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08화 (108/119)

#(108) 기억의 오류

평온한 하루가 흘러갔다.

분홍빛 하루가 흘러갔다.

행복한 하루가 흘러갔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흘러갔다.

하루와 꿈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우현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루는 이제 그 집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그래도 우현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터뜨려야 하는 순간이 왔다.

그날, 우현은 강 회장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먼저 강 회장의 집으로 찾아갔다.

강 회장은 언제나와 같이, 조금은 슬퍼 보이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우현을 맞이해주었다.

강 회장과 마주 보고 앉아, 우현은 사정을 설명했다.

이걸 계획을 위해서는 강 회장의 힘이 필요했고, 그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조건이 있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우현의 부탁은 세정 그룹 전체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강 회장은 깜짝 놀랄 정도로 흔쾌히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주마.”

“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우현이 눈을 크게 떴다.

강 회장이 웃었다.

“그렇게 해준다고.”

“하지만…… 아무 조건도 없습니까?”

“조건?”

“네. 세정에 큰 타격을 입힐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현아. 넌 내 손자다.”

“…….”

“할애비가 손자를 위해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니?”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더한 것이라도 해줄 수 있다. 더한 것이라도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조건을 다셨잖습니까.”

“조건?”

“저에게만 연애를 하라는 조건을…….”

“내 짧은 생각이었다.”

강 회장이 말했다.

“네가 연애를 하면, 네가 진짜로 사랑이라는 걸 하면, 언젠가 네 아버지를, 나를 이해해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앞으로 이해를 못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럼 그걸로 됐다. 나는 그냥 네가 건강하면, 그걸로 됐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가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하는 목적을 이뤘으니, 진심 없는 감사 인사 한마디 남기고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하루 때문일까?

그녀를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면서, 내 안의 무언가가 변한 걸까?

아니면……

‘하루는 흔들리지 않지.’

그녀는 씩씩했다.

늘 그랬다.

우현이 지켜줄 것도 없이, 하루는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그런 하루를 보며, 우현은 약한 쪽은 자기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그랬듯이.

“불편하지?”

강 회장이 침묵을 깨뜨렸다.

“세정에 타격을 주는 일이라고 해서 미안해할 것 없다. 언젠가는 다 네 것이 될 테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만 가 보거라. 다음에 하루랑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바보처럼 꾸벅 인사만 하고 강 회장의 집에서 나왔다.

차에 타서 하루의 집으로 향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우현이 도착한 곳은 재현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한참 후에 재현이 나왔다.

자다가 나왔는지 부스스한 차림이었다.

“형?”

우현이 먼저 재현의 집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기에, 재현은 굉장히 놀란 듯했다.

“나 좀 들어갈게.”

“어? 어, 아. 어, 그래. 들어와, 들어와.”

재현이 비켜섰다.

“우와, 형. 나 지금 꿈꾸나? 꿈이지, 이거? 우와, 형이 우리 집에 있다니. 우와, 그래, 이거 꿈일 거야. 그럼 다시 자야지.”

중얼거리며 방으로 향하는 재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재현아.”

우현의 진지한 눈빛을 본 재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응.”

“너는 알지?”

“뭘?”

“나에 대해.”

“요새는 알다가도 모를 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형수님이랑 같이 있을 땐, 진짜 내가 생각하는 거랑…….”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 거야.”

“……응. 알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아. 전부 다. 누가 얘기해준 건 아니고, 내가 들었어. 몇 가지를 들었고 몇 가지를 추리했고, 그래서 물어봤더니 맞다고 했어. 하지만 형. 나는 그 얘기를 형한테 해주지 않을 거야. 내가 알아낸 걸 말하지 않을 거야.”

“왜?”

“내가 스스로 알아낸 거니까. 형도 알고 싶으면 형이 스스로 알아내.”

“……내가 다치기 때문인가?”

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진실이 날 몰아세우는 내용이기 때문인가?”

다시 한번 물었지만, 재현의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었다.

“말 많은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니 불안한데.”

“형.”

재현이 뒤를 돌아봤다.

재현의 뒤쪽에는 책장이 있었고, 거기엔 재현이 쓴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건, 형한테 하고 싶은 말들이 아주 많은데 형이 들어주지 않아서였어.”

“…….”

“나는 어릴 때부터 형이 참 좋았어. 형이니까. 그래서 항상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어, 형.”

“미안.”

“사과받으려고 한 얘기 아냐.”

재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그랬다고.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어.”

+++

집으로 돌아온 우현은 기뻐하며 반기는 연두를 대충 쓰다듬어주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는 재현의 책들이 전부 꽂혀 있었다.

우현은 됐다고 하는데도, 재현은 책이 나올 때마다 굳이 찾아와서 책을 건네곤 했다.

버릴 수도 없어서 꽂아놓은 책들.

펼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책들.

먼지가 앉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재현의 처녀작이었다.

우현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다음 날.

우현은 회사에 병가를 냈다.

그다음 날도 우현은 회사에 병가를 냈다.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는 우현이 걱정되어 하루가 찾아오고 있을 때.

재현이 쓴 모든 책을 다 읽은 우현은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재현의 소설에는 우현의 과거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그저 가족과 가족의 이야기,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 상처받은 가족들이 서로를 용서하는 이야기만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우현은 알 수 있었다.

재현의 소설에 담긴 다정함이,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우현이 부정하던 것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직소퍼즐처럼 흩어져 있던 사건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 커다란 그림이 되었다.

끔찍한 그림이었다.

이제야 강 전무가 술을 입에도 안 대는 이유를 알 수 있었고.

이제야 명지가 설날에 찾아와 불미스러운 일 운운할 때, 강 전무가 그답지 않게 화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딩동-

초인종 소리에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문을 열자, 하루가 있었다.

“이제야 알았어.”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는 하루에게, 우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태어나면 안 되는 인간이었어.”

+++

찰싹-

찰싹- 찰싹- 찰싹-

하루가 손바닥으로 우현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갑자기 맞은 우현은 눈을 크게 뜨고 하루를 내려다봤다.

연두는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뒤에서 방방 뛰며 웡웡거리고 있었다.

“저것 봐요.”

하루가 연두를 턱으로 가리켰다.

“연두도 개소리하지 말라잖아요.”

“개소리…….”

며칠 밤을 새워서 깨달은 진실과 그 고통스러운 결론을 개소리로 치부하다니.

충격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어. 어휴.”

하루가 또 손바닥으로 우현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안 그래도 재현이한테 연락받았어요. 오빠가 어쩌면 진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이 마음 약한 내 남자가 자책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그래서 달려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휴. 개소리.”

“……하루야. 난 심각해.”

“나도 심각하거든요?”

하루가 우현의 손목을 잡고 소파로 향했다.

“자, 앉아봐요.”

우현은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하루는 주방에 가서 찬장을 열었다.

하루가 우현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사둔 코코아가 있었다.

하루는 코코아를 한 잔 타 와서 우현에게 건넸다.

“바보 같은 생각하느라 밥도 안 먹고 있었죠? 일단 코코아 천천히 좀 마셔요. 단 거 마시면 기분이 나아진다잖아요.”

“생각이 없어.”

“어휴, 내 남자는 진짜 앙탈쟁이라니까.”

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앙탈로 치부하다니.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하루가 코코아를 한 모금 입에 머금더니 우현에게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콤한 액체가 흘러들어왔다.

오오.

기분이 나아진다.

“오빠.”

하루가 우현과 눈을 맞췄다.

“뭘 알아냈어요?”

“내가 태어나지 말아야 할 놈이라는 거.”

“왜요?”

“내 어머니가…… 유명지 같은 인간이었으니까.”

그랬던 것이다.

어머니가 고아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때 술집에서 일했다는 것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난 어릴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내 어머니가 그런 여자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내 어머니는 유명지가 나에게 하려던 짓을 했고, 성공했지. 나를 임신했으니. 그래서 원래 아버지의 약혼녀였던 김 여사님을 내치고 자기가 세정의 며느리로 들어온 거야.”

강 전무와 김 여사는 사랑을 했고, 약혼까지 한 사이였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강 전무는 결혼을 축하해주려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흠뻑 취했다.

김 여사는 강 전무와 친구들이 종종 찾아가는 술집의 종업원이었다.

“나는 이제 아버지를 이해해. 내가 널 사랑하니까. 유명지가 그런 짓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됐다면, 나는 평생 유명지를 원망하고, 그 여자가 낳은 자식을 증오했을 거야. 그리고 결국 그 여자를 내치고 널 다시 찾아갔겠지. 그러니 아버지가 내 어머니를 버리고 김 여사님을 선택한 것도 전부 다 이해해.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아버지는 날 굳이 어머니에게서 떼어놨을까?

“왜 굳이 그랬을까? 어머니는 나밖에 없었는데, 왜 그 하나까지도 빼앗은 걸까?”

우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루는 그의 허벅지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오빠, 기억이라는 거요. 참 이상해요. 나만 해도, 충격을 받아서 기억 몇 개가 사라졌고, 오빠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잖아요.”

우현은 하루가 갑자기 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내리고 하루를 돌아보자, 하루가 슬프게 웃었다.

“때로는 기억이라는 게요. 나 좋을 대로 변하기도 한대요. 나를 지키려고. 더 많이 안 아프게 하려고.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기도 한대요.”

“설마…….”

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기억이 잘못됐다는 건가?”

하루는 난처한 듯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결심을 굳히고 일어났다.

그리고 우현의 손목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요, 우리. 가서 얘기해요. 제대로 된 기억을 찾아봐요.”

“난 그분들을 뵐 낯이 없다, 하루야.”

“응, 그럴 거예요. 그래도 봐야 해요. 그분들은 오빠를 보기 원하고, 나도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오빠가 희생 좀 해요. 그만 좀 징징거리고.”

징징거리다니!

충격이다.

이런 와중에도 하루에게 ‘징징거리는 남자’로 비쳐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우현은 몸을 일으켰다.

+++

우현이 운전할 기분이 아닌 것 같기에, 택시를 타고 강 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출발하면서 김 여사에게 찾아뵐 거라고 연락을 넣어뒀다.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하루는 우현의 옆모습을 살펴봤다.

그의 고통스러운 눈빛에, 하루는 가슴이 아팠다.

우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더 아플 거야.’

강 회장을 찾아가서 남은 진실을 듣게 되면, 우현은 더 괴로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야 해.’

아까 현관문을 연 우현의 모습을 보자마자 오열할 뻔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안타깝고 슬퍼서,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까지 울면 안 돼. 나는 씩씩하게 우현 오빠의 손을 잡아줘야 해.’

웃어야 한다.

별일 아니라고, 이런 것쯤 어디에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오빠는 괜찮을 거라고, 나도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전부 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보여야 한다.

커다란 저택 앞에서 내린 두 사람은 초인종을 눌렀다.

집에 들어가기 전, 하루는 우현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나 좀 봐요.”

우현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현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하루는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내가 여기에 있어요. 계속 여기에 있을 거예요.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럴 거예요.”

우현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그 어떤 얘기도, 그 어떤 상황도, 우리를 흔들지 못해요. 맞죠? 그런 거죠?”

“응.”

“날 불안하게 하지 마요. 오빠는 괜찮아요. 내가 괜찮은 것처럼요. 그쵸?”

우현의 눈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우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응,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이제 괜찮아.”

우현은 하루가 있어야 괜찮았고, 하루가 있으면 괜찮았다.

그래서 우현은 자신을 맞아주는 강 전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부 다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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