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참 좋아합니다.
도경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우현의 집에 남았다.
우현은 도경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도경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자 형.”
“도경 씨, 제발…….”
“하루 가족이 하루의 연락처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네?”
도경은 설날에 있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내가 물어볼 수도 없고, 하루한테 말하면 하루가 불안에 떨 것 같고.”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만 말해도 우현은 도경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들었다.
“없애버립시다. 그 사람들.”
“저기, 왕자 형. 왕자 형이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거든요.”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인데요.”
“아니, 범죄는 좀…… 하루 생각도 하셔야죠. 왕자 형 잡혀 들어가면 하루, 어떻게 삽니까?”
“범죄를 저지른 건 저쪽이 먼저고. 때로는 범죄를 저질러도 잡혀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그렇게 말하며, 우현이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거참 좋으시겠네요. 드러운 세상.”
도경이 툴툴거렸다.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도경 씨. 잡혀 들어갈 만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생각해봐야겠네요. 어떻게 해야 그 인간들이 하루 앞에 나타나지 않을지.”
+++
하루살이.
명준은 포털 사이트 상단에 뜬 광고를 클릭했다.
도경의 휴대폰에도 이 쇼핑몰의 어플이 깔려 있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냥 여자 옷 파는 데네. 도경이 형은 왜 여자 쇼핑몰 어플을 깔아둔 거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무심코 스크롤을 내리던 명준이 눈을 크게 떴다.
쇼핑몰 메인 가장 아래에 있는 쇼핑몰 정보.
주소, 사업자번호, 전화번호, 그리고.
‘김미영?’
계좌번호에 쓰인 이름.
김미영.
명준도 ‘김미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하루의 친구 중 한 명으로, 길 가다가 마주치면 기분 나쁜 듯 쏘아보고 지나가던 예쁜 누나였다.
미영과 도경도 친구였으니, 이 김미영은 명준이 아는 그 김미영일 것이다.
‘이 누나는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어.’
얘기 한번 해본 적 없는데도, 명준을 향해 늘 적의를 들어냈다.
어린 나이인데도 그 적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 누나한테 사는 곳을 물어봐야 알려주지 않을 거고.’
명준은 하루를 꼭 만나야만 했다.
‘이 누나랑 하루 누나, 아직도 친구겠지?’
명준은 휴대폰으로 하루살이의 주소를 검색했다.
+++
부산에는 기차를 타고 갔다.
마주 보는 좌석.
하루와 우현이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명지가 앉았다.
하루, 우현과 달리, 명지는 무척 들뜬 것 같았다.
“선글라스도 샀어요. 가방도 사고. 이거 예쁘죠?”
명지가 분홍색 가방을 들어 보이며 묻는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루는 앞으로 벌어진 일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과연 일이 계획대로 진행될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명지가 아무 짓도 안 하면 어떡하지?
혹시 일이 틀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면 어쩌지?
우현을 흘끗 돌아봤는데, 우현은 무심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현 오빠도 고민이 많겠지. 자기가 당할 일이니까.’
어떻게 보면 하루는 명지와 우현의 관계에서 제3자였다.
“개나리다.”
우현이 중얼거렸다.
“네?”
“개나리가 폈네. 봤어?”
우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조금 신난 표정이었다.
명지의 일로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개나리가 벚꽃보다 먼저 피더라고.”
“아, 네.”
“개나리.”
“…….”
“이런 개나리.”
“…….”
저건 욕인가?
우현의 시선이 다시 기차 창문 밖으로 향했다.
-왕자 오빠! 꽃 폈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노란색 꽃망울을 보며 외치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우현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너무 예쁘지? 여기 전부 다 노란색 꽃 핀다? 여기 꽃이 다 피면 꼭 카레를 뒤집어쓴 것 같아져. 그래서 봄에는 배가 고파.
카레라니.
개나리를 카레에 비교하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그 이후로, 우현은 꽃피는 봄이 오면 카레를 먹었다.
어느 날, 노란 개나리꽃이 잔뜩 피었을 때.
어린 하루는 두 팔을 벌리고 우현을 맞아주었다.
그 놀이터가 제 것이 아닌데도, 마치 제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우현은 그 어린 소녀를 위해, 뭐든 해주고 싶었다.
그저 꽃이 피었을 뿐인데도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는 소녀에게, 진짜로 세상을 주고 싶었다.
하루는 빙그레 웃는 우현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래, 우현 오빠가 즐거우면 되는 거지.’
+++
재현은 객차 밖 통로에서, 출입문을 통해 안쪽을 확인했다.
명지는 등을 돌리고 있고, 하루와 우현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였다.
‘왕자 오빠.’
며칠 전, 재현은 자신이 아주 어릴 적 하루를 본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후로 계속 그날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왜 그 일을 잊고 있었을까?’
잊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형에게, 나보다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걸.
나에게는 냉정한 나의 형이, 다른 존재에게만 다정하다는걸.
그래서 혼자 찾아간 파출소 벤치에 앉아 엉엉 울며, 그날 본 광경을 지워버렸던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형은 그때부터 하루를 위해서 살아온 건가?’
세상에 관심 없는 우현이 유독 힘을 얻으려고 노력한 이유.
가족을 싫어하면서도 연을 끊지 않고, 강 회장의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했던 이유.
그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루는 알고 있나? 그때 그 왕자 오빠가 우현이 형이라는걸?’
알고 있으리라.
벌써 말했겠지.
그리하여 운명이라 생각했겠지.
시선이 느껴져서 정신을 차렸다.
도경이 재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생각을 읽어낼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아, 난 지금 혼자 있는 게 아니지.’
하마터면 이 마음을 들킬 뻔했다.
“걱정이 많이 되시나 봅니다.”
도경이 말했다.
다행이다.
이 감정이 그저 ‘걱정’으로만 보여서.
“예, 걱정이 되네요. 이런 건 소설로나 써봤지, 실제로 뛰어들어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괜찮을 거예요. 재현 씨가 준비 많이 했잖아요.”
“네, 그랬죠.”
“형을 참 좋아하나 봅니다.”
왜일까?
그 말이 ‘하루를 참 좋아하나 봅니다.’로 들리는 이유는.
재현은 도경의 눈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네, 좋아합니다.”
형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하루도.
제가 참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재현은 덧붙였다.
“하나뿐인 형이니까요.”
+++
꽃을 보면서도 즐길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을 가릴 정도로 수북한 분홍 솜사탕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걸 보며 웃을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루는 점점 더 긴장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고,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위안을 얻기 위해 뒤를 돌아봤지만, 재현과 도경은 보이지 않았다.
인파에 섞인 걸까, 아니면 우리를 못 따라잡은 걸까?
자꾸만 걱정이 수북, 수북 쌓이는데.
“여기 좋군.”
우현이 하루의 어깨를 감쌌다.
“셀카나 찍지.”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아! 뭐야, 치사하게! 저도 같이 찍어요!”
명지가 끼어들었다.
우현이 다시 휴대폰을 아래로 내렸다.
“왜요? 안 찍어요?”
둘의 앞으로 끼어들었던 명지가 왜 그러냐는 듯 두 사람을 돌아봤다.
“불청객이 끼어들어서.”
우현이 딱딱하게 말했다.
명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명지의 행동에 하루는 감탄했다.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지?’
명지라면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은 지독히도 느리게 흘러갔다.
하루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아, 맞다.”
명지가 생각났다는 듯 두 사람을 돌아본 건, 오후 4시 경이었다.
“저, 부산에 와서 잠깐 만날 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 좀 보고 올게요.”
우현과 하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은 같이 먹을 거니까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알겠죠? 그럼 완전 치사한 거예요.”
그동안 매번 우현과 하루의 데이트에 낀 명지는, 이제 완벽하게 하루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새삼 소름이 끼쳤다.
명지가 손을 크게 흔들고 휙 돌아서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명지가 사라진 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명지가 다시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하루가 입을 열었다.
“갔네요.”
“그러게.”
“오빠, 너무 긴장돼요.”
하루가 우현을 올려다봤다.
우현이 빙그레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죠? 난 이런 거 처음이거든요.”
“재현이도 있고, 도경 씨도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렇겠죠?”
“미안하다, 하루야.”
갑자기 우현이 사과했다.
“네? 왜요?”
“괜히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하게 되고.”
“에이, 아니에요. 이게 왜 오빠 때문이에요? 유명지가 이상한 거지.”
“내가 아니었으면 휘말리지도 않았을 텐데.”
하루는 그의 좁아진 미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빠, 그거 알아요? 사람들은 오빠를 되게 냉정하고, 무섭고, 오만한 사람이라고들 생각하는데. 사실 오빠는 되게 따뜻하고, 안 무섭고, 자기 탓을 되게 많이 하는 사람이야.”
“하지만 이건 정말 내 탓이니까.”
“오빠 탓 아니에요. 미영이나 은서였으면, 그리고 도경이었으면 이럴 때 자기 탓 안 하거든요. 다 유명지 탓이라고, 그 또라이가 내 인생에 들어온 게 문제라고, 유명지 탓만 하겠죠.”
우현은 은서와 미영을 떠올리는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루는 팔을 쭉 뻗어, 그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오빠가 이렇게 자기 탓을 하니까 가족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거라고, 하루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도 언젠가 오빠가 그 진실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지금 오빠가 보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을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루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대신 그의 손에 깍지를 끼고 속삭였다.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 어릴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러니까 오빠 탓 하지 마세요.”
+++
명지가 다시 돌아온 건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셋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해변을 걸으며 밤바다를 구경했다.
하루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렸지만, 명지는 별말이 없었다.
‘역시 안 하려는 건가?’
재현은 오늘 명지가 무슨 짓을 할 거라고 했다.
하루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짓.
‘그래. 아무리 유명지라도 그런 짓까지는 안 하겠지. 설마…….’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루는 그냥 명지를 개념 없고 뻔뻔한 철면피 스토커 정도로만 생각하고 싶었다.
“늦었군. 슬슬 들어갈까?”
우현도 명지가 별일 안 할 거라 생각했는지, 하루에게 물었다.
“벌써요?”
대답을 한 건, 명지였다.
“모처럼 부산까지 왔는데 벌써 들어가기 너무 아쉽다.”
마음을 놓고 있던 하루는 다시 긴장하며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은 명지를 향해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우와, 포커페이스. 대박.’
우현은 어떻게 저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는 걸까?
나는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은 못 하겠는데.
하루는 평온한 척하기 위해 애쓰며 명지를 돌아봤다.
“늦었는데 들어가서 쉬어야죠. 내일은 서울 올라가야 하니까.”
마음과 달리 국어책을 읽는 듯 뻣뻣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망했어! 난 연기를 못하나 봐! 유명지가 눈치챘을 거야!’
하지만 명지는 자기 계획에 푹 빠져, 하루의 말투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부산이잖아요. 부산 진짜 오랜만이거든요. 우리, 노래방에 가서 놀아요. 다들, 노래 부르는 거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해.”
우현이 대답했다.
명지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이면, 명지가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 왜요? 그러지 말고요. 서울에서는 이렇게 같이 놀기도 힘든데. 노래방 가서 술도 좀 마시고 노래도 좀 부르고, 진탕 취해서 들어가요. 대신, 오늘 밤엔 두 분만의 시간을 드릴게요. 응?”
우현이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도 우현과 눈을 맞췄다.
명지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다시 명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1시간 정도만 더 놀다 들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