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키스. 뜨겁게.
식품생산본부 문을 열자마자 그가 눈에 들어왔다.
우현은 자신의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손바닥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그림처럼 예뻐서, 하루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우현의 시선이 하루에게로 향했고, 하루를 담는 순간 그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치 꽃이 피는 듯 번지는 미소를 보며, 하루는 그의 애정을 실감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어주는 사람.
하루가 존재할 뿐인데도 웃어주는 사람.
우현은 하루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이제 우현을 오롯이 신뢰했다.
내가 그 어떤 모습이라도, 그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에게 달려가며 두 팔을 벌렸다.
우현은 앉아서 하루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 멈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이 하루의 가슴에 폭 파묻혔다.
하루는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희미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샴푸 향기와 그의 체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뜨거운 포옹인데.”
우현이 중얼거렸다.
“이왕 할 거라면 오빠가 깜짝 놀랄 정도로 뜨겁게 하는 게 좋죠.”
우현이 작게 웃으며 하루를 올려다봤다.
안긴 채로 고개만 든 우현이 어린 소년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이렇게 보니까 좋다.”
“응, 나도요.”
“내 애인은 너무 바빠서 날 너무 외롭게 해.”
그의 말에, 이별 의뢰의 사연을 떠올렸다.
[제 남친은 저보다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이해하려고 했어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멋있기도 했고요.
그런데 저는 항상 두 번째더라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일 때문에 계속 휴대폰을 잡고 있는 걸 보면, 너무 외로워요.
아무도 사귀지 않을 때보다 더 외로워요.]
하지만 하루는 지금 우현의 말이 그저 칭얼거림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루는 두 손으로 우현의 볼을 감싸고, 그의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는 언제 이렇게 이 남자의 마음을 믿게 된 걸까?
나는 왜 이 남자가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걸까?
사랑을 하면 때때로 ‘왜?’라는 의문이 떠오른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의 엄마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 남자는 왜 날 이토록 사랑해주는 거지?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우현이 말해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언젠가 우현이 준비가 되면 말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짝 떨어져서 보니,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뽀뽀도 해, 라는 그의 표정이 말도 못 하게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하루는 키득거리며 그의 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만 하고 떨어지자, 우현이 눈을 뜨고 불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오랜만인데 고작 이 정도 뽀뽀로 되겠어?”
“어제도 했잖아요.”
“그러니까 오랜만이지.”
그렇게 말하며, 우현은 하루의 허리를 번쩍 들어 자신의 위에 앉혔다.
“우왓!”
그의 힘에 놀라 작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허벅지 위에 하루를 앉힌 우현이, 두 팔로 하루의 허리를 감쌌다.
“이하루 씨가 첫 연애라 모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애인이 내조를 해주면 그에 걸맞은 칭찬을 해줘야 해.”
우현이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강우현 씨가 만족할 만한 칭찬은 어떤 거죠?”
“키스. 뜨겁게.”
그리고 우현은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
우현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걸.
지금 이 광경을 보면 다들 심장이 멎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우현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댔다가 떼어냈다.
우현이 눈을 뜨고 불만족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키스. 뜨겁게.”
그래서 하루는 또 가볍게 입 맞췄고.
“키스. 뜨겁게.”
우현은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안 되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하루를 책상 위에 앉혔다.
“내 여자는 정말 짓궂어.”
우현이 책상을 한 손으로 짚고, 엄지와 검지로 하루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연애가 처음이라, 뜨거운 키스가 뭔지 몰라서요.”
하루의 말에 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제대로 알려줘야겠네.”
우현의 입술이 하루의 입술을 덮쳤다.
순식간에 하루의 입술을 머금은 우현이 강하게 하루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턱을 잡고 있던 손으로 하루의 머리 뒤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는 격렬하게 하루를 탐했고, 하루를 숨도 쉬지 못하고 그를 따라가기 위해 애썼다.
지금까지도 늘 뜨거운 키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열기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루는 의식하지 못한 채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단단히 밀착한 가슴에 그의 체온이 전해졌다.
두근, 두근, 뛰는 심장 박동이 겹쳐졌다.
이곳이 회사라는 사실도 잊고, 그의 입술과 체온에 빠져들었다.
지독히도 뜨거운 그와의 입맞춤이 끝나자, 하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촉촉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예리한 눈매에 갇힌 그의 검은 눈동자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루의 얼굴이 비쳤다.
폭풍 같은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깜빡깜빡 하는 하루의 모습에, 우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현은 엄지로 그녀의 젖은 입술을 살며시 닦아내며 속삭였다.
“이런 게 뜨거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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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간 것 치고는 늦게 들어왔지만, 아무도 하루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나희 역시 하루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하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집중이 되지 않고 우현과 나눈 키스가 자꾸 떠올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우현의 모습이 지워지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밤 10시쯤 되어, 본부장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들어들 갑시다. 오늘 안에는 해결이 안 되겠네.”
“네, 알겠습니다.”
“으아, 집에 가자.”
다들 신음 섞인 소리를 내며 퇴근 준비를 했다.
“하 대리는 퇴근 안 해?”
가방을 챙기던 나희가 계속 일을 하는 하루에게 물었다.
“네, 전 조금 더 일하다가 퇴근하려고요.”
아까 우현이 같이 돌아가자고 했기 때문에, 하루는 다들 회사를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퇴근할 생각이었다.
나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하루를 응시하다가, 허리를 굽혀 하루에게 속삭였다.
“하 대리, 나 지금 하 대리한테 묻고 싶은 게 진짜 많거든? 그래도 묻지 않을게. 대신에 뭔가가 있으면, 우리 회사에서는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기야.”
역시 나희는 우현과 하루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루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희에게,
“언니! 저 사실요. 강우현 팀장님이랑 사귀고 있어요! 그 남자, 알려진 거랑 다르게 얼마나 다정다감하고 상냥한지 몰라요. 매일매일이 마법 같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
“조심히 가세요.”
나희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사무실에서 나갔다.
하루는 잠깐 더 시간을 보내다가, 우현에게 연락했다.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우현을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헤어지기 아쉬워서 차 안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래도 내리고 싶지 않아 꾸물꾸물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집에 들어와서 음료수 한잔할래요?”
“그거 좋지.”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
“응?”
“오늘 밤에는 내가 정말 못 참을 것 같거든.”
“뭘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겠어?”
하루가 얼굴을 붉혔다.
하루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못 참아도 돼요, 오빠.”
우현의 눈이 커졌다.
하루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수줍어서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번 말했다.
“못 참아도 괜찮아요.”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루에게 그것은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와 사귀기 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긴장됐다.
우현은 한참을 망설였다.
‘미치겠군.’
하루에게 모든 것을 밝히기 전에는, 하루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왕자 오빠야.
네가 힘들었던 그 때에, 너에게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 사람이야.
네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픈 기억을 남긴, 그 사람이 나야.
그 말을 했을 때에도, 하루가 이렇게 신뢰에 찬 눈으로 봐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참고, 참고, 또 꾹 참고 있는데.
못 참아도 된다니.
이런 말을 듣고도 거부하면 남자도 아냐, 라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아직 우현이 자신에게 남긴 상처를 모르고 있었다.
“참아야 할 것 같아, 하루야.”
우현은 자신의 손목을 쥔 하루의 손 위에, 다른 쪽 손을 겹치며 말했다.
“내가 용기가 생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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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당했다는 충격보다, ‘용기’라는 말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집에 돌아온 하루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용기가 생겨야 한다고?’
그게 용기까지 필요한 일인지는 꿈에도 몰랐다.
‘대체 왜? 왜 용기를 내야 하는 거지?’
그와 키스를 할 때마다, 그와의 스킨십이 짙어질 때마다, 그를 향한 마음이 더 단단해질 때마다, 하루는 그를 원했다.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우현 오빠는 안 그런 건가? 아니면…….’
하루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무섭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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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낙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는 사무실 밖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하루이틀사흘나흘, 너 요새 바쁜 거 아는데. 오늘 여기 좀 와야겠다.]
“왜요?”
[손님이 왔는데, 꼭 만나서 얘기를 해야겠대.]
“선배가 하면 안 돼요?”
[응, 네가 와야 한대.]
“나, 지금 퇴근하기 진짜 눈치 보이는데. 본부장님도 퇴근 안 하셨거든요.”
[그래, 진짜 눈치 보일 것 같긴 한데…… 진상일 것 같아.]
“예?”
[오늘 온 손님 말이야. 아무리 진상의 기미가 보여.]
“하아. 한번 상황 좀 볼게요.”
하루는 전화를 끊고 들어갔다.
사무실 안은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만 가득했다.
하루는 눈치를 보다가 본부장의 자리로 가서 작게 말했다.
“본부장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지금 퇴근하려는데…….”
“어? 몸이 안 좋아?”
하루가 속삭인 것이 무색하게, 본부장이 커다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직원들이 전부 이쪽을 쳐다봤다.
“네, 좀.”
“그래? 그럼 퇴근해야지. 우리 하 대리 아프다는데, 퇴근해야지!”
“하 대리, 아프면 얼른 들어가. 일이 문제야? 건강이 중요하지”
“그래, 맞아. 들어가, 얼른.”
하루는 부추기는 직원들에게 감동을 느꼈다.
다들 집에 가고 싶은 열망을 이룰 수 없으니, 하루만이라도 집에 보내주려는 저 배려.
하루는 꾸벅 감사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와 전철역으로 향했다.
‘대체 어떤 진상이기에……’
낙성은 수단이 좋은 사람이라서, 어지간한 진상은 다 상대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런 낙성이 진상의 기미가 보인다며 도움을 요청하다니.
‘그런 사람을 내가 상대할 수 있으려나?’
하루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홀로서기 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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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
명준은 서성이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명준은 저녁이면 이 건물 앞에 와 있었다.
여기가 쇼핑몰 ‘하루살이’의 주소지로 나오고, 하루와 미영이 아직도 친구라면 한 번쯤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루를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루가 떠난 후, 아버지는 하루를 배은망덕하다고 욕했고, 그게 전부 어머니가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하루에게 쏟아지던 폭력은 그대로 어머니에게 향했다.
명준은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다.
그러니 하루를 만나야 한다.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던 명준의 눈에, 건물로 들어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거지만, 한눈에 알아봤다.
명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하루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