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그 여자의 특별한 날들 (2)
우현은 흘끗 조수석을 돌아봤다.
“뭔데?”
“나랑 사귈 때 말이야. 오빠도 지금 나 같은 마음이었어?”
“지금 네 마음이 어떤데?”
“나랑 사귀는 남자들이 내 손 끝을 건드리는 것도 싫어.”
“응,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구나.”
희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성욕도 없나, 싶었거든. 이제야 오빠가 그랬던 게 이해가 돼.”
“너, 아직도 도경이 좋아해?”
“그러는 오빠는? 하루랑 어릴 때 알다가 헤어진 후에, 몇 년을 하루만 좋아했잖아.”
“그거야 하루가 예쁘니까.”
“도경이도 예쁘거든?”
우현은 도경의 근육질 몸을 떠올렸다.
“흐음. 예쁜가?”
“예쁘지, 그럼. 그 튼실한 목덜미랑 어깨가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 게다가 도경이는 웃을 때가 진짜 매력 터져. 씩 웃으며 하얀 이가 쪼로록 보이는데, 그게 얼마나 예쁜데.”
“……그렇군.”
“거기다가 손도 얼마나 크다고. 저번에 과자 짚다가 내 손이랑 부딪쳤는데, 내 손을 다 덮고도 남더라. 그리고 또 엉덩이도…… 청바지 입으면 뒤태가 진짜 죽여준다고.”
“……그 뒤태를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둬. 남자는 엉덩이야. 하루랑 오래 가려면 엉덩이를 만들어.”
“나는 이미 하루랑 결혼했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나 참, 이렇다니까. 오빠. 결혼했다고 안심하면 안 돼. 하루, 예쁘잖아. 귀엽고. 성격도 좋고. 거기다 동안이야. 지금이야 하루가 오빠한테 푹 빠졌지만…… 하루가 한 40살쯤 됐을 때, 엄청 잘생긴 신입사원이 하루한테 들이대면 어쩔래?”
“어쩌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야지.”
“……말이 안 통하네.”
“말이 안 통하는 건 너야. 나랑 하루 사이는 문제없으니까 네 걱정이나 해.”
“잔소리는. 어휴, 매력 없다.”
“그 매력 없다는 소리도 좀 그만하고.”
“아니, 매력이 없는데 어떡해? 하루는 왜 이런 남자를 좋아하나 몰라.”
희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현은 그런 희정이 밉지 않았다.
최근 희정이 하는 고민을, 하루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희정이, 이런 사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도경이랑 친구로 지내게 된 게 문제일까?”
희정이 중얼거렸다.
“만약 도경이랑 친구가 되지 않고, 두 번 다시 얼굴을 못 보는 사이가 됐다면, 이 마음이 먼지처럼 흩어졌을까?”
“글쎄.”
못 만나기에 더 깊어지는 사랑도 있다는 걸, 우현은 말하지 않았다.
희정은 도경과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만약 도경이 희정에게 마음이 생겨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도경이 겪어야 할 수난이 많을 것이다.
희정의 가족들은 절대 도경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누가 그러는데,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너무 가벼워서 부질없는 거래. 나는 도경이한테 첫눈에 반한 거잖아. 그러니까 쉽게 흩어지겠지?”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우현의 질문에 희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소리를 한 남자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희정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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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한없이 가볍고 위태롭다.
마치 모래사장에 만들어놓은 모래성처럼.
파도 한 번에 쓰러지고, 파도 두 번에 사라진다.
그토록 부질없는 감정이다.
이것은 그런 사랑에 대한 가볍고도 조용한 이야기이다.]
재현은 자기가 쓴 소설의 첫 문장을 노려봤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그래야만 했다.
외모만 보고 좋아하게 된 거니까.
상대의 모든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내 멋대로 상상한 이미지를 사랑하게 된 것뿐이니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란 가볍고 위태로워야만 했다.
그리하여 상대가 다른 이의 것이 되었을 때, 순식간에 식어 없어져야 마땅했다.
‘그래야 하는데.’
재현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가슴에 담긴 아픔도 쏟아내려는 듯,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한숨을 쉬어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치겠네.’
첫눈에 반한 사랑.
짝사랑.
그게 얼마나 가벼운 감정인지를 주제로 쓴 소설인데, 완전히 망했다.
가볍게 시작한 소설은 뒤로 갈수록 진해지고 깊어졌다.
그리하여 결말은 ‘첫눈에 반한 사랑도, 뜨거울 수 있다.’로 끝을 맺었다.
이런 걸 쓰려는 게 아니었다.
‘이건 도저히 책으로 못 내겠네. 누가 봐도 내가 하루를 짝사랑한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적어도 희정과 하루는 눈치챌 것이다.
어쩌면 낙성도.
‘희정이야 책을 안 읽으니 다행이지만, 하루는 내 소설을 다 읽는다고 했으니까…… 안 되지, 안 돼.’
몇 개월에 걸쳐 쓴 소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현은 허리를 굽히고 책상에 이마를 댔다.
하루와 우현이 결혼을 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하루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도 봤고, 맹세의 키스를 나누는 모습도 봤다.
명절에 한복을 입고 찾아와 부모님의 며느리 노릇 하는 것도 봤고, 우현과 꽁냥꽁냥하는 모습도 봤다.
이제 하루는 형수님이고 가족인데, 더는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됐는데.
“아, 진짜 쉽지 않네.”
+++
은서에게 애인이 생기자, 미영은 틈만 나면 도경을 불러댔다.
“하루는 이제 유부녀인데, 막 부를 수는 없잖아.”
닭갈비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미영이 말했다.
“우현이 형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쓸걸. 아니면 둘 다 부르든가.”
“어휴, 됐어. 우현이 오빠는 너무 잘생겨서 시선을 끈단 말이야. 술 정도는 편하게 마시고 진상 부리고 싶어.”
“오늘도 진상을 부릴 셈이구나.”
도경이 긴장했다.
그런 도경을 빤히 응시하다가 미영이 물었다.
“너, 희정이 또 헤어진 거 알아?”
“어? 아, 그래?”
“어제 하루가 대신 이별하고 왔다더라.”
“아아. 그렇군.”
도경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희정이 왜 그렇게 쉽게 남자를 사귀고 헤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도경은 할 말이 없었다.
“희정이 걔, 처음에는 진짜 못된 기집애라고 생각했는데. 요새 보면 그렇지도 않더라. 의외로 남들 잘 챙기고, 순진한 면도 있고. 귀엽던데?”
“응, 귀엽지.”
그 말에는 동감이었다.
도경은 자신의 앞에서 쩔쩔매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하는 희정이 귀여웠다.
“네 마음은 어때? 아직도 희정이가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지, 그럼.”
“정말? 걔가 다른 남자랑 사귄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지, 그럼.”
대답을 조금 늦게 하고 말았다.
사실 최근에는 희정이 누군가와 사귄다는 소리를 들으면,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곤 했다.
“아무렇구나.”
미영은 예리했다.
“너, 희정이 신경 쓰이지?”
“친구니까 신경은 쓰이지.”
“친구, 그것 좀 빼. 그거 빼놓고 탁 까놓고…….”
“미영아.”
도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만해, 그런 얘기. 어차피 나랑 희정이는 안 돼.”
“안 되긴, 왜 안 돼? 사람이랑 사람이 사랑하는 건데, 안 될 게 뭐가 있어?”
도경은 미간을 좁히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래, 네 말대로 요새 희정이가 귀여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걔랑 있었던 일이 떠올라.”
“……무슨 일?”
“예전에 희정이를 집 앞까지 데려다줄 때, 걔네 오빠랑 마주친 적이 있어. 희정이가 굉장히 당황해하더라. 희정이네 오빠도 날 곱지 않게 훑어봤고.”
“아아.”
“그래서 난 내 마음에 제동을 걸어. 걔랑 나는 그런 관계야.”
“하지만…….”
“그래, 나는 걔보다 못할 게 없어. 나는 내 일도 성실히 하고 성격도 끝내주지.”
“지 입으로 그런 소리 하니까 재수 없네.”
미영의 말에 도경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희정이 가족들 눈에, 나는 괜찮은 녀석이 아니야. 별 볼 일 없는 집안에, 별 볼 일 없는 직업을 가진, 근육만 많은 놈. 그렇게 보이겠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집안이 문제야? 둘만 서로 사랑하면 문제없는 거 아냐?”
“하루네 홀로서기에 들어온 이별 중에, 집안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굉장히 많더라. 집안은 무시할 수 없어, 미영아. 우리 나이에는 특히 그렇지.”
미영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도경의 말대로였다.
“우리가 10대나 20대 초반이었다면 좀 달랐겠지?”
“응. 10대에야 집안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고, 20대 초반에는 젊은 치기에 우리 서로 사랑할래, 하고 외칠 수 있었겠지. 하지만 30대인 지금은 아냐. 집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도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희정이처럼 오랫동안 나를 좋아해주는 여자는 처음이야. 보통 거절하면 금방 돌아서잖아. 그런데 그렇게 꾸준히 좋아해주니까. 나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니까.”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을 받아본 게 처음이라서.
“나도 가끔은 상상해. 희정이랑 사귀는걸.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걔랑 사귀게 되었을 때, 그 집 가족들이 나한테 모질게 굴고 못된 소리를 하는 건 괜찮아. 그래, 네 말대로 우리 둘만 사랑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 말들이 내 가족에게도 향하게 되겠지.”
“가족 건드리는 건 못 참지.”
“응. 그러니까 안 돼. 그래서 나는 희정이 바로 앞에서 내 마음을 멈추고 있어.”
“하루랑 우현이 오빠 같은 경우는 없는 걸까?”
“없지, 그럼. 그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인연이 닿았던 거잖아. 강 회장님 댁이 특이하기도 하고.”
“그거야 그렇지만…….”
“가는 마음을 멈추는 건 참 힘들어.”
도경이 미영과 눈을 맞췄다.
도경의 눈동자에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미영아. 이 얘기는 하지 말자. 내 마음이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춰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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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우현이 주말까지 출근해야 할 정도로 바빠졌다.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느라 식품생산본부에 일이 많아진 것이다.
유독 날씨 좋은 주말이었다.
연두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온 하루는 혼자 집에 있는 게 심심했다.
뭘 할까 하다가 김 여사에게 연락을 했더니, 아직 점심 전이니 함께 점심을 먹자는 답이 왔다.
“연두야. 우리 할머니 댁 갈까?”
연두가 웡, 하고 꼬리를 붕붕 움직였다.
연두는 ‘갈까?’라든가, ‘줄까?’처럼 의문문으로 끝나는 문장이 나오면 기뻐했다.
하루는 택시를 탈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럴 때 연습해야지.”
운전면허를 딴 지 반년이 지났다.
우현이 함께일 때만 운전을 했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좀 생겨서 혼자서도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현이 연습용으로 타라고 사준 차에 연두를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할 수 있어!”
혼자서 운전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멋지게 지하주차장을 나왔지만 도로로 나오니 긴장이 됐다.
두근두근 심장을 졸이며 운전을 했다.
다행이 빵빵거리는 차량은 없었는데, 아마 이 차가 굉장히 비싼 차라서 그럴 것이다.
중고차면 된다는 하루에게 우현은,
“그런 차 몰면 무시 받아. 도로는 전쟁터야. 탱크를 몰아야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지.”
라고 말했다.
“우현이 오빠 말이 맞아. 나, 예전에 소형차 사서 초보운전 딱지까지 붙였더니 얼마나 난리들인지, 트라우마 생길 정도였어. 게다가 운전자가 여자면 더 무시당하더라고.”
미영까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값비싼 차를 사는 데 반대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강 회장의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하루는 차를 세우고 연두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김 여사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하루를 안아주었다.
“아이고, 우리 딸. 볼 때마다 예쁘네.”
김 여사는 하루를 우리 딸이라고 했고, 하루는 그 말을 듣는 게 좋았다.
이렇게 김 여사가 안아줄 때마다 김 여사가 진짜 엄마처럼 느껴졌다.
하루의 진짜 엄마는 이런 식으로 하루를 안아준 적이 없었지만.
“연두도 같이 왔네.”
김 여사가 연두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랑 아버지는 안 계세요?”
“응. 할아버지는 모임이 있어서 나가시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회사에 계셔.”
“아, 아버지도 바쁘시구나.”
하루가 할아버님, 아버님, 했더니 너무 친하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서, 이제는 할아버지, 아버지로 불렀다.
하루는 이 가족이 몹시 따뜻했다.
식당에 들어가니 갈비찜과 잡채, 여러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문득 김 여사가 말했다.
“아, 하루야. 혹시 다음 주말에 시간 되니?”
“다음 주말이요? 네, 괜찮아요.”
“그날, 여자들끼리 작은 티 파티를 하는데. 같이 갈래? 다들 내 며느리를 궁금해하거든.”
“여자들끼리요? 네, 좋아요.”
크리스마스 파티나 신년 파티는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여자들끼리 하는 파티는 가본 적이 없었다.
김 여사와 놀다가 집에 돌아온 하루는, 퇴근하고 온 우현에게 파티에 가게 됐다고 알렸다.
우현의 반응은 뜻뜨미지근했다.
“그런 데는 굳이 안 가도 되는데.”
“어머니께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가야죠.”
“아니, 거절해도 돼. 그런 걸로 뭐라고 하실 분도 아니고.”
“왜요? 오빠, 내가 그런 데 가는 게 싫어요? 내가 귀족들의 생활 예절을 잘 몰라서?”
우현이 작게 웃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야 자랑스럽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주고 싶고. 어머니도 그런 마음이시겠지만…….”
“그럼 됐네요, 뭘. 아, 오빠. 배고프죠? 우리 저녁 먹자. 아니면, 나 먼저?”
물론 하루 먼저다.
우현은 씁쓸한 기분을 접어두고 하루를 번쩍 안아들었다.
‘하루 먼저’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니까, 마음에 걸리는 일은 ‘하루 먼저’를 끝내고 해결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