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런 가족
“정년 꽉 채우고 연금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죠. 이제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출퇴근이 힘듭니다. 하하하하.”
재미도 없는 말을 하면서 저렇게 웃는 것도 재주다.
도경은 불편한 기분으로 앉아,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지켜봤다.
“그런데 형님. 이번에 큰 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의 새아버지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 건?”
“네, 형님. 어렵게 구한 정보라서 여기저기 알리면 안 되기는 하는데, 형님은 워낙 저랑 친하시고 입도 무거우시니까.”
그러면서 하루의 새아버지는 어느 지역의 재개발 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루의 새아버지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빼돌린 정보로 재산을 축적한 건,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실이었다.
하루의 새아버지는 이번 재개발 건이 얼마나 큰 건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경은 별로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니었기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물 한 컵 마시고 나서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갈 생각이었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는데.
“도경아.”
하루 어머니가 도경을 불렀다.
도경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뒤를 돌아봤다.
“네, 아줌마.”
하루 어머니는 늘 그렇듯 힘이 없어 보이고 수척했다.
그 수척함이 오히려 하루 어머니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하루를 닮은 그 얼굴이, 도경은 몹시도 싫었다.
“아직 하루한테서는 연락이 없니?”
“네, 연락 끊긴 지 오래됐는데 이제 와서 연락하겠어요? 아줌마한테도 연락 안 하는데.”
“그래?”
하루 어머니는 도경과 마주칠 때마다 물었다.
-하루한테는 연락이 없니?
처음에는 후회가 되어서 딸을 찾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 어머니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저 집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하루 새아버지와 명준뿐.
어쩌면 하루에게 향하던 폭력이 하루 어머니에게로 향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하루 어머니가 이렇게 하루를 찾는 건, 자기 대신 맞아줄 사람이 필요해서라는 것이다.
오싹-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은 ‘어머니’라고 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때때로 이런 ‘어머니’도 있다.
내 삶을 위해 자식의 삶을 희생하게 만드는 어머니.
그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하루의 다른 친구들은 모를까? 하루가 그 애들이랑은 연락하고 지낼지도 모르잖니.”
하루의 다른 친구들.
하루 어머니는 하루에게 어떤 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다.
“제가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은 연락이 끊겨서요. 일찍 일을 시작했더니 친구들이랑 연락할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연이 끊기더라고요.”
“그렇구나.”
하루 어머니는 도경의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도경은 하루 어머니와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 본가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경아. 나가서 소주 좀 사 와라.”
거실에 있던 아버지의 주문이 반가웠다.
“네, 지금 다녀올게요. 저, 술 좀 사 올게요, 아줌마. 계세요.”
도경은 혹시라도 하루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할까 봐, 황급히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일부러 천천히 술을 고르고 시간을 때우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차려진 술상에 술을 내려놓다가, 명준이 안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갔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도경의 방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도경은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명준이 도경의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어? 아니…… 저기, 내 휴대폰 충전 좀 하려고.”
명준이 변명했다.
도경은 거칠게 휴대폰을 뺏었다.
“근데 내 폰은 네가 왜 들고 있어?”
“어? 형 게 여기 꽂혀 있어서. 형, 왜 이렇게 화를 내?”
명준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내 방에 누구 들어오는 거 싫어해. 나가.”
도경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자, 명준이 미안한 듯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명준이 나가자마자 문을 잠그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도경의 휴대폰은 집에서는 잠금이 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아, 진짜. 폰을 챙겼어야 했는데.’
도경은 집에 들어오면 휴대폰을 잘 들고 다니질 않는다.
그게 사달이었다.
‘설마 뭘 본 건 아니겠지?’
아무리 명준이라도 남의 휴대폰을 뒤지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다 별명이니까.’
도경은 친구들의 번호를 저장할 땐 별명을 사용했다.
하루는 얼마 전까지 [1]이었는데, 며칠 전에 낙성과 술을 마시다가 [못생긴 코끼리]로 바꿨다.
낙성이 계속 하루가 크리스마스 때 가지고 온 못생긴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바꾸기를 잘했다.
‘그래, 누가 못생긴 코끼리를 하루라고 생각하겠어? 그리고…… 쟤가 하루를 찾을 이유가 없잖아. 별일 아닐 거야. 진짜로 휴대폰 충전하러 들어온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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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와 재현, 강 전무.
우현과 강 회장, 김 여사.
이렇게 편이 갈라졌다.
“전 하루랑 같은 편을 하고 싶습니다.”
우현이 말했지만.
“운명이야, 형. 데덴찌의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
재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정 그룹 일가가 데덴찌로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팀 이름과 구호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강 전무가 제안했고.
“우리 팀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렇게 딱딱 끊어서 외치는 걸로 하죠.”
재현이 얼른 말했다.
“강 전무님…….”
우현이 한마디 하려다가.
“아버지예요, 오빠. 아빠, 라고 불러보세요.”
하루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바람에, 우현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강 전무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무슨 구호까지 정합니까?”
“신입 오티 때 다들 구호 정하고 하잖아. 게임의 기본이지.”
강 전무는 신입들이 구호 정해서 노는 게 부러웠었나 보다.
그리하여 우현의 팀도 구호를 정했다.
“요리보고 조리봐도 하루! 하루!”
라고 하자고 한 건, 김 여사였다.
“우현이는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하루만 보이잖니.”
옳은 말이었기에, 우현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하루가 있는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팀과 하루가 없는 ‘요리보고 조리봐도 하루! 하루!’ 팀이 윷놀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현의 팀이 잘 나갔다.
윷놀이를 해본 적이 없는 하루는, 윷을 던지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폈다.
하루가 게임의 방식을 익힌 두 번째 판부터는 판도가 바뀌었다.
하루의 팀이 큰 승리를 거뒀고, 작은 승리를 거뒀고, 또 큰 승리를 거뒀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땐, 더 긴장감 넘치는 게임을 위해 모은 10원짜리 동전이 하루의 팀 앞에 잔뜩 쌓여 있었다.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루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윷놀이 잘하더라.”
하루의 집 앞에서 차를 세운 우현이 말했다.
하루가 씩 웃었다.
“그럼요, 오빠. 전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하면서 살았거든요. 오빠 같은 온실 속 화초랑은 달라요.”
우현이 피식 웃었다.
“내가 온실 속 화초로 보여?”
“온실 속에도 벌레가 있을 수 있어요. 벌레 때문에 상처는 받았지만, 그래도 온실이 보호해주잖아요. 오빠 가족들, 정말 따뜻해요.”
“그래?”
다른 때라면 반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따뜻해요. 오빠, 난 이런 경험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
우현은 하루의 손을 잡았다.
“나도 그래.”
잠시 손을 잡고 정면을 응시한 채 조용히 흐르는 어둠을 지켜봤다.
문득 우현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원에서 회, 아니, 할아버지랑 무슨 얘기한 거야?”
“아아. 봄 얘기요.”
“봄?”
“응.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봄이 올 거래요. 쭉 봄일 거래요.”
“…….”
“그래서 난 이미 쭉 봄이라고 했어요.”
하루가 우현을 돌아봤다.
“오빠를 만난 후로, 나는 계속 봄이거든요.”
“나도 그래.”
“오빠. 나중에요. 우리 얘기해요. 할아버지랑 아버님이랑 어머님이랑 재현이랑. 다 같이 둘러앉아서 얘기해요.”
“무슨 얘기?”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우현은 알 것 같았지만 물었다.
“그 어떤 얘기라도요. 전부 괜찮을 거예요. 나는 오빠 옆에 있을 거고, 오빠는 내 옆에 있을 거니까. 우리는 쭉 봄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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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전무는 테라스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뜨거워진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라고! 우리 엄마란 말이야!
강 전무의 가슴을 때리던 작은 주먹이 생생했다.
단 한순간도 그때를 잊은 적이 없었다.
끌려가던 그 여자와 강 전무에게 잡혀 절규하던 어린 아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나는 엄마밖에 없어. 그리고 당신은 내 엄마를 뺏었어.
두 주먹을 쥐고 선언하던 아들의 모습이 선명했다.
증오에 찬 눈과 부들부들 떨리던 어깨도.
두 번 다시는 아버지라고 불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했다.
모든 진실을 밝히면, 어쩌면 우현은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실이 우현을 지금보다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강 전무도, 김 여사도, 강 회장도 미움 받는 쪽을 택했다.
그런데 오늘.
“여보.”
김 여사가 테라스에 나와 강 전무의 옆에 섰다.
강 전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가슴에 흘러넘치는 벅찬 무언가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강 전무는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중얼거렸다.
“들었어? 아버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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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다음 날.
도경의 휴대폰에 별명으로 저장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하루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젊은 남자였고,
“전화 잘못 거셨는데요.”
라고 대답하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뚝 끊어버렸다.
그리고 그 전화를 하루도 받았다.
발신번호제한으로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하루야?]
“네? 누구세요?”
[하루 전화 맞지?]
“그런데요. 누구세요?”
그러자 전화가 뚝 끊겼다.
하루는 미간을 좁히고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다시 걸려올 줄 알았는데 더 이상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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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가 끝난 다음 날.
하루 친구들은 연휴 뒤풀이를 하기 위해 모였다.
명절 연휴가 끝나고 모이는 건, 명절에 혼자 보냈을 하루를 위해 친구들이 만든 관례였다.
이제 하루는 명절에 혼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렇게 모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하루는?”
도경이 은서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야근이래. 걔네 회사 바쁜가 봐.”
“그래? 그럼 주말에 볼 걸 그랬네.”
“주말은 그 남자랑 같이 보낼걸. 이제 우리 하루는 연애하는 여자라고.”
“아, 그러네.”
도경이 웃으며 술을 시켰다.
“야, 그런데 있잖아. 나, 어제 이상한 전화 받았다?”
은서가 말했다.
“혹시 그거, 하루 찾는 전화 아냐?”
미영의 말에 도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경의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무섭게 째려봐?”
“무슨 말이냐니까? 무슨 전화를 받았는데?”
도경이 재촉했다.
도경의 과한 반응에, 은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별 거 아냐. 어제 전화 와서 받았더니 하루냐고 묻는 거야.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미안하다고도 안 하고 끊어버리더라고.”
“나도. 나도 그거 받았어.”
미영의 말에 은서의 눈이 커졌다.
“이런 젠장!”
도경이 전에 없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야, 뭔데? 너, 아는 거 있어?”
미영이 도경에게 물었다.
도경은 인상을 구겼다.
“이거 어쩌지?”
도경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가 내렸다.
“그 전화, 하루 동생인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들 그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이윽고 은서가 입을 열었다.
“하루 동생? 하루 동생이 왜?”
도경은 설날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내 폰에서 번호를 빼간 것 같아. 누가 하루인지 모르니까 다 걸어봤겠지. 내가 하루랑 연을 끊었다는 걸 믿지 않는 눈치였거든.”
“아니, 그런데…… 아니, 그게…… 아니, 왜? 왜 이제 와서?”
은서가 말문이 막히는 듯 더듬더듬 물었다.
“하루한테 뭐 해준 거 하나 없잖아. 그런데 왜? 왜 이제 와서 하루를 찾아? 그 사람들, 하루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미친 거 아냐? 왜 하루를 찾는데?”
은서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하루 엄마가 맞는 거 아냐?”
미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서가 돌아보자 미영이 말을 이었다.
“가정폭력 쓰는 사람들은 계속 써. 그 새끼, 하루한테 그러다가 하루가 없어지니까 하루 엄마를 때리는 거 아냐? 하루 동생은 그래도 지 핏줄이라고 안 때리고.”
“그런데 왜 그 동생이 하루를 찾느냐고.”
“그래도 지 엄마라고 보호하고 싶은가 보지. 하루가 있으면 지 엄마가 안 맞으니까.”
“아니, 잠깐. 하루는 걔 누나 아냐?”
“반만 누나잖아.”
“미친. 이런 가, 족 같은.”
미영과 은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욕설을 쏟아냈다.
도경은 미영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영의 말이 진실이라면, 너무 끔찍하고 잔혹하다고도 생각했다.
세상에는 그런 엄마도 있고, 그런 가족도 있다.
그때였다.
“어휴. 뭔 욕을 그렇게들 해? 무서워서 도망칠 뻔했네.”
하루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