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11화 (111/119)

#(111) 행복하게 걷는 길

하루의 친구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이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께,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한테요?”

“왜요?”

은서와 미영이 물었다.

“여러분이 하루 가족이니까요.”

우현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프러포즈를 하기 전에, 가족들에게 결혼 허락을 받아야 하죠. 생각해보니, 하루의 가족은 여러분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은서의 눈가가 빨개졌다.

미영은 두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항상 하루의 곁에서 하루를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가 이렇게 예쁘게 잘 자라도록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이어받아, 하루의 남은 시간을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고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아껴주겠습니다.”

우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결혼, 허락 주세요.”

“흡…….”

은서가 흐느낌을 삼켰다.

미영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낙성은 눈을 깜빡거렸고, 도경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허락할게요.”

미영이 말했다.

“허락, 당연히 할게요. 아니다, 아니다. 허락, 아주아주 어렵게 하는 거예요. 알겠죠? 우리 하루, 아무한테나 막 허락하고 그렇지 않거든요.”

미영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낙성과 도경, 은서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이제 우리 하루, 있는 힘껏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게, 그냥 편하게 늘어져 있어도 행복하게…… 그렇게 해주세요. 우리 하루가 그렇게 온힘을 다해서 웃으려고 하지 않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웃음이 나오게, 그렇게 해주세요.”

우현이 미소 지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냥 숨만 쉬어도, 그냥 눈만 감아도, 저절로 행복하게 해줄게요.”

+++

“우와, 나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하루는 근사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우현이 오늘은 연두의 생일이니 기분 좀 내자고 했기 때문이다.

미영과 은서의 코디를 받아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하루는, 우현과 함께 어느 빌딩의 꼭대기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을 함께 찾은 터였다.

“그런데 정작 생일인 연두도 없이, 우리만 이렇게 기분 내도 되는 거예요? 강아지들 들어갈 수 있는 식당도 있던데, 그런 데서 같이 저녁 먹지.”

“그럴 걸 그랬나?”

우현이 무심히 대답하며 하루가 앉도록 의자를 빼주었다.

“꼭 내 생일인 것 같네. 우리 이따 들어갈 때 연두한테 되게 맛있는 거 사다줘요.”

“응, 그러자.”

우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반짝이는 조명에 비치는 우현이 유독 잘생겨 보였다.

“내 남자는 진짜 잘생겼다.”

“내 여자도 진짜 예뻐.”

“그런데 오빠, 오빠는 정말 잘생겼어요. 이마부터 턱 끝까지 모자란 구석도, 과한 구석도 없어. 완벽해.”

“그래?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너도 진짜 완벽하거든.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안 예쁜 곳이 하나도 없어. 이래도 되나 싶어.”

“좀 그렇죠? 이래도 되나?”

“고민이야. 이렇게까지 예쁘면 안 될 텐데 이걸 어쩌나 싶어서.”

“나도 오빠 볼 때마다 고민이에요. 이렇게까지 잘생기면 살짝 곤란하지 않나 싶어서.”

우현과 하루는 남들이 들으면 경악할 정도로 팔불출 대화를 나눴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기에, 하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나 이런 데 처음이라서 잘 모르니까 오빠가 알아서 시켜줘요.”

“응.”

우현은 A코스를 주문했다.

“A코스로 하시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실 수 있는데, 들으시겠습니까?”

“네, 듣겠습니다.”

우현의 대답이 종업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으신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게 안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갑자기 악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하루는 아까부터 손님들이 다들 검은색 정장을 입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뭐예요?”

하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게, 뭘까?”

우현도 의아한 듯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가게의 불이 꺼지고 은은한 조명이 가게 내부를 밝혔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하루도 들어본 적이 있는 클래식이었다.

통통 튀는 밝은 느낌의 선율이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웠다.

“우와, 이 서비스 뭐지?”

하루는 어리둥절했다.

우현이 검지로 왼쪽을 가리켰다.

“어, 저것 좀 봐봐.”

우현의 말에 고개를 돌린 하루가 본 것은, 빔 프로젝터가 벽에 쏴서 만들어낸 사진이었다.

하루와 친구들이 중고등학교 때 함께 찍은 사진들이 벽면에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는 숨을 멈췄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씩씩하게 살아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음성이 들려왔다.

하루도 아는 목소리였다.

하루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회색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도경이 마이크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울지 않고 항상 웃으며 험한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여자였습니다.”

사진의 시간이 최근으로 바뀌었다.

“그 여자를 그리워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우현의 사진이 흘러갔다.

우현의 어린 날, 중고등학교 때, 그리고 현재.

“그 남자는 언제나 그 여자만을 가슴에 채우고, 자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우현과 하루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비쳤다.

“그렇게 각자 걸어온 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오늘 그 여자에게 간청하려고 합니다.”

멍하니 사진들을 보고 있던 하루는 누군가 테이블에 꽃 한 송이를 올려뒀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희정이었다.

그리고 은서. 미영. 낙성. 재현. 나희. 개발지원본부에서 하루와 친하게 지내는 몇몇 동료들과 본부장. 마이크를 잡은 도경까지.

장미꽃이 테이블 위에 쌓였다.

“지금껏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도경이 어딘가를 보며 외쳤다.

“연두야!”

레스토랑 입구부터 하루의 테이블까지 2열로 쭉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목에 바구니를 맨 연두가 달려왔다.

연두는 하루의 앞에 멈춰서 칭찬해달라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바구니 안에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지금껏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도경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우현이 바구니 안의 상자를 꺼내 하루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상자를 열었다.

몇 캐럿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커다란 다이아가 박힌 반지가 상자 안에 있었다.

우현은 하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같이 걸어가게 해줘. 너의 남은 길, 네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싶어.”

프러포즈를 받을 때 우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행복한 순간인데 왜 우는 걸까?

나라면 엄청 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하지만 이 순간, 하루는 펑펑 울었다.

자기가 우는지도 모르는 채 펑펑 울며, 두 팔을 뻗어 우현을 끌어안았다.

“좋아요. 좋아요, 오빠. 우리 같이 걸어요.”

+++

도경은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벅차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펑펑 울고 있었는데, 그걸 놀릴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야말로 저렇게 울고 싶으니까.

참으로 예쁜 친구였다.

어린 날, 하루를 처음 보았을 때.

동화에 나오는 요정인 줄 알았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건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나의 참으로 소중한 친구.

씩씩하게 웃으려고 애쓰는 게 안타까워 무엇이든 해주고 싶지만, 어떻게도 해줄 수 없었던 친구.

내 첫사랑.

그녀가 울면서 웃고 있다.

이제 하루의 웃음은 노력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제 하루는 애쓰지 않아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내 친구.

그렇게 웃어. 그게 진짜로 웃는 거야.

너는 몰랐겠지만, 너는 항상 노력해야만 웃음이 나와서 몰랐겠지만, 그게 정말로 웃는 거야.

그러니까 항상 그렇게 웃어.

+++

프러포즈가 끝난 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근사한 저녁을 대접받았다.

마치 파티에 온 것처럼 식사를 하고 음악을 즐겼다.

재현은 잠시 자리를 지키다가 일어났다.

‘그만 가야지.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하루와 우현은 행복해 보였고, 재현은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우현의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좋았을 거란 망상을 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피하기로 했다.

도망자처럼 비겁하게.

‘그래, 난 비겁한 놈이야. 소설에는 대단한 놈이 양 멋진 문구를 늘어놓지만, 비겁하고 한심한 놈이야.’

재현은 조용히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눈치챈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야, 강재현.”

희정이었다.

“어디 가?”

“집에.”

“같이 가.”

“넌 더 놀다 가지, 왜?”

“불편해.”

“은서 씨랑 미영 씨랑 친해진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도경 씨 때문에.”

“아아.”

몇 달 전, 희정은 재현을 찾아와서 한참을 울었다.

재현은 희정이 그런 식으로 우는 걸 처음 봤다.

“넌 괜찮아?”

“뭐가?”

“하루.”

“……희정아, 난.”

“재현아.”

도경을 짝사랑하게 된 희정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짐짓 어른스럽게 재현의 이름을 부르며, 희정이 말했다.

“알잖아. 난 그렇게 입이 가볍지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 그럼 그 마음은 어떻게 될까?”

“…….”

“심장이 남아 있다가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그러다가 결국 심장까지 썩어버릴걸.”

“네가 그렇게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왜 이러셔. 나도 대학원물 먹은 여자거든.”

재현은 작게 웃었다.

“나는 형을 좋아해.”

“그래, 알아. 그런데 어릴 때부터 너희 형제를 봐온 나로선,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나 싶다. 생각해보면 우현이 오빠, 너한테 정말 모질게 굴었잖아.”

“응. 그래도 형이니까.”

“…….”

“나한테는 정말 자랑스러운 형이니까. 뭐, 남들이 봐도 자랑스러운 강우현이지만.”

희정은 재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재현이, 참 착하다.”

“착하긴. 그런 좋아하는 형의 애인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게 죄니?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랑할 뿐인데. 뺏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랑할 뿐인데. 그걸 왜 탓해?”

“한심하잖아. 형의 애인을 탐내다니.”

“사랑하고 탐내고 소망하는 것까지도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짝사랑하는 사람들 너무 불쌍하잖아. 안 그래도 짝사랑 때문에 힘든데.”

“그건 그러네.”

짝사랑은 참으로 슬프고 덧없다.

가짜가 아닌데도 인정받을 수 없는 마음.

“야, 강재현. 힘 좀 내. 나도 짝사랑 중이야.”

“그래도 넌 친언니의 애인을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너한테 자매가 없는 걸 감사해라. 지금처럼 네가 부러울 때가 없다. 우현이 형이 여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불쌍한 녀석.”

희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나는 기대하고 있어. 형이랑 하루가 결혼을 하고, 나의 진짜 가족이 되는 날을.”

재현이 담담히 말했다.

“어느 날엔가 두 사람에게 아이가 생길 거고, 나는 그 아이에게 삼촌이 되겠지. 형을 닮고 하루를 닮은 그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울 거야.”

희정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재현을, 안타깝게 응시했다.

“그 아이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가 될 거고, 나는 그 예쁜 아이를 낳아준 형과 형수님을 지금과 다른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겠지.”

“그리고 네 옆에는 너와 함께 그 아이를 예뻐해 주고 너와 함께 미래를 얘기할, 예쁘장한 애인이나 부인이 있을 거고?”

재현이 미소 지었다.

“응,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미래를 기대해. 넌 어때?”

재현의 질문에 희정은 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그냥 이 지독한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야. 아무것도 기대되는 게 없거든.”

+++

각자의 기대를 안고, 소망을 안고, 사랑을 안고.

어느 날씨 좋은 봄날, 호화로운 결혼식이 열렸다.

세정 그룹 강 회장이 손주 며느리를 들이는 자리.

질투를 하는 사람, 강 회장과의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진심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주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강 팀장님이 강 회장님 손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떤 사람들은 우현의 정체에 대해 소곤거렸고.

“저 여자, 진짜 월척 낚았네. 뭐 하는 여자래?”

어떤 사람들은 하루를 질투했고.

“우와, 하루 진짜 예쁘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의 미모에 감탄했고.

“딸 시집보내는 기분이야. 하루랑 우현 오빠,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미래를 축복했다.

하루는 프러포즈를 받을 때 많이 울었지만, 결혼식 때는 연신 웃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나오는 행복에 겨운 미소였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지는 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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