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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07화 (107/119)

#(107) 아침 먼저, 나 먼저?

우현은 왕자 오빠였다.

그걸 알게 되자, 그동안 그가 해주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그저 널 위해 살아왔어.

우현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루조차 잊었던 어린 날의 소망을, 그때의 대화를, 우현은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

놀이공원, 미트볼 스파게티, 시계, 기차 여행…….

하루는 이제 잊은 것들을 그가 해주려고 했던 이유를, 하루가 해주는 것들에 그가 과할 정도로 기뻐했던 이유를, 하루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몇 시간 전 들이닥친 과거는, 더 이상 하루를 흔들지 못했다.

엄마와 명준을 앞에 두고도 잔잔할 수 있었던 건, 우현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오빠는 어떻게 나랑 있었던 일들을 다 기억했어요?”

“그게 나한테 유일한 위안이었으니까. 놀이터에서 너와 함께했을 때도, 널 만나지 않게 되었을 때도.”

“계속 내 생각 했어요?”

“응. 그래서 회사에서 널 봤을 때 한 번에 알아봤어.”

로비에서 봤다고 했다.

1층에서 나희와 함께 걸어가는 하루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달려가 끌어안을 뻔했다고 했다.

“거의 1년을 고민했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지.”

“그 1년을 고민하면서도 여자친구는 계속 사귀었고?”

“아니, 그건 그냥…… 회, 아니, 할아버지의 재산이 필요했어. 그게 있어야 널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왜 그렇게 날 지킬 생각을 해요? 자기도 약하면서.”

“그래, 맞아. 약하지. 그래서 난…… 그때, 그 어릴 때 널 지킬 수 없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내가 좀 더 힘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 정도의 힘이라도 있었으면, 널 그 인간의 손에서 빼앗아올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지.”

“이미 빼앗았었어요. 오빠랑 같이 있을 땐, 집 생각을 하나도 안 했거든요.”

“난 너한테 아무 위로도 되지 않았는데. 위로를 받기만 했지.”

“아뇨, 위로가 됐어요. 왕자님이잖아. 동화 속에나 있는 잘생긴 왕자님이 현실에 나타났는데, 다른 위로가 뭐가 필요하겠어요?”

“잘생기길 잘했군.”

“어우, 자기 입으로 잘생겼대.”

둘은 키득키득 웃었다.

하루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동안 하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혀니 오빠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내가 어릴 때부터 알던 오빠인데…… 공원이 있거든요.”

하루의 동네에는 공원이 하나, 놀이터가 하나 있었다.

공원에 가면 혀니 오빠를 만날 수 있었다.

“오빠를 알게 되면서 공원에 가는 시간이 줄어들었어요.”

놀이터에서 왕자 오빠를 만나는 시간이 늘어났다.

왕자 오빠가 매일 찾아오는 건 아니기에, 놀이터에서 왕자 오빠를 기다리다가 오지 않으면 공원에 가서 혀니 오빠와 놀곤 했다.

혀니 오빠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게임을 많이 알고 있었다.

“우리 동네 애들은 다들 혀니 오빠를 좋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오빠 고작 중, 고등학생이었는데…… 정말 대단하죠.”

혀니 오빠가 아이들과 어울린 이유는, 보육원 동생들 때문이었다.

쟤네 엄마 아빠 없대.

엄마가 쟤네랑 놀지 말래.

피를 나누지 않은 자신의 동생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혀니 오빠는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와 보육원 아이들과 동네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게 해주었다.

“나 때문에 혀니 오빠는 다리를 잃었고, 나 때문에 혀니 오빠는 동네에서 쫓겨났어요.”

하루는 기억에 남은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냈다.

“나는 언젠가 혀니 오빠를 찾아서, 혀니 오빠에게 말하고 싶어요. 오빠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고. 오빠가 있어서 내가 이렇게 씩씩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참 고맙고 미안하다고.”

반드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왕자 오빠보다 더.

하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우현이 질투를 할 테니까.

“돈을 모으고 있어요. 의족을 사고 싶어서요. 혀니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되면, 그걸 주고 싶어요. 완전 자기 다리처럼 움직이는 건데, 그게 엄청 좋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런 걸로 혀니 오빠가 나 때문에 잃은 것들을 전부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요. 그래도 뭔가 해주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될 거야.”

“그럴까요?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언젠가 찾게 되겠지. 내가 널 찾은 것처럼.”

하루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맞아요. 찾게 되겠죠. 오빠를 만난 것처럼.”

우현도 하루를 응시했다.

“응, 그럴 거야.”

우현이 하루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하루야.”

“네?”

“키스해도 돼?”

우현의 말에 하루가 작게 웃었다.

“그런 거 묻지 마요. 난 이미 그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우현도 웃다가 하루에 입을 맞췄다.

겹친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여 서로를 탐했다.

처음에는 느릿했던 키스가 점점 격렬하고 깊어졌다.

우현의 손이 하루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 침대에 눕혔다.

그의 숨결과 상체를 누르는 그의 무게에, 하루는 아찔해졌다.

그의 향기가 하루를 물들였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움직여, 하루의 옷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그러다가 멈칫한 우현이 입술을 떼고 하루를 내려다봤다.

“하루야…….”

그가 뭘 물어볼지 예감한 하루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그런 거 일일이 묻지 말라니까.”

안심한 듯 우현이 다시 입을 맞췄다.

옷 안에 들어온 그의 손이 하루의 맨살을 만졌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만져진 적 없는 피부가 그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간지럽기도 하고 저릿하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 허벅지를 타고 종아리로, 발가락 끝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움직임이 짙어질수록, 하루는 숨이 가빠졌다.

자꾸만 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입술에 닿아 있던 그의 입술이 언제 목덜미로 향했는지, 가슴으로 향했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새하얗게 빈 머릿속에 그의 감미로운 움직임이 하나, 열기에 찬 움직임이 하나, 그렇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얗던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을 때.

그의 세계와 하루의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

+++

눈을 떴다.

하루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낯선 통증이 아랫배 부근에 남아 있었다.

‘뭐지……?’

그러다가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뜨겁고도 달콤한 행위가 떠오르자, 하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하루의 몸을 내리누르던 그의 육체가 아직도 생생했다.

‘으아……!’

했다!

드디어 해버렸다!

희정은 그의 기능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대단했다.

정말 굉장했다.

‘으아, 으아!’

하루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으아, 정말…… 으아……!’

어젯밤의 우현은 평소와 달랐다.

평소의 우현이 다정다감한 골든레트리버라면 어젯밤의 우현은 강렬한 흑표범 같았다.

하루를 내려다보는 열기 띤 눈동자와 그의 손길, 움직임, 숨소리, 그리고 나직하게 울리는 신음.

‘으아, 진짜…… 으아, 너무 섹시했어!’

아무래도 당분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다.

자꾸만 생각이 나서.

한참 이불 속에서 버둥거리던 하루는, 뒤늦게 우현의 부재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밖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냄새도.

하루는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옆에 떨어진 옷들을 보고 또 한 번 얼굴을 붉혔다.

으아, 으아.

황급히 옷을 입고 나갔더니, 우현이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오빠.”

“어, 깼어?”

왜인지 우현이 화들짝 놀라 하루를 돌아봤다.

“일찍 일어났네요? 뭐하고 있었어요?”

“아, 그게…… 나는 꿈을 꿨어.”

우현이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꿈이요?”

심각한 이야기가 시작되려나 싶어, 하루도 진지하게 우현을 응시했다.

“언젠가 너와 이렇게 밤을 보내고 나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근사한 아침을 준비해 너를 깨워줄 생각.”

“아아.”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지.”

“네에.”

“그리고 아침을 준비했어.”

“와, 진짜요?”

하루가 다가가려 하자, 우현이 한 손을 내밀어 하루를 멈춰 세웠다.

“준비하는 중에 깨달았어.”

“……뭘요?”

슬슬 불안해졌다.

“나는 모든 걸 잘하는데…… 요리를 못해.”

“…….”

“정말 못해.”

“…….”

“모든 걸 굉장히 잘하기 때문인지, 못하는 부분도 굉장해. 굉장히 못하지.”

“……어디 좀 봐요.”

하루가 우현의 손을 밀치고 가스레인지로 향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프라이팬이 있었고, 프라이팬에는.

“이게 뭐예요?”

하루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한때는 계란이었지.”

“……이게요?”

“응.”

“그렇군요.”

할 말을 잃었다.

갈색과 검은색이 섞인 황천의 무언가가, 프라이팬 위에서 묘한 냄새를 뿜고 있었다.

“오빠의 계획은 뭐였어요?”

“계란프라이.”

“그거 그냥 기름 두르고 계란만 깨뜨려 놓으면 돼요.”

“그렇게 했지.”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몰골이 되죠?”

“요리를 굉장히 못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어.”

“지금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때가 아니거든요.”

하루는 웃으며 프라이팬을 싱크대에 가져갔다.

혼난 강아지처럼 서 있던 우현이 다가와 하루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설거지, 내가 할게.”

“그래요.”

“결혼하고 나서도, 설거지 내가 할게.”

결혼.

이제 그 말이 실감된다.

난 이 남자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다.

언젠가 나는 이 남자의 가족이 된다.

심장이 뛰었다.

가족이 싫었는데, 결혼이 무서웠는데, 참으로 끔찍했는데.

역시 이 남자는 마법이다.

단 몇 개월 만에, 몇십 년간 하루를 지배했던 공포를 깨끗이 지워버렸으니까.

우현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내가 어젯밤 엄마와 동생을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게 해준 것처럼, 앞으로 남은 길을 걸어갈 때에도 날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리라는 확신.

그래서 하루는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청소랑 빨래는요?”

“그것도 내가…… 아, 맞다. 잊고 있었는데, 난 돈이 많아.”

우현이 하루의 어깨를 잡아 빙글 돌려,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집안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우리는.”

우현이 하루와 입을 맞췄다.

“이런 거나 하자.”

그리고 공주님처럼 번쩍 안아들었다.

“으앗!”

하루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우현은 방으로 들어가 하루를 침대에 눕히고, 민망하지도 않은지 당당하게 상의를 벗으며 물었다.

“하루야. 아침 먼저, 아니면 나 먼저?”

+++

생각지도 못한 방문객에, 미영과 은서의 눈이 커졌다.

“사과를 하러 왔어요.”

희정은 자기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동안 제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습니다. 미안해요, 정말로.”

“이제 와서?”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미영이 말했다.

“그러게요, 이제 와서.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하루가 미워서 하루를 괴롭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하루가 좋아서 내가 한 짓을 후회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희정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기, 조희정 씨?”

“네.”

“도경이, 좋아하죠?”

희정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네, 좋아해요.”

“도경이 때문에 우리한테 사과를 하는 모양인데, 이런다고 우리가 도경이랑 그쪽 사이를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아요.”

희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정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

“이미 차였어요. 현실을 깨달았고요. 나는 도망칠 용기가 없으니 도경 씨를 좋아할 자격도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아요. 이미 끝난 일이에요, 나와 도경 씨는.”

“…….”

“지금은 그저, 하루가 좋아서요. 나를 그렇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친구는 처음이라서, 내가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 친구도 처음이라서. 내가 한 짓에도 하루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주니까. 그러니까 찾아뵙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 정도의 용기는 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미영과 은서가 서로를 쳐다봤다.

이윽고 미영이 현관문을 활짝 열면서 말했다.

“들어와요. 하루 친구면, 우리 친구이기도 하니까. 어디 한번 그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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