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행복해서 다행이야.
도경은 우현과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발치에는 연두가 앉아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덥네요.”
도경이 말했다.
“그러게요.”
“얘가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러고 보니, 얘 이름이 원래 하루였다면서요?”
“이름이라는 게 참 부질없죠. 하루일 때도 있고, 누렁이일 때도 있고, 연두일 때도 있는 겁니다. 부르기 나름이죠.”
“아하. 그럼 제가 왕자 형을 검은 머리라든가, 정장 마니아라고 불러도 되겠네요.”
“……그래요. 뭐라고 하든 왕자 형보다는 낫겠군요.”
“왜요? 좋잖아요, 왕자 형. 옛날 생각도 날 거고.”
“도경 씨. 전부터 계속 진지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놈의 왕자 좀 그만하면 안 되겠습니까?”
“예에? 무슨 그런 말씀을! 노력하셨다면서요? 왕자 오빠로 불리려고.”
“…….”
“노력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때로는 보상이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경이 씩 웃었다.
놀리는 건 여기까지만 해도 되겠다.
“알겠습니다, 강우현 씨.”
“형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말 편하게 해도 되고요.”
“아, 이제 곧 강우현 씨는 제 매제가 되겠네요.”
“……매형이겠죠.”
“후후후. 이럴까 봐 준비했습니다.”
도경이 주머니에서 민증을 꺼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우현의 앞에서 나풀나풀 흔들었다.
“제가 하루보다 생일이 빨라요. 그러니까 강우현 씨는 하루랑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제 매제가 되죠. 이하루는 내 동생이니까.”
“하아.”
우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경은 이 부분도 그만 놀리기로 했다.
“우리 동네, 아주 난리 났습니다.”
도경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아, 형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무튼 우리 동네, 진짜 난리 났어요. 그 인간 말만 믿고 투자한 사람들이 꽤 많거든요. 우리 부모님도 한 천만 원 정도 투자했고요.”
“도경 씨 집안은 괜찮습니까?”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
우현은 도경이, 라고 편하게 부르기 힘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너네 집안은 괜찮아?”
“네, 뭐. 우리 부모님, 큰 교훈 얻으셨겠죠. 우리 집이야 천만 원에서 끝났지만 그보다 더 투자한 사람들은 아주 속이 타들어갈 거예요. 화풀이를 할 곳도 없고.”
이장수는 분노에 차 비명을 지르다가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아무도 집에 없어서 발견이 늦었다.
오랜 시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됐던 이장수는 몇 주가 지난 지금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 인간은 아직도 혼수상태래요. 이장수 입장에서는 안 깨어나는 게 좋을지도 모르죠. 깨어나 봤자 지옥일 테니까.”
“그렇겠지.”
“하루한테는 아직도 얘기 안 했어요?”
“응. 조만간 뉴스를 보면 알게 되겠지. 못 보면 새삼스레 말해주지는 않으려고. 신경 쓰일 테니까.”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아, 그게.”
우현이 빙그레 웃으며 도경을 돌아봤다.
“도경아. 우리 이번 주말에 같이 태국에 가자.”
“예?”
생각지 못한 제안에 도경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형님, 그거 설마…… 우리 둘만의 허니문 같은 그런 종류의 여행……?”
“……그래, 그 비슷한 종류라고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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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습도가 높은 날이었다.
구름 낀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만 같았다.
태국 빠이의 어느 한적하고 넓은 들판.
그곳에 나무로 만든 큰 집이 한 채 있었다.
약간은 어둑한 집 안의 넓은 방에서, 그 남자는 컴퓨터로 한국의 인터넷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 기사, 저 기사 클릭해 대충 훑어보던 그 남자는, 어느 기사에서 멈춰 유독 자세히 글을 읽었다.
한참 기사를 읽어본 그 남자는 인터넷으로 연관 기사와 단어를 검색해서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한 그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보, 뭘 그렇게 재미있게 봐요?”
아내가 와서 그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남자는 아내를 돌아봤다.
“가끔은 이 세상에 권선징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흐음? 무슨 얘긴지 모르겠네.”
“내가 얘기한 적 있죠? 되게 오래전에 내가 알던 어떤 아이…….”
“아, 백번 넘게 들은 그 얘기, 또 듣고 싶긴 한데…… 찾아온 손님들이 있어요.”
“손님?”
“응, 한국에서 왔다던데요.”
“누구지?”
그 남자는 일어나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가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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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태국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우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 때문에 가는 거라서. 다음에 같이 가자. 꼭.
‘우리 회사 식품, 태국에도 진출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우현이 없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홀로서기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주말에 항상 우현 오빠랑 같이 있었네.’
그를 만나지 않는 주말은 정말 오랜만이다.
요새 하루는 우현과 같이 살다시피 했다.
회사가 끝나면 그의 집에 가거나 하루의 집에 와서 노닥거렸고, 아주 늦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거나 같이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우현이 옆에 없으면 허전할 정도로 그와의 생활이 익숙해졌다.
‘벌써 보고 싶네.’
혼자서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현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의존적인 성격이었다니. 충격이야.’
이런 말을 하면 우현은 더 의존해달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더 의존해줘. 제발.’이라고 말하겠지.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 하루에게만 보여주는 그 표정.
그걸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홀로서기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낙성과 그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마침 왔네요.”
낙성의 말에 여자가 뒤를 돌아봤다.
하루는 곧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승혜 씨?”
작년 크리스마스 때 이별 당했던 사람.
그리고 올해 1월 1일, 자신을 찬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사람.
“오랜만이에요.”
승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네. 정말요. 잘 지내셨어요?”
그렇게 묻는 하루에게, 낙성이 난처한 듯 눈짓을 했다.
하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저기…….”
“괜찮아요. 잘 지냈어요.”
승혜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정말로 잘 지냈어요.”
아직 승혜가 찾아온 이유를 모르기에, 하루는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색하게 걸어가 낙성의 옆에 앉자, 승혜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하루와 낙성에게 건넸다.
사진이었다.
승혜와 성준이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해사하게 웃는 사진.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1월 1일, 그날.
성준에게 프러포즈를 하던 승혜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찡해졌다.
“그 사람, 참 씩씩하게 잘 살다가 갔어요. 저는 그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줄 수 있었죠. 웃으면서 그 사람을 보내줄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이 곁에 없어도, 저는 여전히 그 사람의 부인이니까.”
승혜의 음성은 담담했다.
그래서 슬펐다.
하루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낙성은 이미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에이, 왜들 우세요. 축하받으려고 온 건데. 참 고맙다고 말하려고 온 건데.”
오히려 승혜가 두 사람을 달래주는 상황이 되었다.
“여러분이 제 프러포즈 계획에 동참해주신 덕에, 저는 제 소원을 이룰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의 아내가 되는 거.”
“다행이에요.”
하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정말 다행이죠. 그래서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두 분은 항상 이별만 하시니까요. 때로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다고, 두 분 덕분에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승혜는 그와의 결혼식과 제주도로 떠난 신혼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와 함께 사는 집을 조금씩 꾸미는 게 얼마나 즐거웠는지.
승혜는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낙성은 훌쩍훌쩍 울고, 하루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승혜는 울지 않았다.
아마 이제는 흘릴 눈물도 없기 때문일 거라고, 하루는 생각했다.
이제 하루도 사랑을 하기에, 승혜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두 사람이 부부였던 그 시간을,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누구에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나는 참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해야 하는데. 그러기로 약속했는데, 가끔 혼자 있을 땐 너무 괴로워서요.”
“자주 찾아오세요.”
낙성이 말했다.
“언제든 얘기할 수 있어요. 얘는 다른 일이 있어서 바쁘지만, 전 한가하거든요. 언제든 찾아와서 같이 얘기해요.”
낙성의 말에 승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는 일어났다.
“감사해요. 그럼 가볼게요.”
승혜가 떠난 후, 침묵이 흘렀다.
하루는 책상 위에 놓인 승혜와 성준의 결혼식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선배, 우리 이거 액자에 넣어서 사무실에 걸어둬요.”
“어, 나도 그 생각했는데. 찌찌뽕.”
“됐고요. 선배. 승혜 씨 얘기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요. 우리, 이별만 하지 마요.”
“그럼 결혼도 할까?”
낙성이 서랍에서 남는 액자가 있는지 찾아보며 물었다.
“그런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오해가 있어서, 혹은 사연이 있어서 이별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아녜요. 상담을 해서 잘 들어보고, 오해가 있었다면 그걸 풀어주는 거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제는 우리 차이는 쪽의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어봐요.”
“그래, 그 부분에 대해 생각 좀 해보자. 아, 액자 여기 있다.”
액자의 먼지를 털고, 사진을 넣어 홀로서기 사무실 한쪽에 걸었다.
낙성과 하루는 액자 앞에 서서 그걸 올려다봤다.
액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루가 말했다.
“선배. 고마워요.”
“뭐가?”
“항상 챙겨줘서요.”
“너무 늦게 고마워하는 거 아니냐?”
“늘 고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일 같이하자고 해준 것도 고마워요.”
이별을 대신 해주면서, 사랑보다 이별을 먼저 알았다.
낙성은 이 일 때문에 하루가 점점 더 사랑을 두려워할까 걱정했지만, 사랑을 하게 된 하루는 이 일 덕분에 오히려 사랑을 더 잘할 자신이 생겼다.
아낌없이 표현하기.
마음이 변할 것 같을 때는 우리의 시작을 되돌아보기.
화가 날 때는 우선 대화를 해보기.
상대가 날 아껴주는 만큼, 나 역시 아껴주기.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지 말기.
상대도 나와 똑같이 사랑받고 싶고, 아낌받고 싶은 존재라는 걸 떠올리기.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6번 출구가 잘해주냐?”
낙성이 하루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요.”
하루의 대답에 낙성이 씩 웃었다.
“그때, 우리가 실수했을 때. 내가 실수에 대한 보상을 한다고 하고 그 계약연애를 내가 대신할 수도 있었어. 그럼 6번 출구랑 결혼하는 건 나였을걸.”
하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요. 그 계약연애를 양보해줘서, 더 고마워요.”
“당연히 그래야지. 평생 은인으로 모셔라.”
“물론 그럴 거예요.”
낙성이 다시 결혼식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루의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네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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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과 은서, 낙성이 도경의 소집 문자를 받은 건 9월이었다.
더위가 한풀 가신 어느 날, 그들은 홀로서기 사무실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뭐야?”
은서가 볼멘소리로 묻자, 도경이 대답했다.
“몰라.”
“몰라? 야, 이 바쁠 때 꼭 와야 한다고, 안 오면 하늘 무너진다고 해놓고 몰라?”
미영의 눈빛이 살벌해지자, 도경이 몸을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진짜 몰라. 나도 부탁을 받은 거란 말이야.”
“부탁? 누구한테?”
“우현이 형한테.”
“우현 오빠한테? 그 오빤 어디 있는데?”
“몰라! 나도 모른다고! 아씨, 형은 왜 나한테 이런 걸 시켜서.”
도경은 도움을 청하듯 낙성을 돌아봤지만, 낙성도 두 여자가 무섭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딴청을 부렸다.
[형, 왜 안 와요? 얼른 와요. 뭐해요? 날 놀린 거예요? 이대로 날 버리는 거예요? 형이 2시까지 모아달라고 했잖아요. 지금 시간이…….]
거기까지 쓰고 시간을 확인하니 1시 53분이었다.
도경이 다들 늦장을 부릴까 봐 1시 30분까지 홀로서기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은 정확히 시간을 맞춰 1시 3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벌써 20분 넘게 하는 것도 없이 붙들려 있으니, 쇼핑몰 때문에 바쁜 미영와 은서가 화를 내는 게 당연했다.
다행히 우현은 1시 55분에 사무실에 들어왔다.
미영이 도경의 멱살을 잡기 직전이었다.
“형!”
도경은 며칠 굶주리다가 치킨을 만난 사람처럼 우현에게 달려들었다.
도경의 절박한 포옹에 우현은 당황한 듯했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도경을 떼어냈다.
“도경아. 내 몸은 하루 거야. 미안하다.”
우현의 매몰찬 거절에, 도경은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어요?”
“하루는요?”
은서와 미영이 물었다.
낙성은 그들의 뒤에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현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그들을 쭉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