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명절이 다가오면 미영은 늘 하루가 신경 쓰였다.
하루는 명절에 늘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미영과 은서는 가족들과 시골에 내려갔고, 도경도 본가가 있는 인천에서 머물렀다.
모두들 가족과 함께 하는 날.
그런 날에 혼자 있어야 하는 하루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집에 갈 준비를 끝낸 미영은, 하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루는 늘 그렇듯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김미영 팀장. 시골 가는 길이야?]
“시골은 내일 가지. 내일 새벽에 집에 갔다가 다 같이 출발할 것 같아.”
[길 안 막히려나?]
“요새는 옛날처럼 길이 막히진 않더라. 그래도 좀 막히긴 하겠지. 너는 뭐해?”
[아, 나는…… 나, 있잖아. 설날에 우현 오빠네 집에 갈 것 같아.]
“어? 진짜?”
[응. 저번에 어머님이 만나자고 하신 게, 그날 초대하고 싶다고.]
“헐, 대박! 잘 됐다! 아니, 잘 안 된 건가? 명절에 불러서 일 시키려는 거 아냐?”
[그럴 분위기는 아니더라. 저번에 갔을 때도 잔뜩 얻어먹고 왔거든.]
“웬일. 대박. 너무 잘됐다.”
[응.]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제 하루한테는 강우현 씨가 있지.’
꼭 우현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우현은 명절에 하루를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강우현 씨랑은 어때? 여전히 알콩달콩이야?”
[응, 저번에 말이야.]
하루가 재잘재잘 떠들었다.
이불 빨래를 하다가 죽을 뻔한 이야기, 같이 잠들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이야기, 연두를 산책시키면서 있었던 이야기.
사랑에 빠진 친구가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루가 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 친구, 정말로 사랑하고 있구나.’
가슴이 벅찼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미영은 정말로 이 이야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
설날 아침.
하루는 상자 안에 든 한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께 밤, 미영과 통화를 하던 중에 미영이 뭔가 생각난 듯 자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한복을 들고 왔다.
-그래도 같이 보내는 첫 명절인데 한복을 입어줘야지.
미영은 한복을 좋아해서 한복이 많았다.
미영의 집에 놀러 가서 몇 번 입어본 적은 있지만, 명절에 한복을 입는 건 처음이었다.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우현 오빠는 정장 입을 것 같던데.’
안 그래도 연휴인 어제 우현과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은근슬쩍 뭐 입을 거냐고 물어봤었다.
-평소에 입던 거 입어야지. 너도 편하게 입고 와.
-오빠는 평소에 입던 거 입어도 멋있잖아요.
-그래? 네 눈에 내가 그렇게 멋있어 보여?
-내 눈만이 아니라 누구 눈에도 멋있어 보일걸요.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으니까.
-잘생기게 태어나서 다행이군. 잘생긴 얼굴 뭐에 쓰나 했는데, 이하루 꼬시는 데 쓸 수 있었어.
자기 잘난 건 알고 있었나 보다.
하긴.
그 왕자님 같은 얼굴로, 자기 잘생긴 줄 모를 리가 없지.
왕자님.
이상하게 왕자님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심장에 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왕자가 아니라 한복이었다.
‘다들 평상복 입었는데, 나만 너무 한복이면 민망한데.’
하루는 한복을 꺼내 들었다.
다홍빛 치마가 눈에 시렸다.
“아, 예쁘긴 진짜 예쁘다. 에이, 그래. 우리나라 명절에 우리나라 옷을 입는 건데, 뭐 어때!”
하루는 옷을 훌훌 벗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도 뒤로 땋아서 곱게 늘어뜨렸다.
드레스를 입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울 앞에 서서 제대로 입었는지 요리조리 확인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하루는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하루의 예상대로 우현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우와.”
하루를 본 우현이 감탄했다.
“정말 예쁘네.”
자기가 훨씬, 백만 배 더 멋있으면서도, 우현은 하루를 볼 때마다 감탄사를 흘린다.
이쯤 되면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오빠도 아주 근사해요. 진짜 잘생겼다.”
“아냐. 네가 정말…… 와, 예쁘다.”
“오빠도 정말…… 우와, 잘생겼다.”
두 팔불출은 서로를 보며 한동안 감탄했다.
이 자리에 목격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두 팔불출을 목격한 사람은 다리와 날개가 오그라든 닭이 되었을 테니.
“그럼 갈까?”
우현이 자신의 팔을 내밀었고.
“네, 갑시다.”
하루가 우현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설날에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신혼부부처럼, 두 사람은 강 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
“하루야. 곱구나. 정말 고와.”
하루를 맞아준 김 여사가 말했다.
하루를 반기러 나온 강 전무가 김 여사를 돌아봤다.
“당신, 우리 며느님이랑 말은 언제 놓은 거야?”
“지난번에요.”
“그래? 그럼 나도 이름 불러도 되는 거야?”
“당신이 허락받아요.”
강 전무가 기대에 찬 눈으로 하루를 돌아봤다.
하루는 웃으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버님.”
하고 말했다.
강 전무가 찡한 표정으로 김 여사를 돌아봤다.
“들었어? 나보고 아버님이래.”
“지난번에도 그렇게 불렀잖아요.”
“너무 오랜만이니까 그렇지.”
저번에도 느꼈지만, 강 회장의 집은 따뜻했다.
강 회장도, 강 전무도 무섭고 냉정한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팔불출 아빠란 강 전무 같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좋은 분들인데.’
이제 하루는 그들이 품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우현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저들의 행동에 거짓이 없다는걸, 그저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걸, 우현도 알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 강 회장에게도 인사를 했다.
강 회장도 하루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손주 며느님, 참 곱구나.”
“아버지. 이제 하루라고 불러도 된대요. 아버지도 허락받으세요.”
강 전무가 끼어들었다.
“오, 그래? 우리 손주 며느님, 내가 이름 불러도 될까?”
“그럼요, 당연하죠.”
대답을 하면서 흘끗 옆을 보니, 우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몹시 못마땅한 듯했지만, 다들 하루에게 잘해주니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듯했다.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가족들은 우현이 하루에게 잘해주는지 궁금해했고, 하루는 우현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이야기했다.
우현의 가족들은 마치 판타지 소설 줄거리를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하루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하루의 말을 반만 믿는 눈치였는데, 하루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이 집에서 들어와서부터 표정을 굳힌 우현은, 하루와 둘이 있을 때의 표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하루가 우현에게 손을 뻗었다.
아까부터 꽉 쥐고 있는 그의 손 위에 하루의 손이 겹쳐지자, 우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가사도우미가 인터폰을 받으러 가는 걸 보며, 김 여사와 재현이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회장님. 유명지 씨라는 분이 찾아왔는데요.”
가사도우미가 말했다.
강 회장이 대답하기 전, 김 여사가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요.”
재현과 김 여사의 계획을 모르는 우현은, 유명지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 김 여사의 반응에 놀랐다.
“유명지가 누구야?”
오히려 강 전무가 이상한 듯 김 여사와 재현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명지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누구도 현관문에 나가 그녀를 맞아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명지는 사뿐사뿐 거실까지 들어와서 소파 옆에 멈췄다.
명지는 분홍빛 한복에 노란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지가 쾌활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오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우현 오빠 팀에서 일하는 유명지라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A병원 심장의학과 유진철 과장이고요.”
A병원은 꽤 큰 종합병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강 전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강 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명지를 보고 있었다.
그때, 김 여사가 차가운 표정으로 우현을 돌아봤다.
“우현아. 네가 불렀니?”
김 여사가 이런 표정을 지은 게 처음이기에, 우현은 당황했다.
“네? 아, 아닙니다. 저 여자가 멋대로 온 겁니다.”
“어? 오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번에 제가 명절에 뭐하시냐고 했더니 가족분들 만난다면서, 와서 인사나 드리고 가라고 하셨잖아요.”
명지가 말했다.
“호칭 똑바로 해요. 우리 우현이, 아가씨가 오빠라고 부를 만한 사람 아니에요.”
김 여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명지는 움찔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에이,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현 오빠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오빠라고 불러야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지지 않는 명지의 태도에, 재현과 우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루 역시 명지의 뻔뻔함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우현에게 오늘 명지가 올지도 모른다는 언질은 들었지만, 진짜로 올 줄은 몰랐다.
초대를 받은 나도 이렇게 긴장하는데, 저 여자 신경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보통 쇠심줄이 아니네.’
“아가씨. 오빠라고도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부르지도 말아요. 아가씨에게 우리 우현이는 그냥 팀장님으로 족해요. 머리가 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텐데요. 아니면 머리가 나쁜가요?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는다고 하면 머리가 나쁜 여자가 되기에, 명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말로 명지를 누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기에, 우현은 김 여사에게 감탄했다.
우현의 앞에서는 항상 슬픈 미소만 짓던 김 여사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김 여사는 유명지 같은 여자에게 질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김 여사의 배경도 세정 그룹 못지않게 어마어마하니까.
“하긴.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걸 보면 머리가 나쁘긴 나쁜가 보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김 여사가 피식 웃으며 덧붙인 말에 냉기가 흘렀다.
명지의 얼굴이 굳었다.
명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김 여사를 쳐다보다가 곧 다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 절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여기 하루 언니도 왔잖아요. 제가 하루 언니랑 우현 오빠랑 정말 친하거든요. 셋이 같이 데이트도 하는 사이예요. 그래서 명절에는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명절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죠. 아가씨가 우리한테 인사를 할 필요는 없어요. 돌아가요. 좋은 날 망치지 말고.”
“하지만 하루 언니도 가족 아니잖아요.”
“가족이에요. 내 며느리니까.”
김 여사의 말에 하루가 감동을 받기도 전에, 명지가 반박했다.
“어머님. 남녀 사이는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불미스러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 우현 오빠가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릴…….”
“어디서 그따위 소리를 해!”
버럭 외친 사람은 김 여사가 아니었다.
강 전무였다.
강 전무의 외침에 명지보다 우현이 더 놀랐다.
강 전무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다.
아니, 두 번째다.
아주 어릴 때, 그날에 한 번 봤으니까.
그 이후로, 강 전무는 그날 화낸 걸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결코 화가 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성을 높인 적도 없었다.
그런 강 전무가 분노에 찬 눈으로 명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 전무의 시선을 받은 명지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
강 전무는 마치 당장이라도 명지를 씹어죽일 것 같았고, 그저 분란을 일으키기 위해 찾아온 여자를 상대하는 것 치고는 과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하루는 강 전무가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 또한 알았다.
결혼 전의 불미스러운 상황.
예비 신랑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상황.
그것이 강 전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리라.
“약점이라도 잡힌 게냐?”
침묵을 깨고 강 회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껏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강 회장의 시선이 우현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의 분노에 당황하고 있던 우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네. 제가 강 회장님의 손자라는 걸 여기저기 알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냐?”
강 회장의 시선이 명지에게로 향했다.
“알려라. 바뀌는 건 없을 테니.”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하지만 우현은 놀랐다.
‘바뀌는 게 없을 거라는 뜻은, 알려져도 괜찮다는 건가? 나한테만 연애를 하라는 조건까지 걸었으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강 회장이 서늘한 눈으로 강 전무를 돌아봤다.
“저거 치워라.”
강 회장이 자신을 ‘저거’라고 했는데도, 명지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강 회장은 우현과 달랐고, 강 전무와도 달랐다.
언성을 높인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데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명지를 덮쳤다.
모두를 긴장하게 만든 강 회장은 하루의 옆으로 가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리 손주 며느님. 여긴 너무 시끄럽지? 할아버지랑 참새 모이 주러 갈까?”
‘이 겨울에 웬 참새?’
다들 긴장한 와중에도 생각했다.
참새에게 모이를 주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하지만 우현은 다른 생각을 하며 하루와 함께 나가는 강 회장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우리 우현이. 할아버지랑 참새 모이 주러 갈까?
재현이 태어나서 김 여사와 강 전무의 신경이 온통 재현에게 쏠려 있던 그때.
이 세상에 혼자만 남은 기분이 들었던 그때.
강 회장은 우현에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랑 참새 모이 주러 갈까?
그때 강 회장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미소가 떠올라, 우현은 멍하니 강 회장의 뒷모습을 지켜봤다.