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세상에서 제일 예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사무실에 들어간 하루는, 낙성의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야, 조희정.”
희정이었다.
낙성이 놀란 표정으로 하루를 쳐다봤다.
“아는 분이셔?”
“네. 선배 말이 맞았어요. 진상이에요.”
“내가 뭘?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구만.”
희정이 투덜거렸다.
“바쁘다고 하는데도 굳이 날 불러낸 게 진상이지, 뭐니?”
“그런 건 됐으니까 얼른 와서 좀 앉아 봐. 할 이야기가 있어.”
“참나.”
어쨌든 왔으니 얘기나 들어보기로 했다.
하루가 낙성의 옆에 앉자, 희정이 낙성을 돌아봤다.
“뭐해요?”
“예?”
“자리 비켜주지 않고.”
“아, 예. 죄송합니다. 하루야, 난 그럼 저기 들어가 있을게.”
낙성이 얼른 일어나 다용도실로 향했다.
“넌 정말 뻔뻔하다. 저 선배, 저렇게 보여도 여기 사장…….”
“하루야. 여기는 가족과의 이별은 대신 안 해주니?”
희정이 하루의 말을 끊었다.
하루는 입을 다물고 희정을 응시했다.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글픈 미소가, 희정의 입가에 묻어 있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데, 입술만 간신히 움직여 만들어낸 미소.
저런 미소를, 하루는 알고 있었다.
한 때, 하루가 자주 짓던 표정이니까.
“무슨 일이야?”
“이별을 하고 싶어. 가족이랑.”
“……나도 그거 못 했는걸.”
“너는 한 거 아냐? 훌륭하게 가족들을 등지고 그 집에서 나왔잖아.”
희정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루는 쓰게 웃었다.
“몸이 벗어난다고 전부 벗어난 게 아니더라. 내 몸은 이곳에 있는데, 때때로 내 생각이 그곳에 머물러. 무서운 일을 당하면서도 한마디도 못 했던 약해빠진 계집아이.”
“…….”
“사고를 당하면서 기억이 조각났고, 그중에 몇 개가 사라졌대. 간혹 그 기억이 화살처럼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그중에 좋은 게 하나도 없어.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기억이 나서 나를 다시 그 집으로 데려가.”
“우현이 오빠가 있는데도?”
“응, 그런데도. 우현 오빠랑 같이 있으면 괜찮은데, 혼자 있을 땐 괜찮지가 않아. 그래서 오빠를 자꾸자꾸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런데도 정신을 차려보면 난 그곳에 있어.”
하루는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나도 이별하고 싶다, 정말.”
“…….”
“그런데 넌 왜 갑자기?”
“차였거든.”
“차여? 누구한테?”
“도경 씨한테.”
“아…….”
그동안 명지 일도 있고, 회사 일도 있어서 희정과 도경의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언제?”
희정이 말한 날짜는, 벚꽃놀이를 하러 부산에 가기 전이었다.
부산에서 도경을 만났지만, 도경은 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응. 그런 일도 있더라고.”
희정의 음성에 아픔이 묻어 있었다.
“나는 있지, 한 번도 차인 적이 없어. 그 대단한 강우현도, 내가 찼잖아.”
“응, 네가 찼지.”
“참 이상해. 도경 씨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둘이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낸 적도 없고,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그런데 도경 씨를 처음 만날 날, 두 번째로 만난 날,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들이 날 너무 아프게 해.”
어떤 느낌인지, 하루는 알 것 같았다.
“도경 씨는 나랑 자기가 어울리지 않는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대. 너랑 우현 오빠 같은 일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서 특별한 거래. 그래서 우리는 안 된대.”
“…….”
“슬픈 건, 정말 너무 슬픈 건, 그런 말을 듣는데 반박할 수가 없다는 거였어. 혹여 도경 씨가 나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도경 씨 손을 잡고 우리 집에 가는 순간 도경 씨가 당할 일은 뻔하니까.”
나는 그런 모습 보고 싶지 않거든, 이라고, 희정은 작게 덧붙였다.
“가족과 이별을 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 그 집에서 나오면 나는 뭘 먹고 살지? 뭘 입고 살지? 어디서 살지?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나, 되게 속물이지? 멋지게 사랑을 위해 돈을 포기하면 좋은데, 그걸 못 하겠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중요한 문제니까.”
“너라면 어쩌겠어?”
“나는 없이 사는 게 익숙해, 희정아. 하지만 넌 아니잖아. 누구나 익숙하지 못한 일을 앞두면 걱정이 되고 무서운 거야.”
“넌 정말 착해.”
“안 착해.”
“착해. 내가 너한테 그렇게 몹쓸 짓을 했는데도, 지금 그렇게 걱정스럽게 날 봐주잖아. 너 같은 애는 처음이야, 난.”
“…….”
“넌 정말 잘 자랐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갑자기 그렇게 칭찬해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야.”
하루는 그렇게만 말했다.
희정은 울지 않았다.
눈물이 가득한데도 울지 않아서, 그게 더 슬프고 안타까웠다.
희정이 어깨가 움직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냥 누구랑이든 얘기가 하고 싶었어. 나, 이런 얘기를 할 만한 친구가 없거든. 내 친구들은 내가 이런 얘기 하면 앞에서는 위로해줘도 뒤에 가면 꼴좋다고 비웃을 거야.”
“설마…….”
“네가 몰라서 그래. 뭐, 끼리끼리 논다고 하니, 내가 그런 애라 내 주위 애들도 다 그런 거겠지.”
“네가 그렇게 자기비하 하는 거, 진짜 안 어울려.”
희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넌 어때? 우현 오빠랑 잘 지내니? 유명지 그 기집애 건은 잘 해결됐고?”
“응, 잘 해결됐어. 그 여자 없어져서 이제 둘이 데이트할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제대로 만날 시간도 없네.”
“때려치워. 우현이 오빠가 있는데 굳이 그렇게 힘들게 일할 필요 없잖아.”
“에이, 그럴 수는 없지. 그리고 일 관두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안 돼.”
“이래서 없는 것들은.”
희정이 무시하는 내뱉는 말이, 전처럼 기분 나쁘지 않았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희정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하루는 몸을 앞으로 굽히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희정아, 나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혹시 너…… 우현 오빠랑 사귈 때…… 했어?”
처음엔 무슨 말이냐는 듯 멍하던 희정이, 그 의미를 깨달았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미쳤어!”
희정이 버럭 외쳤다.
“아, 역시 이런 걸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 사생활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우현이 오빠 몰라서 그래? 나, 그 오빠랑 손도 못 잡았어.”
“응?”
“그 오빠랑 했냐니. 그 오빠, 자기 몸에 손도 못 대게 했어. 얼마나 깔끔 떠는데.”
역시 우현의 전 여친들이 사귄 남자는, 하루가 사귀고 있는 그 남자가 아닌 것 같았다.
하루는 우현이 자기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광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하루와 찰싹 달라붙어 있으니까.
“나뿐만이 아냐. 딴 여자들도 마찬가지일걸. 뭔 수를 써도 안 넘어와.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어.”
“아,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아니, 그게…….”
하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내가…… 참지 않아도 된다고 했거든.”
“요거, 요거. 순진하게 생겨서 엄청 밀어붙이네.”
“그치? 엄청 밀어붙이는 거지?”
“뭐, 네 수준에서는 엄청 밀어붙이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용기가 필요하대.”
“용기? 웬 용기?”
“몰라. 나랑 하려면 용기를 내야 한대.”
“잉?”
희정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루도 우현이 그 말을 했을 때, 희정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었다.
“뭘 그걸 하는데 용기가 필요해? 우리 지금 같은 얘기하고 있는 거 맞지? 나는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뭐, 전쟁이라든가, 그런 소리하고 있는 거 아니지?”
“응, 아냐. 우리는 지금 같은 주제로 나불거리고 있어.”
“그런데 웬 용기? 너네 키스는 했어?”
하루가 얼굴을 붉혔다.
“응, 했지.”
“자주 해? 많이 해? 어떤 분위기야? 뽀뽀만 가지고 키스했다고 하는 거 아냐?”
“아냐. 진짜 제대로 완전 뜨겁게 했어.”
“단둘이 있을 때도?”
“그럼 키스를 단둘이 있을 때 하지, 사람들 불러모아놓고 하겠어?”
“그런 취향인 사람들 있잖아. 아무튼 그런데도 널 거부했다고?”
“그치, 나 거부당한 거지?”
“이상하네. 그 오빠, 널 진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진짜 좋아하는 여자가 하자고 하는데도 거부를 한단 말이야?”
“아니, 하자고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고.”
“안 참아도 된다는 게 그 말이지, 뭐야. 와, 그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희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갑자기 하루와 시선을 맞췄다.
“그거 아냐?”
“그거?”
“고.”
“고?”
“자.”
“……설마.”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그렇게 여자가 많았는데도 손을 안 댄 거지.”
“……그런 건가?”
“그 인간, 나이가 서른이 넘었어. 그 나이에 여자 한 명 안 건드린 게 말이 돼? 그런데 그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말이 되기도 해.”
“…….”
“그래, 생각해 보면 그 인간, 그 드러운 성질머리 빼고는 다 완벽해. 너무 완벽하단 말이야. 하나쯤은 못난 부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데 알고 보니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이 문제였다, 그 말이지.”
희정은 이미 그쪽으로 마음이 굳힌 듯했다.
“이 얘기 그만하자. 내 남자의 기능에 대해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지가 먼저 말 꺼내놓고 지켜주는 척은.”
희정과 하루는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사무실에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용도실에 있던 낙성은 생각했다.
‘여자들은 정말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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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희정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집에 돌아가던 하루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한 남자가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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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혀니 오빠’에 대해 알아보면서, 하루의 가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조사했다.
그동안 우현이 조사한 것은 과거였는데, 이번에는 현재였다.
하루의 가족이 하루와 접촉을 하려고 한다면, 그전에 막아야 했다.
그리고 하루의 어린 날을 고통스럽게 만든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하루 앞에 나타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흐음.”
우현은 최근에 받은 보고서를 훑어보다가 차갑게 웃었다.
“이 인간.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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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간, 주말에도 출근할 정도로 바빴던 일이 간신히 끝났다.
아주 오랜만에 하루와 우현은 주말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만나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며, 우현이 물었다.
“우리, 뭐할까?”
우리, 뭐할까?
별 거 아닌 그 질문이 유독 설렜다.
우리.
그와 내가 한 데 묶인 그 단어는 들을 때마다 좋았다.
뭘 해야 제대로 데이트를 했다는 말을 들을지 고민하던 하루의 눈에, 한 커플의 모습이 들어왔다.
알콩달콩 반찬을 놔주는 커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하루가 말했다.
“오빠, 우리 커플 티 입자.”
“커플 티?”
“네, 저거 봐요. 예쁘죠?”
하루가 자기가 보고 있던 커플을 가리켰다.
슬쩍 돌아본 우현이 다시 하루를 보며 말했다.
“네가 더 예뻐.”
“어휴, 이 남자. 나한테 너무 푹 빠지셨네.”
“조금 덜 빠져도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빠져 있어.”
요새 우현은 하루와 비슷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의 말투가 변해가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근처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1층을 둘러보고, 2층도 둘러보고, 3층에 있는 캐주얼 코너에서 한 브랜드 숍에 들어갔다.
브랜드의 점원이 ‘어머, 어머.’ 하는 표정으로 우현을 쳐다봤다.
우현과 함께 다니면 늘 이런 시선을 받아서, 이제는 하루도 익숙해졌다.
“이거 어때요?”
하루가 맨투맨 티 하나를 가리켰다.
연보라색 셔츠였다.
“예쁘네. 너랑 잘 어울리겠다.”
“음, 그럼 이건요?”
하루가 노란색 셔츠를 가리켰다.
“예쁘네. 너랑 정말 잘 어울리겠다.”
“아, 이건 어때요?”
하루가 분홍색 맨투맨 티를 가리켰다.
“오, 그거 예쁘다. 너랑 잘 어울리겠어.”
“오빠. 제대로 좀 봐줄래요?”
“제대로 보고 있는데. 이보다 더?”
“다 잘 어울리겠대.”
“다 잘 어울리지, 그럼. 너랑 안 어울리는 옷이 있을 수 있어?”
우현의 말에, 뒤에서 듣고 있던 점원이 닭살 돋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는 그런 표정들을 보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우현은 누가 듣든 말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애정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우현이 하루의 양쪽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옷이 널 입는 거야.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한, 넌 뭘 입든 완벽해.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완벽해.”
“……오빠, 그거 알아요?”
“뭐?”
“요새 오빠 하는 행동, 가끔 도경이 같을 때가 있어요. 막 그렇게 되게 진지한 척하면서 이상한 소리하는 거.”
우현이 당황한 듯 하더니 얼른 하루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이걸로 하자. 이거 예쁘네.”
우현은 분홍색 맨투맨 티를 꺼내 하루의 앞에 대보며 말을 돌렸다.
‘예리하긴.’
하루가 이렇게 예리할 줄은 몰랐다.
사실 우현은 요새 ‘혀니 오빠’의 일로, 도경과 자주 만나고 있었다.
하루가 야근 때문에 바쁜 기간에, 도경과 거의 매일 만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이렇게 빨리 도경이 옮았을 줄이야.
‘전염성이 강한 남자군, 윤도경 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분홍색 맨투맨 티 두 벌을 샀다.
백화점에서 나올 때, 우현과 하루는 똑같은 분홍색 티셔츠에, 똑같은 청바지, 똑같은 운동화를 신고, 손을 꼭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