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그 여자의 특별한 날들 (5)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희정은 말이 없었다.
운전을 하던 도경은 흘끗 희정을 돌아봤다.
희정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희정아.”
“어?”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는 희정이 귀여웠다.
“아냐, 그냥.”
“아, 응.”
희정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인가 희정이 귀여웠다.
희정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할 말을 따박따박 하다가도, 도경만 나타나면 수줍은 듯 말이 없어졌다.
희정은 도경의 옆에 물병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물병 좀 달라고 부탁하고, 도경이 직접 물병을 건네주면 당황하며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 생각이 들어 가끔씩 우쭐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팬들에게 사랑을 받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좋아한다 말도 못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희정의 행동을 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귀엽다는 생각이 쌓이고 쌓여 다른 감정으로 변해가는 것 또한, 도경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건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게?’
그저 귀엽다는 감정이 서서히 애정으로 변해갈 줄은 몰랐다.
하루도, 은서도, 미영도 가끔 귀여워 보일 때가 있으니까, 딱 거기까지인 감정일 줄 알았다.
“희정아.”
“응?”
“커피나 한잔하고 들어갈래?”
“어? 응, 좋아.”
희정이 반색을 하며 대답하는 모습에, 가슴이 찌릿, 아파왔다.
저 마음에 보답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갔다.
커피 두 잔에 케이크 한 조각을 시키고, 동그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희정은 컵을 만지작거릴 뿐 말이 없었다.
도경도 묵묵히 희정을 지켜봤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언젠가부터 도경은 희정과 자신의 관계를 ‘우리’로 묶게 되었다.
“오늘 파티에서.”
커피숍에 들어오고 한참 지나서야, 희정이 침묵을 깼다.
희정은 오늘 파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오늘에야 깨달았어. 내가 속하고 싶었던 곳은, 생각보다 지저분하다는 걸. 아니, 이미 깨닫고 있었는데 못 본 척했어. 나도 그들과 다를 게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그 사람들의 시선에도 담담하게 대응하는 하루가 참 멋있더라. 거기는 진창인데, 하루한테는 하나도 튀지 않더라.”
“맞아. 하루한테는 튀지 않지.”
“나는 그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어. 내가 있고 싶은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니야.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해? 사는 게 편하면 뭐해? 다들 남보다 더 가진 게 많아지고 싶어서, 자랑하고 싶은 게 많아지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데.”
희정이 고개를 들었다.
희정은 처음으로 도경과 눈을 맞췄다.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안에서, 까만 눈동자가 곧게 빛났다.
“우리 사귀자, 도경아. 나, 모든 걸 버릴 준비가 됐어. 나, 그 세계에 있지 않아도 돼.”
“…….”
“돈 한 푼 없어서 굶어도 괜찮아. 집이 없어서 노숙을 해야 해도 괜찮아. 나는 그럴 준비가 됐어. 너만 있으면. 너만 있으면 난 괜찮아. 네가 없는 게 더 싫어.”
절박하게 말하는 희정을 응시하다가, 도경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아아, 정말이지.
이 여자는 귀엽다.
너무 귀엽다.
“희정아. 나, 그렇게까지 돈을 못 버는 건 아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도경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컵을 꽉 쥐고 있는 희정의 손 위에 겹쳐졌다.
희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도경을 바라봤다.
도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에 대한 감정이, 너의 감정과 같은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런데 요새 네가 너무 귀여워서, 가끔은 보고 싶고, 가끔은 궁금하고, 그래.”
희정이 숨을 삼켰다.
그런 희정을 응시하며, 도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희정아. 우리 사귀자. 내가 너한테 뭘 해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굶기지는 않을게.”
+++
집에 들어가자, 우현이 연두보다 빨리 달려와 하루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남들이 보면 백만 년 만에 재회한 줄 알겠다.
하루는 그래, 그래, 하는 기분으로 우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연락하지 그랬어? 데리러 갔을 텐데.”
“어머니가 데려다주셨어요.”
“집 앞까지? 들어왔다가 가시라고 하지.”
“그랬는데 신혼부부 집에 함부로 들어가는 거 아니라고 그냥 가셨어요.”
“그래. 오늘 별일 없었고?”
하루를 내려다보는 우현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하루는 웃으며 우현의 볼을 쓰다듬었다.
“오빠. 나 애기 아니에요.”
“애기 같아.”
“어이구. 난 오빠가 더 애기 같은데. 몇 시간 못 봤다고 이렇게 징징거리실까.”
“징징이라니. 그런 말 처음 들어.”
“그래요? 그럼 자주 해줄게요.”
하루는 우현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은 뭐 먹었어요?”
“간단하게 피자 시켜 먹었어.”
“피자가 간단한 거예요? 남은 거 있어요?”
“응. 냉동실에 넣어뒀는데, 먹게?”
“네. 좀 먹어야겠어요.”
하루가 냉장고로 가려고 하자 우현이 하루를 의자에 앉혔다.
“앉아 있어. 내가 할게.”
하루는 즐거운 마음으로 피자를 준비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아직도 이렇게 당연한 듯 그와 한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게 꿈만 같았다.
우현이 따뜻하게 데워온 피자를, 하루는 맛있게 먹었다.
하루가 열심히 먹는 걸 지켜보던 우현이 물었다.
“거기서 뭐 못 먹었어?”
“아니요. 많이 먹었어요. 맛있는 거, 진짜 많더라고요. 그냥 케이크나 쿠키 정도만 있을 줄 알았는데, 거의 뷔페던데요?”
“그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진짜 많이 먹었는데. 왜 또 배가 고프지?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왜 안 돼?”
“살찌잖아요.”
“그게 왜?”
“결혼했다고 살찌고 그러면 남자들이 싫어한대요.”
“난 안 싫은데. 통통한 이하루도 진짜 귀엽겠다.”
“그래놓고 막상 내가 막 100키로 되고 그러면 싫어할 거면서.”
“왜 싫어해? 풍선 같고 귀여울 것 같은데.”
하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봐봐. 벌써 풍선 같다고 놀리잖아.”
“그럼 눈사람 같다고 해줄까?”
“네, 그게 낫겠네요. 눈사람은 적어도 사람이 붙으니까.”
우현은 커다란 피자 2조각을 먹고 남겨놨는데, 하루는 남은 피자 중 4조각을 더 먹고서야 멈췄다.
“배부르니까 졸리다.”
“그럼 자자.”
“씻어야 해요.”
“씻겨줄게.”
하루가 말릴 새도 없이, 우현이 하루의 옆에 서더니 하루를 번쩍 안아들었다.
“끄응차!”
하는 소리와 함께.
“어후, 이것 봐. 벌써 무겁다고 놀리고.”
우현이 웃었다.
“운동도 되고 좋네. 아령이 따로 필요 없겠어.”
“그래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욕실에 들어간 우현은, 하루가 화장을 지우는 동안 욕조에 물을 받았다.
거품이 보글보글 쌓인 욕조에 함께 들어가 앉았다.
따뜻한 물이 전신을 휘감자, 근육이 이완되며 온몸이 노곤해졌다.
우현의 앞에 앉은 하루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오빠.”
“응?”
“나, 자야겠어. 너무 졸려.”
“그래, 자. 내가 잘 닦아서 침대에 올려놔줄게.”
“응.”
배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하루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오늘은 웬일인지, 희정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고급 한정식을 파는 식당에, 미영과 은서, 하루가 모였다.
“야, 이런 식당 비싸지 않아?”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한 미영이 룸에 들어오며 물었다.
“오늘은 내가 살 거야.”
희정이 말했다.
“네가? 왜?”
“좋은 일이 있거든.”
“뭔데?”
“일단 앉아. 음식 시키고 말할게.”
희정이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고, 곧 요리가 나와 식탁 위에 한 가득 차려졌다.
하루는 젓가락을 들고 자기 앞에 놓인 떡갈비를 열심히 먹었다.
“조희정, 좋은 소식이 뭔데? 드디어 대학원 졸업이야?”
은서가 물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일.”
“뜸 좀 그만 들여라. 뭔데 그래?”
“그게…… 나, 도경이랑 사귀게 됐어.”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꺄악!”
“진짜?”
“대박! 정말? 언제? 어떻게?”
난리가 났다.
뒤늦게 이곳이 조용한 한정식 집이라는 걸 깨닫고, 다들 숨을 죽였다.
희정이 민망한 듯 눈을 굴리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주일 됐어.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그동안 말 안 했어.”
“와, 정말? 진짜로 그 윤도경이랑 사귀는 거야? 내가 아는 그 윤도경 맞지?”
미영은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응, 맞아. 그 윤도경.”
“헐. 웬일이래?”
“진심이 통한 거지.”
“진짜 축하해. 그렇게 좋아하더니, 잘됐다, 야.”
한차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시간이 지나가고, 희정은 어떻게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었는지 낱낱이 털어놨다.
하루는 희정의 환한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다행이다. 둘이 사귀게 되어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기분 좋은 지금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은서와 미영도 마찬가지인지, 그런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께도 도경이랑 데이트 했거든. 백화점에 갔다가 어떤 애랑 부딪쳤는데, 걔 챙겨주는 도경이 보니까 좋은 아빠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뭐야,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도경이랑 날 닮은 아이면 진짜 예쁠 것 같지 않아?”
“글쎄다. 본인 입으로 예쁘다는 사람한테 예쁘다는 말을 해주고 싶지는 않고.”
“그러고 보니, 하루 넌?”
희정이 하루를 돌아봤다.
잡채를 먹던 하루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응. 너네는 결혼한 지 벌써 1년이잖아. 아이 계획은 없어?”
“움. 우리는 좀 늦게 가지려고. 우현 오빠가 신혼을 길게 즐기고 싶대.”
“하긴, 그 팔불출이면 그럴 만도 하겠다.”
“게다가…… 좀 무섭기도 하고.”
“아이 낳는 거?”
“낳는 것도 낳는 건데……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루의 말에 은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당연하지. 엄청 좋은 엄마가 될걸.”
“하지만…… 나는 엄마한테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서, 엄마의 사랑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를 것 같아.”
우현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고민을 친구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루는 그게 두려웠다.
엄마의 사랑을 모르기에, 내 자식에게 엄마의 사랑을 베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
“엄마가 되는 건, 누구나 두려워하는 일이야. 사랑을 받고 자랐더라도 마찬가지일걸. 처음 경험하는 일일 테니까.”
“미영이 말이 맞아. 사랑을 받고 자랐어도, 내가 과연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줬듯이 애한테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거야.”
하루가 고개를 들어 은서와 미영을 응시했다.
“너희도 그런 생각해?”
“당연하지.”
“희정이, 너도?”
“당연한 거 아냐? 아이 낳으면 진짜 예쁠 것 같긴 해도, 무섭긴 무섭지. 애를 잘 키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들 그렇구나.”
“하루, 네가 애 낳으면 우리가 진짜 많이 사랑해줄 거거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 애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 받는 애가 될 거야.”
“맞아, 맞아.”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임신’이 되어서, 그들은 임신이 여자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연분만을 할 때 얼마나 아플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가게 밖으로 나가니, 언제 온 건지 도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넌 여기 어쩐 일이야?”
미영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희정이 데리러 왔지.”
희정이 도경에게 다가가자, 도경이 희정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미영과 은서가 경악했다.
“웬일, 웬일. 윤도경 저러는 거, 진짜 징그럽다.”
“으아, 소름.”
몸을 문지르며 바르르 떠는 친구들의 모습에, 도경이 씩 웃었다.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도경은 희정의 정수리에 쪽 입을 맞췄다.
“어우, 소름.”
“야, 얼른 가라. 못 볼 꼴 계속 보여주지 말고.”
친구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희정과 도경은 즐거워 보였다.
돌아서는 두 사람의 뒤로,
“저것 봐라. 사귄다고 아주 바로 돌변해서 꽁냥대는 거.”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못 살겠네.”
“미영아, 너도 얼른 남자를 만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정은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요새 정말 행복하다.
도경과 사귀기로 하고, 조금은 어색할 줄 알았다.
한동안은 스킨십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귀게 되자, 도경은 다정하고 편안한 애인이 되었다.
손을 잡는 것도,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도, 헤어지기 전 볼에 살짝 뽀뽀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사귄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새삼스레 깨달을 정도였다.
희정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도경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희정이 돌아보자, 도경이 말했다.
“가족들 마주칠 수도 있잖아.”
“상관없어, 난.”
희정이 다시 도경의 손을 잡았다.
전에는 그럴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너랑 같이 갈 각오를 다졌어.”
“벌써부터 풍파를 일으킬 거 없어. 가족들 사이에서 힘들지도 몰라.”
“아니, 안 힘들어.”
희정이 도경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네가 나랑 같이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날 힘들게 하지 못해. 그러니까 내 손 놓지 마. 그 누구 앞에서도, 내 손 놓지 말아줘. 나도 안 놓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