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105화 (105/119)

#(105) 마법이 끝날 때

“으악! 촌시러!”

라고, 미영이 외쳤다.

“헐, 대박. 뭐야, 이 커플은?”

이라고, 은서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을 꼭 잡고 찾은 인사동 거리에서, 미영과 은서를 마주칠 줄은 몰랐다.

미영과 은서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차려입은 하루와 우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몸서리를 쳤다.

“웬일이야. 요새 누가 이렇게 똑같이 커플 티를 입어?”

“우리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중이에요, 하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지. 대박.”

두 사람의 신랄한 평가에, 하루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우현은 둘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맞습니다. 우리 지금 사랑하는 중입니다.”

“웬일. 얼굴 끝내주니까 저런 말을 해도 끝내주네. 죽인다, 진짜 죽여. 안 그르냐, 은서야?”

미영이 말했다.

“그르게. 진짜 죽여주네. 하루, 좋겠다.”

“응, 좋아.”

하루가 수줍게 대답하자.

“어우, 웬일.”

“우리 하루, 사랑에 빠진 것도 귀엽네.”

미영과 은서가 호들갑을 떨었다.

하루는 너무 민망했다.

“인사동을 좀 둘러볼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우현이 둘에게 물었다.

“같이 갈래요, 라고 하면 우리 눈치 없다고 속으로 엄청 욕할 거면서.”

미영의 말에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두 분은 하루에게 가족이잖아요. 그렇다면 제게도 가족입니다.”

다정하게 말하는 우현을, 미영과 은서는 넋 나간 표정으로 올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우현 씨. 그런 말 안 해도 진짜 끝내주게 멋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를 홀리는 그런 말씀은 그만하시고, 하루한테나 실컷 하세요.”

“맞아요. 어휴, 자체발광 대박. 야, 우리 눈멀기 전에 얼른 딴 데 가자.”

“빠이욤.”

미영과 은서가 키득거리며 손을 흔들고 두 사람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런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우현이 말했다.

“하루 네 친구들은 정말, 폭풍 같아.”

“그래요?”

“응. 나는 살면서 여자가 무섭다고 생각해본 게, 네 친구들을 만나면서가 처음이야.”

“도경이도 쟤네 무섭다고 그러더라고요. 낙성 선배도 그렇고.”

“그럴 만해. 정말 폭풍 같거든. 아니, 해일이라고 해야 하나?”

적당한 표현을 찾아 궁리하는 우현이 귀여웠다.

손을 잡고 걸으며 우현이 물었다.

“요새 홀로서기 쪽 일은 어때?”

“야근하느라 계속 미뤄둬서, 다음 주에는 이별하느라 바쁠 것 같아요.”

“그럼 또 데이트할 시간 줄어들겠네.”

“이별하고 나서 데이트하면 되죠. 오랜만에 연두도 보고 싶다.”

“내일은 연두 데리고 강아지 놀이터에 갈까?”

“오, 좋아요. 그런 데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아, 오빠. 우리 저기서 사진 찍어요.”

둘은 같이 셀카도 찍고, 신기한 물건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하루는 친구들과 인사동에 와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우현과 함께 걷는 인사동 거리는 다른 느낌이었다.

똑같은 차림새로 걷는 두 사람이 눈에 띄는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보곤 했다.

아니, 차림새보다는 이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는 것이리라.

하루는 우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새삼 이 남자의 잘생김을 깨달았다.

‘진짜 왕자 같아.’

그러다가 문득 ‘왕자’라는 단어가 가슴에 걸렸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는데. 뭐지?’

하루의 시선을 느낀 듯 우현이 하루를 내려다봤다.

“왜?”

“아니, 그냥. 오빠 되게 왕자 같아서요.”

우현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왕자 같기만 해?”

“응?”

“그냥 왕자는 아니고.”

“아…… 왕자는 아니죠. 아니, 세정 그룹 회장님의 손자니까 왕자 맞나? 우리나라에서는 왕자일 수도 있겠다. 그쵸?”

우현이 웃으며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쓰다듬어질 때마다, 왜인지 가슴이 아릿했다.

다시 그와 손을 깍지 끼고 걸으며, 하루는 생각했다.

‘우현 오빠는 자기를 왕자 같다고 하는데, 왜 저렇게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짓는 거야? 자기가 왕자보다 더 굉장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가? 황제 정도는 된다고 말해줬어야 했나?’

+++

우현과 함께 있으면 항상 그렇듯, 꿈과 같고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다.

예정대로라면 그의 손을 잡고 집 앞에 와서 달콤한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어야 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씻고 나오면 그에게 전화가 걸려올 것이고, “잘 자요.”, “잘 자.”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도 끊는 게 아쉬워 한참을 더 통화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야 했다.

그게 최근 하루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빌라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보는 순간.

하루는 꿈에서 깨어났다.

하루를 둘러싼 마법이 산산이 부서졌다.

어둡지만, 그들을 비추는 건 가로등 불빛뿐이지만.

하루는 보는 순간 그들을 알아봤다.

현실을 깨달았다.

지독한 과거의 아픔이 해일처럼 몰아쳐 하루를 삼켰다.

그 아픔이 어찌나 끈적거리는지, 하루는 숨도 쉴 수 없었다.

그와 달콤하게 보낸 오늘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지고, 하루는 그 지독한 방구석으로 돌아갔다.

쏟아지는 폭력에 반항할 수 없었던 그때로.

아들만 끌어안고 조용히 이곳을 바라보는 엄마가 있는 그 차가운 공기 속으로.

하루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우현이 하루를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넓은 어깨, 단단한 등이 하루와 과거 사이를 가로막았다.

멍하니 그의 어깨를 본다.

그의 등을 본다.

그의 허리를 본다.

‘나는.’

그리고 떠올린다.

‘이걸 본 적이 있어.’

그때는 이렇게 넓지 않았지만.

이렇게 키가 크지 않았지만.

하루는 분명히 본 적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딸, 여기서 뭐해?

퇴근하는 길, 하루를 발견한 새아버지가 다가왔다.

새아버지는 밖에서는 늘 그렇게 상냥했다.

하지만 하루는 새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저 손을 잡고 싶지 않다.

저 손이 내게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간절히 소망할 때에.

새아버지와 하루의 사이를 가로막는 등이 있었다.

‘왜…… 잊었던 거지?’

답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었지?’

그 답 또한 알았다.

아프니까.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기도록 아프니까.

‘왕자 오빠.’

어린 날, 어느 날 갑자기 마법처럼 내 눈앞에 나타난 왕자님.

깜짝 놀랄 정도로 잘생긴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를 가졌던 왕자님.

그리고 마법이 끝난 듯, 갑작스럽게 사라진.

나의 왕자님.

비틀-

하루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아니, 지금은 안 돼.’

생각지도 못한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에 사로잡혀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내 앞을 단단히 가로막은 이 남자 앞엔, 하루가 벗어나고 싶었던 그들이 있었다.

나의 마법과 나의 꿈을 산산조각내는 그들.

“여기가 어디라고…….”

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현은 저들을 아는 모양이다.

어떻게 아는 걸까?

어릴 때 본 적이 있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것 같다.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와 뇌를 휘저었다.

하루는 그의 등 뒤에서 벗어나 그의 팔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을 대면했다.

하루의 기억보다 훨씬 더 많은 늙은 한 사람과 훨씬 더 많이 자란 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상대할 거 없어.”

우현이 하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알아서 하지.”

물론 지금 우현에게 다 맡겨둘 수도 있었다.

우현은 그가 말한 것을 지킬 테니까.

어쩌면 명지에게 그랬듯, 저 두 사람이 두 번 다시는 하루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별을 하고 싶어. 가족이랑.

며칠 전, 희정이 했던 말은 하루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 집에서 벗어났다고 이별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는 여전히 한 발을 그 집에 담그고 있었다.

그 발을 빼내는 건, 어느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가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어깨에 놓인 그의 손을 잡아 옆으로 내리며 말했다.

“아니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하루의 냉랭한 음성에, 우현이 움찔했다.

“내가. 알아서 해요. 이건.”

하루는 우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온몸으로 우현의 접근을 거부하듯이.

그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는 듯이.

당신은 나의 삶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듯이.

지금까지의 하루와 다른 분위기에, 우현은 불안해졌다.

하지만 하루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하루에게서는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 쥐고, 자신의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엄마.”

하루의 부름에, 하루 어머니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를, 하루는 서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용서를 빌려고 왔어, 누나.”

명준이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누나한테 용서를 빌고 싶어서 왔어.”

“하루야.”

엄마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하루를 불렀다.

다행이다.

이름이 불렸다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저런 여자도 엄마라고 사랑을 갈구하게 되지 않아서.

하루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말했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창피하고 매정한 엄마라서 정말 미안했다고.

어린 나이에 하루를 낳았는데, 남편이 사고로 죽어버렸다.

능력도 별로 없는 여자 혼자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것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그러던 때에 한 남자가 다가왔고, 그가 베푸는 사랑과 물질적 지원이 몹시도 감사하고 절박했다.

그의 애정을 잃는 순간, 또다시 그 고통스러운 삶으로 돌아갈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모르는 척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하루를 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그 남자가 있기에, 하루도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루의 엄마는 그렇게, 하루가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네가 떠나고 나서……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에는 많이 원망했어. 못난 엄마지. 난 정말 엄마 자격도 없어. 그런데…… 나이가 더 드니까 알겠더라. 내가 너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생각하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런 마음 따위, 하루는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딸을 버린 엄마의 마음 따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하루는 엄마가 끝까지 말하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이제 그 집을 나올 거야.”

“내가 이제 돈을 버니까.”

명준이 끼어들었다.

엄마에게 꽂혀 있던 하루의 시선이 명준에게로 향했다.

명준은 흠칫했지만 계속 말했다.

“미안해, 누나.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때 어려서, 아빠가 너무 무서웠어. 어떻게 지킬 힘도 없었고…… 그리고…… 맞아, 이기적이라서 나만 안 맞으면 된다는 생각이었어.”

하루가 그 집을 떠나고 나서, 아빠의 폭력이 엄마한테 향했단다.

“돈을 벌게 되면 그 집을 나올 생각뿐이었어. 엄마만 놔두고 나올 수 없으니까,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이제…… 나는 직장도 생겼고, 엄마를 데리고 나올 수 있어.”

“이혼을 할 거야. 그 전에…… 너에게 꼭 사과를 하고 싶어서…….”

“엄마.”

하루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엄마와 명준이 입을 다물고 하루를 응시했다.

저들의 눈에 담긴 건 뭘까?

용서를 해줄 거란 기대?

하루가 피식 웃었다.

“참 웃기네요.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하루의 입가에 서렸던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그 집을 나오고 나서, 나는 때때로 생각했어요. 아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때때로가 아니라, 정말 자주 생각했어요. 엄마가 나를 찾아오는 날을.”

“…….”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엄마를 뭐라고 부를까? 아줌마? 저기요? 그런 식으로 부를까? 엄마라는 말은 도저히 안 나올 것 같은데, 그 지독한 여자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대체 그 여자를 뭐라고 부르게 될까? 그런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하루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무렇지도 않네요. 엄마. 엄마라고 불러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