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의 위계는 단지 성질머리가 좀 더럽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태 첼루나는 자기 오라비를 위해 그 어떤 사소한 것도 해 주기 싫었으나, 만약 그가 무언가를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하기 싫은 일을 참 많이 했다. 주로 텔레스 황녀를 방해하는 일이었다.

블레논과 텔레스는 적대 관계였으니, 첼루나는 오라비 편에서 이복 언니를 미워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처지였다.

개인적으로, 첼루나는 황후의 딸인 텔레스 언니에게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그 지겨움의 끝이 보였다.

“눈을 감으시오.”

첼루나를 복도로 끌어낸 간수가 중얼거렸다. 두툼한 어둠이 눈앞을 짓눌렀다. 첼루나는 천으로 눈이 가려졌다.

본능적인 공포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첼루나는 입술을 꾹 깨물어 참았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이 너덜너덜한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간수는 눈이 가려진 첼루나를 붙들고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걸었다. 첼루나는 점점 혼란을 느꼈고, 혼란은 두려움을 불렀다.

날 어디로, 왜 끌고 가는 거지? 그녀는 어차피 처형될 예정이었다. 고작 힘없는 황녀 하나를 굳이 번거롭게 멀리멀리 끌고 가 처리할 이유가 있나?

첼루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아마도, 바로 그녀가 고작 힘없는 황녀이기 때문에 끌고 가는 걸지도 몰랐다. 그냥 죽이는 걸로도 모자라, 그전에 욕보이려고.

제대로 황녀라고 불리지도 않는 천덕꾸러기 막내는 저를 향한 여러 황족 모독 중 음담패설도 심심찮게 견뎌 보았다.

저 반반하고 도도한 황녀를 어떤 식으로 자빠트리는 게 가장 즐거울지 저들끼리 떠들며 낄낄대는 기사들, 시종들.

보통은 주군의 서슬 퍼런 시선이 무서워 감히 생각지도 못할 말들이었다. 누군가 그 말을 엿들었다면, 그날부로 그들은 곧장 목이 잘려야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지 않았다. 저열한 조롱은 전부 첼루나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문제였고, 그녀의 편에서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명은, 있어.’

아니, 사실 딱 한 명 있었다.

첼루나의 구질구질한 삶에 남은 단 하나의 미련.

만약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첼루나는 자신이 이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보란 듯이 죽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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