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남자의 은밀한 하루-98화 (98/119)

#(98)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하루의 목소리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 건 순식간이었다.

‘하루한테는 말하지 말자.’

‘아직은 아무 일도 없으니까.’

‘일단 상황을 보자.’

미영의 옆에 앉은 하루는 야근을 하다가 왔는데도 즐거워 보였다.

“뭐 좋은 일 있어?”

미영이 넌지시 물었다.

“응, 나 설날에 진짜 재미있었어.”

하루는 신나서 설날에 우현의 가족들과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하루가 오면 항상 이렇게 분위기가 밝아진다.

하루의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수다를 떨었다.

“아, 나는 결혼하라고 난리야. 나이 서른인데 애인도 없냐면서.”

“우리는 친척들이 그래. 우리 부모님은 늦게 결혼하라는데, 이모들이 얼마나 난리인지. 자기 자식들이나 신경 쓸 것이지.”

나이 서른이 되면 으레 하게 되는 한풀이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 수다를 떨다가, 다들 자리를 파하자고 일어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택시를 잡아 하루를 태워 보내고 나서, 미영이 말했다.

“우리, 한잔 더 해야지.”

“응.”

그들은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비장한 표정으로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어떡할 거야?”

미영이 도경에게 물었다.

“어쩔까? 내가 하루 동생 만나볼까?”

“만나서 뭐라고 하게? 하루 괴롭히지 말라고 하게?”

“아니, 일단 내 폰에서 번호 따갔냐고 물어봐야지.”

“걔가 솔직하게 말할까?”

“안 하겠지.”

“그럼 그다음엔 어쩌게?”

“때릴까?”

“아서라. 그런 새끼 때리고 감방 갈 일 있냐?”

미영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일단은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은서가 말했다.

“아직 아무 일도 없잖아. 도경이가 중간에 들어가서 번호 다 못 땄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괜히 건드려봐야, 도경이가 하루랑 아직까지 연락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밖에 안 돼.”

“하긴, 그건 그래.”

“오늘 하루도 별말 없는 걸로 봐선 하루 번호까지는 못 따갔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 하루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괜히 그런 얘기하면 불안해할 거야.”

미영이 덧붙였다.

도경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자신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있던 도경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다들 ‘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도경의 휴대폰을 쳐다봤다.

[조희정]

희정은 아직 별명을 붙일 관계가 아니라서, 그녀의 이름이 본명으로 등록되어 있는 게 사달이었다.

“조희정? 이거 그 조희정이야?”

“윤도경, 이거 그 조희정 맞아?”

아니나 다를까.

희정에게 당한 것이 있는 두 여자의 눈이 마왕처럼 불타올랐다.

“야, 왜 너한테 그 기집애 번호가 있어?”

“그 기집애가 왜 이 시간에 너한테 전화하는데? 이거 뭐야?”

무섭다.

도경은 이 두 친구가 너무 무서웠다.

“하하하하.”

어색하게 웃어주고 휴대폰을 들고 일어나려는데, 은서가 도경의 팔을 꽉 잡았다.

“가긴 어딜 가? 여기서 받아.”

“뭔 소리하는지 들어나 보자. 스피커폰으로 해.”

은서와 미영이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난 사생활도 없냐?”

“사생활이 어디 있어? 그 여자, 하루 괴롭히려고 우리까지 괴롭힌 여자야. 그런 여자랑 이 시간에 전화를 해?”

“하루가 잘해주라고 했단 말이야.”

“하루는 착하잖아!”

“나도 착해!”

“네가 뭘 착해? 넌 그냥 바보야. 그런 여자 전화를 왜 받아주는데?”

“아, 왜 나한테만 요리조림이야?”

“조리돌림이겠지. 모르는 단어는 그냥 쓰지를 말고 얼른 받아. 스피커폰으로.”

“에이씨.”

도경은 투덜거리며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아, 도경 씨. 밖이에요?]

희정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미영과 은서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네, 지금 친구들을 좀 만나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그냥 명절 잘 보냈나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네에. 잘 지냈습니다. 희정 씨도 잘 지냈어요?”

[네, 그럼요. 아, 도경 씨. 명절 선물을 좀 준비했는데요. 언제 시간 좀 되세요?]

“명절 선물을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요. 내가 원래 친구들한테는 명절 선물을 싹 돌려서요. 우리도 하루 덕분에 친구가 됐잖아요.]

도경은 미영와 은서의 눈치를 살폈다.

미영과 은서가 악귀 같은 표정으로 ‘치인구우?’라는 입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무섭다.

이 통화를 끝낸 후에 벌어질 일이 너무 무섭다.

하루가 보고 싶다.

“하하하.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일정 좀 보고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여기서 통화가 더 길어지면 친구들이 인간에서 벗어날 것만 같아, 도경은 서둘러 대화를 종료했다.

[알겠어요. 그럼 조만간 봐요. 난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네. 쉬세요.”

전화를 끊었다.

도경은 끊긴 휴대폰을 가만히 응시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

은서의 음성이 낮게 울려 퍼졌다.

“친구가 되셨어?”

미영의 음성이 도경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하루가…….”

“하루 핑계대지 마, 윤도경. 하루는 그럴 수 있어. 그래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그래, 윤도경! 걔가 우리한테 한 짓 잊었어? 걔, 하루 괴롭히려고 우리한테 그런 짓 한 거야!”

“그런 짓을 하는 기집애한테, 뭐? 친구?”

도경은 엄마한테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웅얼 말했다.

“그럼 어떡해? 하루가, 쟤가 나 좋아하는 것 같다면서 잘해주라는데.”

“뭐? 쟤가 널 좋아해?”

미영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아니, 그런데. 진짜 좋아하는 것 같긴 해.”

은서가 도경의 편을 들어주었다.

“야, 걔가 미쳤다고 이런 애를 좋아해? 딱 보니까 자존심 엄청 세 보이던데.”

“내가 뭐 어때서.”

도경이 소심하게 반박을 해보았지만.

“넌 빠져!”

“시끄러!”

두 여자의 호통만 들었다.

‘내 얘긴데 왜 난 빠지래.’

라는 말은 물론 할 수 없었다.

미영과 은서는 도경이 그런 여자를 사로잡을 만한 매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그저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뿐인데, 도경의 매력 여부에 대한 평가가 처절하게 파헤쳐졌다.

도경이는 이런 부분이 별로야.

그래도 이런 면은 괜찮잖아.

하지만 그게 저 별로인 점을 상쇄시키지는 못해. 저런 남자는 줘도 안 가져.

하긴. 나도 도경이는 좀.

도경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대화를 나누던 두 여자가, 결론을 내린 듯 도경을 돌아봤다.

“윤도경. 그 여자, 진짜로 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은서가 말했다.

“응. 가끔 신선한 것에 충격을 받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 여자한테 너는 신선한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영이 덧붙였다.

“어, 신랄한 평가, 진짜 고맙다. 니들 덕에 오늘 난 나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고,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렸어.”

“그런 건 됐고.”

그런 거라니.

내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넌? 너도 걔한테 관심 있어?”

은서의 질문에 도경이 미간을 좁혔다.

“아니. 하루가 잘해주라니까 잘해주기는 하는데…… 관심은 별로. 내 타입도 아니고.”

“오올. 윤도경 주제에 타입도 있어?”

“당연히 있지. 나는 타입이 아주 분명한 남자야.”

“네 타입은 뭔데?”

미영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얘들아, 나는.”

하지만 도경은 신중히 말을 골라, 진지하게 친구들을 쳐다봤다.

그제야 친구들도 도경의 타입에 흥미가 생겼는지 귀찮다는 기색을 버리고 도경에게 집중했다.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고 생각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타입을 말하랬더니, 웬 사랑 타령?

그런 친구들을 향해 도경이 가슴 앞에서 두 손으로 D자 모양을 만들어냈다.

“가슴이 시키는 거야, 사랑은.”

그제야 의미를 알아들은 두 여자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미친.”

“말을 말자, 진짜.”

+++

3월이 되면 설레는 이유는 곧 따스한 봄이 오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봄은 더 달콤했다.

4월에는 벚꽃과 튤립, 5월에는 장미.

각종 꽃 축제가 연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현과 하루도 조만간 꽃 구경을 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꽃구경 계획을 세우기 위한 오늘의 데이트에 동참한 두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둘은 더 행복했을 것이다.

“이 여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명지가 맞은편을 노려보며 물었다.

명지의 맞은편에는 희정이 앉아 있었다.

설날에 그런 일을 겪고 더는 우현을 귀찮게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명지는 여전했다.

2월에는 조용했지만 3월이 되니 다시 기승을 부렸다.

마치 모기 같다고, 하루는 생각했다.

잠잠하다가 달려드는, 뿌리쳐도 뿌리쳐도 귀찮게 하는 모기.

“네가 미친년이니까요. 미친 인간이 날뛰어도 다들 모르는 척하는데, 나라도 여기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희정의 대답에 명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미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은데요. 남의 데이트에 끼는 거, 민망하지도 않아요?”

“어머, 웬일이야. 남의 데이트래. 하루야, 들었어? 이거 남의 데이트래. 그런데 미친년 씨. 너는 왜 여기서 그러고 있어요? 남의 데이트인데.”

호들갑을 떨던 희정이 표정을 싹 바꾸고 명지를 노려봤다.

명지는 그런 희정이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난요, 그쪽이랑 상황이 달라요. 우현 오빠한테 특별하거든요. 그쵸, 오빠?”

명지가 우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현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런 우현의 모습에 희정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오빠! 왜 대답을 안 해? 대답 해줘야지. 그래, 넌 특별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하게 미친년이다! 그렇게 말해줘야지!”

희정이 너무 날뛰어서일까?

우현과 하루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우현은 이제 명지에게 잡힌 약점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명지를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완전히 싹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우현과 하루는 이 부분에 대해 충분히 대화를 나눴고, 결론을 내렸다.

명지도 그만할 때 됐다.

-지금 오빠한테서 떼어낸다면, 나중에 또 어딘가에서 이런 짓을 하겠죠? 그건 좀 싫어요. 나는 권선징악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현과 하루는 명지가 제대로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희정이었다.

희정이 두 사람을 위해 나서주는 건 고마웠지만, 희정 때문에 명지가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분명 명지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놨을 텐데, 희정이 모든 걸 차단하고 있었다.

“조희정.”

안 되겠다 싶어서, 우현이 입을 열었다.

“너, 가라.”

명지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안 가.”

희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가. 날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마운데, 오늘은 가라.”

“오빠. 뭔가 오해하나 보다. 난 오빠를 도와줄 생각 없어. 오빠 따위는 아무래도 좋거든.”

신랄한 말에 우현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걱정되는 건 하루야. 얘, 착해빠져서 나까지 없으면 여기서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 같단 말이야.”

“하. 둘이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우리 엄청 친하거든. 절친이야, 절친. 그치, 하루야?”

희정이 하루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하루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유가 뭐든 희정은 하루를 도와주고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을 내칠 정도로, 하루의 마음은 모질지 못했다.

‘차라리 희정이한테 우리 계획을 말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명지가 입을 열었다.

“조희정 씨. 나, 그쪽에 대해 들은 게 있어요. 외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죠? 그런데 친가 쪽으로는 별 게 없다고…….”

아픈 곳을 찔린 희정의 눈썹이 꿈틀했다.

“돈은 좀 있는 졸부라서 세정 그룹 이름이라도 얻어 볼까 하는 것 같은데……. 알잖아요. 그런 간장종지 정도 되는 집안으로 세정 그룹에 비빌 수 없다는 거.”

“아하.”

희정이 웃었다.

“맞아. 조사 잘했네. 우리 집, 간장종지지. 그런데 사람이 쓰는 그릇이긴 하거든. 너네는 개밥 그릇으로도 못 쓸 집안이던데? 그 그릇에 세정이 가당키나 하겠어?”

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구 그릇이 더 단단하고 큰지에 대해 싸우는 두 여자를 지켜보다가, 우현과 하루는 서로 눈을 맞추고 키득거렸다.

“우린 그냥 꽃놀이 계획이나 세우죠.”

하루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 3월 말쯤에 아래쪽은 개화한다더라. 거기로 벚꽃 보러 갈까?”

“좋아요. 아래쪽이면 부산인가?”

“응. 부산 가본 적 있어?”

“대학 다닐 때 한 번이요. 해운대만 보고 왔어요.”

“그럼 이번에는…….”

“아, 진짜!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싸우는데!”

치열한 두 사람과 핑크빛 기류에 감싸인 두 사람.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우현과 하루를, 희정이 쏘아봤다.

“맞아요, 오빠. 저 여자 좀 어떻게 해봐요. 왜 자꾸 우리 노는 데 와서 저런데요?”

“우리 노는 데? 우현 오빠랑 하루가 왜 너한테 우리야?”

“아, 진짜 수준 안 맞아서.”

“수준이 안 맞는 건 너겠지? 너도 보는 눈이 있으면 알 텐데. 지금 네가 든 가방이랑 내가 든 가방, 뭐가 더 비쌀 것 같아?”

“졸부들은 그게 문제야. 돈이면 다 된다는, 그 저렴한 사고방식.”

“아, 그래. 난 저렴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데, 넌 그 저렴한 사고방식조차 못 가질 집구석이잖아. 부럽니? 이 저렴함이? 그래서 우현 오빠라도 잡으면 이 저렴함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아?”

또 싸움이 시작되려 했다.

이러다가는 영원히 넷이서 데이트를 하며 늙어가게 생겼다.

우현은 결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다음 주말에 다 같이 부산에 가자. 벚꽃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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