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봄이 올 거야.
쫓겨났다.
명지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강 회장의 집을 노려봤다.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지금은 강 회장의 가족에게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알았다.
다만 우현의 가족이 그렇게까지 하루만 감싸고 돌 줄은 몰랐다.
‘왜 그렇게 그 여자를 감싸는 거야? 그 여자가 뭐라고?’
그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알게 된 건데, 하루는 별 거 없었다.
집안도 집안이지만, 하루 자체도 딱히 대단한 것이 없었다.
학벌도 별로고, 그나마 이룬 것은 세정에 입사했다는 것뿐.
세정 그룹쯤 되는 집안이면 그런 며느리가 눈에 찰 리 없는데,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된 듯 감싸고도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보다는 내가 낫잖아? 안 그래?’
김 여사의 냉정한 눈빛. 강 전무의 고함. 강 회장의 서늘한 말투.
그런 것들이 떠올라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우현과 달랐다.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눈도장은 찍었다.
오늘도 명지는 하루와 비슷해 보이도록 화장을 하고, 하루가 평소에 입는 것과 비슷한 옷차림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지금 강우현의 취향인 여자야.’
모든 것은 명지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만 저 집안사람들이 하루를 저렇게까지 감싸주는 건 계획에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여자라서 반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러다가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강우현이랑 이하루가 결혼할지도 몰라.’
그렇다면 좀 더 빨리 움직여야겠다.
‘두고 봐, 이하루.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
뒷마당에 있는 정원은 고즈넉했다.
겨울이라 꽃도, 나무도 시들어 있었고, 커다란 돌덩이로 주위를 둘러 만든 연못은 얼어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었다.
정원으로 향한 마루에 강 회장과 하루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참새가 없네요.”
침묵이 무거워, 하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겨울이라 그런가 보다. 여름에는 시끄러울 정도로 많이 오거든.”
강 회장이 대답했다.
하루는 이 상황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그 강 회장님과 둘이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 강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가족들과 우현이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강 회장이 이쪽을 돌아보는 느낌이 들어서 하루도 고개를 돌렸다.
강 회장이 옅게 미소 지었다.
“여름이 되면 할아버지랑 같이 모이를 주자꾸나.”
할아버지.
아까도 강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 단어는 하루의 가슴을 아프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그리고 따뜻하게도 했다.
하루는 ‘할아버지’를 허락받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동생인 명준의 것이었다.
하루에게는 없었다.
코끝이 찡해져서 코를 훌쩍거렸더니, 강 회장이 물었다.
“춥니?”
“네, 그런가 봐요.”
고작 할아버지라는 말에 감동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래, 많이 추웠지?”
강 회장이 걸치고 있던 두툼한 겉옷을 벗어 하루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겉옷은 강 회장의 체온으로 따뜻했다.
“이제 괜찮다, 하루야. 이제는 따뜻할 게야. 쭉 따뜻할 게야.”
왜일까?
강 회장의 말이 그저 이 겨울의 온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강 회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도경이가…… 제 이야기를 했나요?”
도경은 강 회장의 경호원이었다.
강 회장이 하루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제일 착하고, 제일 씩씩한 친구라고 자랑하더구나. 우리 손주 며느님한테 못되게 굴면 경호원 때려치울 거라고 협박하던데?”
강 회장의 장난스런 말에 하루는 웃었다.
강 회장은 그런 하루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하루야.”
“네, 회장님.”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 할아버지.”
강 회장의 미소가 깊어졌다.
강 회장은 하루의 머리에 살포시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보통의 할아버지들이 보통의 손녀에게 그러하듯, 그렇게 다정하게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괜찮다. 겨울이 지났으니 봄이 올 게야. 그리고 쭉 봄이겠지.”
하루는 고개를 숙였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일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응시하며, 하루는 대답했다.
“저는 지금도 봄이에요, 할아버지.”
꽃도 피지 못할 만큼 매섭던 추위를 뚫고 봄이 왔다.
우현을 만난 후, 하루는 쭉 봄이었다.
+++
명지를 쫓아낸 후, 거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 회장과 하루가 돌아오면 이 어색함이 풀릴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참새 사냥이라도 하는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우현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 김 여사가 명지에게 보인 태도는 그냥 나온 게 아닌 것 같았다.
김 여사는 누구에게나 상냥한 사람이니까.
아마 재현에게 언질을 들은 거겠지. 그래서 재현도 굳이 명지의 방문을 허락하라고 한 것이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김 여사는 우현과 하루를 도와주었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을 가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것도 하루 덕분일까?
하루가 있어서 남을 의심하고 경계하던 내 마음의 벽이 무뎌진 걸까?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이쪽을 보는 김 여사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김 여사는 우현을 볼 때마다 항상 저런 표정이었다.
걱정스럽고 미안하고 안쓰럽다는 표정.
“감사합니다.”
저도 모르게 말했다.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그냥 솔직한 감사 인사일 뿐이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를 표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김 여사는 당당하게 우현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고맙다니.”
하지만 김 여사는 당당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김 여사의 모습에, 우현이 더 당황했다.
“고맙다니, 우현아. 당연한 걸 가지고.”
늘 고고하고 우아한 김 여사가 우는 건 처음 봤다.
우현이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울지 않았는데.
“이런 건 당연한 거니까.”
얼굴을 가린 두 손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성에, 우현은 가슴이 찡해졌다.
“언제라도 얘기하렴. 언제라도 얘기해.”
+++
아무리 기다려도 하루와 강 회장이 들어오지 않아서, 결국 다들 일어나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나간 우현은 강 회장과 나란히 앉아 있는 하루를 발견했다.
그들이 오는 소리에 하루가 뒤를 돌아봤다.
하루의 눈가도, 코끝도 빨갰다.
하루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강 회장이 모진 소리라도 한 걸까?
“울었어?”
“아니요.”
하루가 손등으로 코끝을 닦으며 덧붙였다.
“꽃가루 알레르기인가 봐요.”
하루의 대답에 모두가 정원을 돌아봤다.
정원에는 꽃이 한 송이도 없었다.
하루가 훌쩍거리며 일어났고, 강 회장도 “슬슬 들어갈까.”라며 일어났다.
안에 들어가면 바로 이 집을 떠날 생각이었던 우현은, 자리가 파하기 전 강 회장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회장님, 아까 하신 말씀은…….”
“회장님이라니요. 할아버지죠.”
우현의 말을 끊으며, 하루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번만큼은 우현도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어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하루를 쳐다봤다.
하루가 눈에 힘을 주고 우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회사에서야 회장님이더라도, 집에서는 할아버지죠. 할아버지.”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우현은 당황스러웠다.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강 전무와 김 여사, 그리고 재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우현은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하루를 내려다봤다.
“하루야, 이건…….”
“오빠. 오늘 설날이에요. 설날에 가족들 만나는 자리.”
가족이라는 게 하루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우현은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지독한 일을 당한 하루가 먼저 가족이라고 하는데, ‘가족이 아냐.’라고 반박하는 건 어린애의 칭얼거림밖에 안 된다.
“오빠. 우리 설날에는 편하게 보냅시다. 편안하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편안.”
우현은 할아버지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편안했지만, 여기서 하루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강 회장까지 기대에 찬 눈으로 우현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우현의 입술을 주목했다.
우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쥐어짜내듯 말했다.
“할아버지.”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회장님이라고 불렸던 강 회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고.
“한 번 더!”
강 전무는 휴대폰의 녹음기능을 켜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하루는.
“그래요, 얼마나 듣기 좋아요? 잘했어요.”
연두를 쓰다듬듯, 까치발을 하고 우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루의 손길이 좋기는 하지만, 우현은 이 상황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야.”
“오빠.”
하루가 짐짓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우현을 응시했다.
“할아버지예요. 나는 갖지 못했지만 오빠는 가졌잖아요. 할아버지.”
우현은 말문이 막혔다.
하루는 갖지 못한 할아버지.
알고 있었다.
어린 날, 하루가 명절에 뭘 하며 보냈는지.
“할아버지예요, 오빠. 계실 때 많이 부르세요.”
하루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박할 수 없었다.
우현은 하루가 하는 말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한숨을 삼키고 강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뭐냐?”
“아까 제가 회, 아니,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게 알려져도 된다고 하신 말씀은…….”
“우현아.”
“네.”
“이 작은 아이 한 명이다.”
강 회장의 손이 하루의 어깨에 놓였다.
“이 작은 아이 한 명, 재산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게냐?”
말문이 막혔다.
“이 작은 아이 한 명, 내 권력이 있어야 지킬 수 있어?”
“…….”
“네가 그동안 해온 것들이 있는데, 내 이름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게냐?”
강 회장의 잔잔한 음성이 우현의 가슴을 후려쳤다.
하루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
그 어린 날, 내 손을 잡아준 저 작은 손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그때는 지킬 수 없었던 그 작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 회장의 재산과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강 회장의 재산과 권력이 없으면, 나는 이 여자를 지킬 수 없는 걸까?
하루가 우현의 손끝을 꼭 잡고 우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우현도 하루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저 이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지킬 수 있다는 걸.
그때에도 내가 도망치지 않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작은 아이를 지킬 수 있었다는 걸.
그저 그때 도망친 게 미안해서, 한심해서, 너를 지킬 힘이 없었다고 포장했을 뿐이라는 걸.
그것을 강 회장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강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들어가서 윷놀이나 하자꾸나. 설날에는 윷놀이를 해야지.”
강 회장의 말을 들으며, 우현은 생각했다.
설날, 진짜 열심히들 우려 드시네.
+++
“아이고, 형님. 한복 입으시니 아주 근사하십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방에서 나가려던 도경은 걸음을 멈췄다.
저 목소리를, 도경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삼촌.”
“안녕하세요.”
저 목소리들도, 도경은 알고 있었다.
‘제길.’
하루의 가족이었다.
아직도 도경의 본가와 하루의 본가는 이웃이었다.
조부모가 돌아가신 후, 하루의 가족들은 가끔씩 명절에 도경의 집에 놀러 오곤 했다.
하루의 새아버지는 도경의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하루의 동생은 도경의 아버지를 삼촌이라고 불렀다.
도경은 그게 아주 꼴 보기 싫었다.
도경의 부모는 하루의 가족이 하루를 학대한다고 의심했던 적도 있지만, 저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해놓은 건지 이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루가 배은망덕하게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경이 그런 게 아니라고 설득을 하려고 해도, 부모님은 도경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하루의 새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싹싹하고 친근하게 행동하니까.
‘우리 아빠는 그냥 낚시 친구를 잃기 싫은 거겠지. 엄마가 저 자식이랑 낚시 간다고 할 때만 허락해주니까.’
사람들은 그렇다.
다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기가 편리해질 것만 받아들인다.
‘옆집 사는 꼬마 아이가 지독한 학대를 당했다.’라는 진실은 너무도 불편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도경아, 명준이네 왔다. 얼른 나와서 인사드려.”
이제 그들은 ‘하루네 가족’이 아니라 ‘명준이네 가족’이 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하루는 집을 떠난 지, 이제 10년이 되었으니까.
도경은 굳은 표정을 풀고 방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