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너는 그래도 돼.
강백선 전무는 그 당시에 과장이었다.
지금은 김 여사인 김윤수는 강백선과 고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대학 때부터 사귀었으며,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우현의 친모인 성해영은 강백선이 친구들과 자주 찾는 술집의 종업원이었다.
기모노를 입고 일하는 고급 술집.
그곳에서 성해영은 강백선이 언젠가 세정그룹을 물려받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성해영은 천천히 준비했고, 강백선과 김윤수가 결혼하기 몇 달 전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만취해서 잠든 강백선을, 성해영이 고용한 사람이 성해영의 집으로 옮겼다.
술기운에 끙끙거리는 강백선의 귓가에, 성해영은 속삭였다.
“나예요, 윤수. 윤수예요.”
어둠 속에서, 강백선은 성해영을 자신의 약혼녀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성해영은 운이 아주 좋았다.
한 번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임신을 해서 찾아온 성해영을, 강백선과 강 회장은 내치지 못했다.
돈을 줘서 쫓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강 회장과 강백선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강백선은 성해영을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참고 살아가려고 했다.
책임져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현이 태어났을 땐,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성해영을 용서했다.
가슴에 남아 있는 김윤수를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행복한 가족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해영은 결혼하기 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갑작스런 신분 상승은 성해영을 결혼 전보다 더 최악으로 이끌었다.
성해영은 걱정될 정도로 과소비를 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고, 허구한 날 파티를 열었고, 파티에서 무례하고 저급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집으로 남자를 끌어들였다.
그 당시 성해영과 강백선은 고급 아파트에서 우현과 셋이 살았고, 가사도우미가 매일 방문했었다.
어느 날, 가사도우미가 더는 참지 못하고 강백선에게 몰래 고백했다.
사모님이 남자를 끌어들인다고.
우현이 있을 때도 그런다고.
강백선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집에 돌아갔을 때, 가사도우미가 말한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성해영은 울었다.
실수라고 했다.
무릎을 꿇었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지만, 강백선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우현도 있는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성해영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로 쫓겨났고, 강백선은 우현을 데리고 강 회장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강백선이 김윤수와 재회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현은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강백선은 아들에게 성해영이 쫓겨난 이유를 말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강백선과 김윤수의 사이에서 강재현이 태어났다.
강백선은 똑같이 사랑했다고 자부했다.
우현에게도, 재현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주었다.
실제도로 똑같은 자식이고 똑같이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우현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성해영이 몰래 찾아왔을 때 우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엄마를 선택했다.
그리고 성해영은, 우현을 인질 삼아 강백선에게 돈을 요구했다.
좋은 자리에 있는 상가 건물 두 채와 고급 아파트, 그리고 현금 얼마.
그렇게 주면 우현을 보내주겠다고, 우현을 찾지도 않겠다고 했다.
만약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우현을 없앨 거라고,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가 없앨 권리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 해영이가 너랑 단둘이 있을 때 너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모르겠다.”
강 전무가 숨도 쉬지 못하고 이야기를 듣는 우현에게 말했다.
‘그 여자’라고 부르고 싶지만, 우현을 의식해서 이름을 불러주는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네게는 친어머니니까…… 소중했겠지.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네 어머니가 한 짓을…… 너한테 말해줄 수가 없었어.”
그러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대신 충격에 빠질 테니까.
그러면 아버지를 미워하는 대신 자신을 탓하게 될 테니까.
차라리 내가 나쁜 사람으로 남자, 차라리 내가 미움을 받자, 강 전무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미안하다, 우현아. 이건…… 나의 사정이고, 네 엄마의 사정이야. 그래, 우리 어른들의 사정이지. 너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넌 그저 축복 속에 태어났을 뿐인데…… 우리 때문에 네가 너무 고통을 받게 했다.”
우현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할아버지에게도, 그리고 김 여사에게도.
그들은 우현이 잔뜩 오해한 채로 미워하는데도, 묵묵히 우현의 곁을 지켜주었다.
우현이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언젠가 우현이 돌아오기를 희망했다.
우현이 제 생각에 빠져, 제 아픔에 빠져,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순간에도 그들은 오롯이 가족이었다.
“제가…… 제가 옹졸해서…….”
눈을 감은 채 힘겹게 말했다.
그들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들으면 알았을 텐데.
들으면 미워하지 않았을 텐데.
“미워하기만 하고…… 원망만 하고…….”
“넌 그래도 돼.”
김 여사가 말했다.
“아들이잖니.”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소리 없이 흐른 눈물이 턱에 맺혔다가 낙하했다.
“죄송합니다.”
그들에게 미안했다.
할아버지에게도,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도, 그리고 재현에게도.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마음이 좁고…….”
“우현아.”
손에 겹쳐지는 손길에 눈을 뜨자, 강 전무가 우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우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러지 마라. 응? 제발 미안하다고 하지 마. 이게 왜 네 탓이야? 이게 왜 네가 미안할 일이야? 말했잖아. 이건 내 탓이고, 네 어미 탓이야. 그냥 우리들의 잘못이야.”
“아버지…….”
강 전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강 전무는 흘끗, 하루를 돌아봤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준 하루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강 전무는 우현과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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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들은 긴 대화를 나눴다.
오랜 세월 가슴에 담고 있던 이야기들을 전부 끄집어냈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기분 나빠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대화를 하고 화해를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 우현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 그녀의 손을 잡고 걸었다.
“언젠가 정말로 괜찮아질 날이 올까?”
대화를 나눴어도 불편한 감정이 찌꺼기처럼 붙어 있었다.
“언젠가 내가 미안해하지 않고, 내 부모님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을 때가 올까?”
“올 거예요.”
하루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루가 그렇다면 그런 거기에, 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는군.”
“네, 와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평생 나를 지배하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와요. 반드시 오더라고요.”
하루가 우현을 돌아봤다.
둘은 잠시 멈춰서 서로를 마주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제 두 사람은 미소조차 닮아 있었다.
그렇게 말투도, 미소도, 그리고 향기까지.
각자 걸어온 둘의 길이 조용히, 느릿하게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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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정 그룹에서 크게 투자했던 개발 건이 취소된 건, 6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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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새아버지인 이장수는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비비고, 비비고, 또 비비고.
그렇게 눈을 비볐는데도 눈앞에 펼쳐진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부릅뜬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비명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곳이 일터가 아니라면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두드렸을 것이다.
핑글-
세상이 한 바퀴 도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이장수는 그동안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정보, 혹은 뒷돈을 찔러주고 알아낸 정보로 투자를 하여, 심심치 않게 돈을 벌었다.
이번에 세정 그룹을 주축으로 여러 거대 기업에서 한 지역을 공동 개발한다는 소식을 알게 됐고, 이것이야말로 한몫 잡을 기회라는 생각에, 그동안 벌어들인 전재산은 물론 대출까지 받아서 투자를 한 터였다.
이장수의 돈만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돈, 일가친척의 돈,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전부 빌리고 끌어모았다.
게다가 이장수가 내비친 정보로 투자를 한 지인들도 많았다.
그런데 확실했던 그 개발이 취소가 됐다.
‘왜 갑자기?’
아무 전조도 없었다.
개발을 하기로 한 기업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대체 왜?’
울컥, 울컥, 올라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대체 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완전히 망했다.
이대로라면 평생 노예처럼 일해도 돈을 갚을 수가 없다.
마우스 위에 놓인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망했다. 망했다. 망했다.
그 생각 때문에, 어느 순간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이장수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걸 깨닫지 못했다.
이장수는 일단 일터를 벗어나 감정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어나려는데, 계장이 이장수를 불렀다.
“잠깐 나 좀 보지.”
그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계장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장수는 비틀거리며 계장의 자리로 향했다.
계장은 볼펜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이장수를 응시했다.
‘뭐지? 무슨 일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들킨 건가? 내가 정보를 이용한걸?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변명하지?’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망했다. 망했다.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불편한 표정으로 이장수를 빤히 응시하던 계장이 입을 열었다.
“이런 메일을 받았는데.”
계장이 볼펜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장수는 모니터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계장의 얼굴만 쳐다봤다.
“이것 좀 봐봐.”
이장수는 목을 움직여 모니터를 확인했다.
음소거를 해서 소리가 없어도, 모니터 안에 비치는 광경이 뭔지 알 수 있었다.
한 남성이 어린 소녀를 우악스럽게 폭행하는 장면.
그 남성과 어린 소녀가 누군지 알아본 이장수는 숨을 멈췄다.
계장은 이장수를 빤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리도 키워줄까?”
이장수는 계장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귓가에 우웅우웅 이명만 울렸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모니터 안의 끔찍한 장면을 응시하다가 뻣뻣해진 고개를 돌리자, 사무실 안의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계장과 비슷한 표정으로 이장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눈에 담긴 감정이 뭔지, 이장수는 알 수 있었다.
경멸, 경악, 비난, 분노…….
지금껏 이장수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들.
시선들.
시선들.
이장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일자리를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변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듯 일터에서 나왔다.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젠장! 젠장!”
욕을 퍼부으며 아내를 찾았다.
이 분노를 누구에게는 풀어야 했다.
생각은 그다음에 하면 된다.
“야! 어디 있어? 남편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뭐해! 어디 있어?”
버럭버럭 외치며 주방으로 갈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 있냐니까!”
안방 문을 열었다.
작은 방 문을 열었다.
화장실 문을 열고, 아들 방의 문을 열었는데도 아내는 없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이 여편네가 어딜 쳐 돌아다니는 거야?”
찬물이라도 마셔야겠다.
다시 주방으로 가서 컵에 차가운 물을 담아 돌아선 이장수는, 그제야 식탁 위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거칠게 종이를 집어 들고 확인한 이장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장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혼신고서]
이장수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장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망했어.
악마.
미친놈.
애를 때리다니.
아내도 때렸대.
저게 인간이야?
사람도 아냐.
저런 건 죽어야지.
집은 조용했지만, 아주 많은 소리들이 이장수의 고막을 파고 들어와 뇌를 흔들었다.
이장수는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이장수가 아는 건, 앞으로 자신의 인생이었다.
그 지독한 미래에 함께할 사람이 없다는 것.
어느 누구도 이장수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것.
시야가 흐릿해지고 속이 메스꺼웠다.
이장수는 헐떡거리다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길게 이어진 절규.
그리고.
털썩-
무너진 육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